우리 詩의 현장
ㅡ『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0년 7~8월호,
떠도는 실재, 매혹하는 언어/ 김문주 (평론가, 영남대 교수)
1.
근래 한국 시단은 심미성의 폭발적인 분화를 경험하고 있다. 다양한 미적 분광을 보여주는 오늘의 우리시는 종전의 시적 관성을 전복하면서 새로운 시의 영토를 개척하는 중이다. 사회 환경의 변화와 맞물린 새로운 감수성의 등장은 한국시의 오랜 전통 요소들을 충격함으로써 시에 대한 인식을 갱신케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시적 실험을 더 이상 예외적인 현상이 아닌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한편으로는 광범위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변화에 대한 시각차는 당연한 것이다. ‘문학의 종언’과 관련된 담론이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바, 최근 한국문학의 양상은 총체적인 감수성의 변화에 의해 도래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단순히 문학(언어)에 대한 인식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토대를 이루는 생활 세계 전반에 대한 감수성의 총체적 변화를 시사하는 듯하다. 우리 시단의 양상을 중대한 변화로 읽는 이러한 시각 역시 다른 쪽에서는 넌센스로 읽힐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어찌보면 한국문학의 현장을 웅변하는지도 모른다. 최근의 시적 현상을 중대한, 혹은 위태로운 변화로 보는 비평 의식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창작 감각 사이의 거리는 2000년대 문학들 간에 가로놓인 크레바스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여기에서 하나 생각할 대목은, 이러한 광범위한 변화가 전적으로 시인들의 내발적 추동력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문학 작품의 변화를 불러오는 것은 문학의 안과 밖에 두루 걸쳐 있지만 문학이 하나의 제도로써 자기충족적인 성격을 강하게 띨 경우, 창작의 방향은 문학판 내부의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2000년대 한국시단은 시의 사회적 영향력이나 관심이 현저하게 약화된 반면 그 어느 시기보다 활발한 분화를 이룬 게 사실이다.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시 전문지가 늘어나고 발간되는 시집의 종수도 많아졌다. 한 해에 무려 3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2∼3년 간격으로 시집을 내는 젊은 시인들도 여럿 생겨나고 있다. 시단의 주목을 받는 일군의 시들이 전국 각지에서 발행되는 잡지의 주요 기획란을 차지하는 동안 일부 평단은 이들의 시를 문제 삼았고, 이러한 비평적 관심의 바깥에 존재하던 시인들은 미적으로 동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위축된 게 사실이었다. 그럴듯한 미적 근거 없이 비평의 세례를 받는 작품들에 관해 비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의미조차 온전히 해득되지 않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양상이 우리 시단의 내면 풍경의 일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정 시인들에 대한 문학 매체들의 과도한 집중은 장기적으로 시인 본인에게도 유익하지 않을 뿐더러, 비평적 조명을 받지 못한 시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심미적 자괴를 불러올 수 있고 이로 인해 자기화하지 못한 창작방법의 모방을 부추길 수 있다. 시적 개성이 트렌드를 이루고, 여기에 대한 선별 능력을 잡지 운용자들이 갖고 있지 못할 경우, 시단은 아류와 수사적 거품 생산에 역설적으로 기여하는 반동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 시는 시적 성찬(盛饌)을 만끽했던 2000년대를 넘어 또 다른 곳을 응시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다양한 가능성이 하나의 시적 개성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시대적 유행을 넘어서는, 세계와 언어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인식과 더불어 그 도정을 기다리고 주목해 주는 비평 의식이 요청된다. 그러한 점에서 현재 발행되는 시전문지들 간에 시각과 취향의 차이가 좀더 분명해져서 소개되는 시편들의 저변이 넓어지고, 아울러 자기 개성을 찾아가는 시인들의 여정을 읽어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시인이나 잡지 운영자들 모두 미학적 조급증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도에 폭과 깊이를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2.
