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시 속에 드러나는 자기 목적성을 중심으로

아리박 2012. 2. 17. 09:00


시 속에 드러나는 자기 목적성을 중심으로/ 강영은



현대시 창작의 방법이 보여주는 모호함은 세계와 사물에 대해 스스로의 실존적 가치가 결여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존재의 조건을 드러낸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적인 속성은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무엇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시를 쓰는 행위는 창조적 계시가 시적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갖추었을 때 행해지는 행위를 말함이며 시창작의 행위는 표현과 불가분의 것이 된다. 표현함에 있어서 시가 지닌 본래의 기능이 순일(純一)하게 발휘될 때, 실존에의 결여가 자기목적성(自己目的性)을 지니게 됨은 너무나 당연하다.



자기목적성을 뜻하는 영어 'autotelic'은 그리스어 'auto(자기)'와 'telos(목적)'가 결합한 말이다. 어떤 일을 행할 때, 외부의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보다는 그 일 자체가 좋아서 경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를 말함인데 그러한 목적을 가진 사람은 자기 목적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시인은 시를 쓰는 행위에 대해 물질적 수혜라든가 재미, 쾌감, 권력, 명예 같은 별도의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부의 보상이나 위협에 농락당하기보다는 전체를 둘러싼 삶의 흐름에 깊숙이 빠져든다. 시인에게 있어 자기 추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종교, 철학, 도덕 또는 인간 삶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독자적 영역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좋아서 쓴 시 자체보다 더 고귀한 가치를 해 아래 찾을 수 없다” 라고 한 <에드가 알렌 포우>의 말처럼 시인의 눈으로 드려다 보면 어떠한 시도 시를 쓰는 기쁨에 의해 써진 시보다 진실하고 숭고한 시가 될 수 없다.  



시인은 시적 묘사와 진술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자신의 추억과 열정을 일치시키고자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성과 전달성 간에 이완이 생겼을 때 “일반적으로 전달성보다 자기 목적성이 우위에 있다는 원칙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고 <와타나베 마모루>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목적성이야말로 예술 행위의 동기이고, 이에 의해서만이 창조적 행위의 최고 가치인 자유가 기초 지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성이 확립되지 않으면 예술 행위를 하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독자에게 불편을 끼치는 행위도 될 수 있다.  



이번에 받아본 미주시편은 자기 목적성에 충일한 시편들로 짜여져 있다. 이민생활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파생된 정서가 문학적인 장르에서 자기 목적성을 가졌을 때,  존재의 결여가 어떠한 양태를 지니는지 살펴보는 순간은 나에게도 흥미로운 일이다.



1, 넘어야 할 벽




  미주시인들의 면면을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미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해 본다. 미지의 땅,  미국은 개인의 능력과 성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존재하는 꿈의 땅으로 인식되어왔다. 미국에 가면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게 잘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어려웠던 한 시대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발견한 최초의 탐험에서 비롯되었지만 이 후 미국은 방대한 국토와 자원 그리고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대사회의 경제적 빈곤을 해결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미국이 가장 부유했던 1990년과 2000년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미국은 동경의 나라이며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세워진 흠모의 피난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설고 물선 땅에서 鼓腹擊壤(고복격양)의 삶이란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100년의 세월을 지닌 한국이민의 역사도 많은 땀과 얼룩진  피로 기록되었을 터였다. 그 정착의 과정은 우리들의 상상을 훨씬 상회하는 고통과 애환의 연속이었으리라. 사고무친의 낯선 땅에서 삶의 터전을 가꾸면서 일상어로 사용되지 않는 모국어를 사용하여 시를 쓴다는 것은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자기 존재의 회귀이며 존재가치를 증명하는데 충분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 기조로 써내려간 시편들은 향수를 달래주거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방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인생의 표현이요,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 라고 말한 이는 <허드슨>이지만 이민 생활의 소외감과 이질감 속에서 모국어를 잊지 않으려는 열정과 접점을 이루는 자기 목정성은 존재감의 결핍이라는 현실 앞에서 상상이라는 질료보다 감정이라는 질감을 통한 해석 쪽에 보다 가깝다. 그래서인지 이민생활의 아픔을 현실적으로 직시하는 시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김영교의 시를 읽어보자.




억양이 다른 언어의 토양/ 마음 부칠 데 없어/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수직의 이민벽에 이마를 찍고 또 찍고/ 퍼뜩 드는 정신// 외로워서 기대는가/  슬픔, 속으로 감추며/ 사랑, 빨갛게 덮으며 /밤낮으로 벽을 기어오른다// 배를 대고 빈대처럼 납작 붙어 기는 여정/ 손톱 닳고 눈물도 닳아/ 그래도 닳아버리지 않는 꿈/ 맨가슴에 있다 // 푸른 잎 하나/ 넝쿨 전체를 끌고/ 서로 붙잡아 밀어 올리며 키워/ 느리게 기어 올라가는 저 힘/ 마침내 벽을 뒤덮는 새벽// 앞장서서/ 담쟁이 넝쿨, 너/ 이민 장벽을 보란 듯이 통과하고 있다.

          -김영교<담쟁이를 위하여>후반부-




끈질긴 생명력으로 표상되는 담쟁이는 많은 시인들이 즐겨 다룬 소재이다.  김영교의 ‘담쟁이’는 극복해야 할 담과 벽을 지닌 이주민의 아픔을 시인다운 눈으로 직시한다. ‘담쟁이’라는 사물에 이입된 이주민의 아픔은 은근과 끈기로 점철된 자기 극복 의지와를 표상한다. 그의 또 다른 시 ”독거인“은 노인이 된 채 이국에 독거하는 외로운 친구의 모습을 통해 ”소망은 다음 세상을 위한 것“ 이라는 삶의 성찰과 타향이 고향인지 고향이 타향인지 알 수 없는 이주민의 고독한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폐차장교실“ 은 고장 난 자동차를 위해 필요한 부속품 하나 찾아 폐차장을 찾았다가 ”산더미 폐차장 허무 앞에/ 삶의 교통법규에 순종하는/ 아직은 괘도에 붙어있는 원형 바퀴인가, 나는“이라는 고백을 통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바쁜 일상 속에 ”만신창이의 몰골로 끌려 온 생“에 대한 자기 행적의 어두운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이 모두가 이주민의 넘어야할 벽이면서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아픔이 아닐까 한다.




2, 그리움, 혹은 추억의 풍경




김영교의 시가 생활, 혹은 일상 속에 천착된 내용을 보여주었다면 정용진, 윤휘윤, 최석봉의 시는 현실이 아닌 과거의 이미지를 불러들여 모국의 향토적 정서를 환기시킴으로써 자기 목적성에 도달한다. 때문에 시적 공간은 일정한 공간 속에서 경험으로 관찰한 묘사가 아닌, 과거의 기억 위에 현재 겹쳐지는 심상을 함께 서경화한 공간이 작품 속 공간의 主를 이룬다. 작품 속의 시점이 시인이 대상을 구체화 하는 일정한 체계인 것을 감안해 볼 때, 이들 세 시인이 세계와 만나는 접점은 심상 속에 내재화 되어 있는 그리움, 혹은 우리들의 추억이다. 정용진의 시을 보기로 하자.




하늘은/ 구만리 장천(長天)// 물은/ 천만 길 취옥(翠玉) 항아리// 누구를 찾아/ 저리 높았는가.// 무엇을 찾아/ 저리 깊었는가.// 하늘은/ 쪽빛 눈망울// 호수는/ 내