시의 풍경을 범박하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눈다면, 대상을 감각의 구체로써 복원하는 사실적 풍경, 대상 세계를 정서화하는 정서적 풍경, 그리고 심리적 실재를 바탕으로 하여 언어로써 생성되는 언어적 풍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두 가지가 비교적 익숙한 시의 풍경인데 반해, 세 번째 경우는 낯선 언어의 출현과 결합이 만들어내는 연금술의 풍경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마치 가마 안의 불이 자기(瓷器)의 기묘한 색채를 빚어내는 것처럼, 언어의 작용을 활성화하여 형상의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을 이질적인 언어로 호명하거나 한 문맥 속에 다른 층위의 형상 언어들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출현하는 이 뜻밖의 풍경에서 우리는 어긋남이 만들어내는 입체적 풍경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현실의 실재를 구축하는 사실적 형상 언어와 달리 형상의 파편들 사이로 어떤 심리적 실재를 환기시키는 언어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풍경의 풍요로운 사례를 우리는 김경주의 시편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영은의 신작시에서도 이와 같은 언어의 결합 양상을 목도하게 되는데, 이번 시편들은 이를 통해 ‘관계’와 관계에 관한 나의 ‘내면’ 상태를 그려낸다.
눈 내리는 풍경은 자음과 모음으로 가득 찬다 지상은 등허리가 휘어지고 하중을 견디지 못한 뼈마디에 얼어붙은 습문들, 오래 전에 흘러나간 낱말들은 기척이 없다
녹고 있었다, 라는 마지막 문장이 생각났으니 관절이 접힌 당신은 틀림없는 빙하,
경사진 가슴팍을 이동한다 차고 시린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누구의 흉부에서 생겨난 눈물인가 얼음 날개를 세운 등이 녹아 내렸지만 얼음 궁전을 깨는 달빛은 해수면에 잠겨 해독될 수 없다 뜨거운 입김으로 녹아내린 틈새를 비문으로 메운다
당신은 출렁이는 잠 속을 떠다니는 빙하, 눈썹과 눈썹 사이 극지의 하늘 아래 협곡을 남긴 이뉴잇의 긴 어둠이 만져 진다 고립된 새벽이 뒤척인다 기울어진 벗어나고 싶은 바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낮은 곳으로 더 바깥쪽으로 흐르는 물소리 잠시 들리지 않는다 겹눈으로 진화한 사랑은 마침내 빙하가 되는 것일까 U자곡의 내면을 따라 흐릿하게 번지는 긴 문장의 행로,
당신의 빙하기가 침식되기 시작 한다
- 「谷氷河」 전문
강영은 시의 언술은 이질적 층위의 언어들을 하나의 언술 속에서 결합하되 각각의 단위들을 단속적(斷續的)으로 배치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한 편의 시는 산문형의 문장들로 이루어진 여러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연 단위에서 활성화된 기묘한 이미지들이 다른 연의 이미지들과 입체적으로 연대하는 양상을 띤다. 이를테면 첫 연의 ‘눈 내리는 풍경’은 “오래 전에 흘러간 낱말들”이나 “뼈마디에 얼어붙은 습문들”과 결합하면서 3연의 ‘비문’이나 5연의 “문장의 행로”등과 연결되어, 당신에 대한 나의 내면 을 형상하는 의미의 통로로 작용한다. 그래서 무의식의 풍경 같은 각 연의 이미지들은 의미의 부침(浮沈)을 실현하면서 내면의 실재를 그려내는 것이다. 대상이나 관계의 구체성을 형상화하기보다 대상에 관한 내면을 이미지화하는 강영은의 시편에서 우리는 명료하게 의미화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결코 단순한 평면으로 형상하기 어려운 심리적 실재의 실체적 양상을 생각하게 된다. “당신은 출렁이는 잠 속을 떠다니는 빙하, 눈썹과 눈썹 사이 극지의 하늘 아래 협곡을 남긴 이뉴잇의 긴 어둠”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환상성은, 관계가 만든 감정들의 삶을 독특한 감각으로 보여준다. 마음이 생각대로 하나의 상태나 방향으로 정리되지 않는 것처럼, 내면의 삶 역시 평면적인 이미지로 그려낼 수 없음을 이 시는 생각게 한다. 이 시의 이미지를 “겹눈으로 진화한 사랑”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때의 ‘겹눈’이야말로 감정의 입체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여전히 문제적이라면, 그것은 사랑 혹은 사랑의 감정이 전혀 통제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고 온갖 고통스런 경험 이후에도 다시 고개를 드는 욕망을 스스로의 몸 안에 내장하고 있는 것이리라. 강영은의 신작시편들은 “U자곡의 내면을 따라 흐릿하게 번지는” 감정에 관한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 즉 그녀의 “문장의 행로”가 ‘겹눈의 이미지’를 띠는 것은 형상화하려는 대상이 본질적으로 “흐릿하게 번지는” 삶을 살기 때문일 것이다. 시작(詩作)을 통해 밟아가는 이 “문장의 행로” 속에서 시인은 내면의 삶에 기숙한 자기-감정들을 복기하며 이 과정 자체를 향유하는 것이리라. 그러한 점에서 강영은의 언어들은 현실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한 자기-내면의 소환이라고 할 수 있다. 시 「무화과」가 형상화하고 있는 열매 속에 꽃을 품고 있는 ‘無花果’나 “사슴뿔을 단 늑대”는 이렇게 현실화되지 못한 화자의 내면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며, 시인은 그러한 이미지들의 삶을 통해 ‘잎사귀’를 흔드는 “두 마리의 짐승”의 야생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이번 신작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울음’ ‘바람’ ‘서녘’ ‘저녁’ 등의 시어들은 이 야생성을 부르는 욕망의 기표들인 셈이다.
사내는 몸속에서 울음을 꺼냈다 울음은 우는 화살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울음의 변방에 빗살무늬를 장치한 구름이 빗발쳤다
과녁을 향해 당겨지는 화살은 빗줄기의 연대, 피할 도리가 없으므로 그가 사랑한 사슴과 말과 여자는 붉은 비애悲愛, 피가 흥건했다
광대처럼 광대싸리나무 속에 울음을 가둔 그는 온몸이 화살통인 사내, 핏발 선 눈으로 뼈를 날려 보내는
사랑이 과녁이라면, 흉노의 피를 지닌 그를 사랑 하련다. 오랑캐, 오랑캐 하고 부르면 말편자처럼 닳아 돌아오는 그를,
구멍 뚫린 염통에서 붉은 울음 꺼이꺼이 토해내는 서녘을 밟고 일몰의 태양이 멀어 진다 입시울 소리처럼 오래전에 잃어버린 일촉즉발의 활시위가 팽팽 해진다
배를 갈라 울음을 꺼낸 단발명중은 살부림의 효시嚆矢,
북방중원의 무덤 속인 듯 오후 6시의 과녁이 운다 몸이 떨리고 목젖이 운다 과녁을 삼킨 나의 화살은 그렇게 흐느낀다
- 「우는 화살」 전문
인용 시편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소재는 ‘울음’이다. 시의 화자는 사내의 울음에서 화살을, 화살과 더불어 쏟아지는 빗줄기를 연상한다. 이 화살의 주인은 ‘사내’이고 사내는 “온몸이 화살통이”다. 그의 “핏발 선 눈”이 화살 같은 “뼈를 날려 보낸”다는 점에서 ‘나’를 향한 그의 존재는 ‘화살통’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상의 과정은 이 시가 사랑을 향한 고백의 내면을 야생적인 이미지 속에 보존하려는 것임을 암시한다. “사랑이 과녁이라면, 흉노의 피를 지닌 그를 사랑하련다. 오랑캐, 오랑캐 하고 부르면 말편자처럼 닳아 돌아오는 그”. 이러한 그의 과녁이 되겠다는 고백, 아니 과녁이 과녁이 되는 순간의 감각과 감수성을 이 시의 언어들은 생생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다. “오랑캐, 오랑캐 하고 부르면 말편자처럼 닳아 돌아오는 그”, 이 시어들 속에 맥동하는 야생성(野生性)이야말로 화자가 누리고자 하는 생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화살의 형상으로 그려진 ‘사내’는 스스로의 내면이 투사된 자기-이미지에 가까워 보이며, 이는 6연의 언술에 내장된 피동과 피학의 심리에도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격정과 격동의 상태는 아무래도 동작을 받는 상태에서 생생하게 보존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스릴러의 박동이 쫓기는 자의 것이듯, 화자는 ‘사내’에 의해 ‘팽팽해지는’ ‘여자’의 감수성을 통해 격동의 삶을 사는 것이다. 강영은의 시에 등장하는 ‘당신’은 어찌보면 ‘나’를 흔들고 맥동하게 하는 ‘나의 짝패’이며, 이를 형상하는 언술은 ‘활시위’의 탄성을 유지하기 위해 배치된 언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문주(金文柱)평론가 /2001년 서울신문(평론), 2007년 불교신문(시) 등단. 제9회 젊은평론가상 수상, 저서로 <소통과 미래>, <형상과 전통> 등이 있음. 계간 <서정시학><딩아돌하> 편집위원, 현재 영남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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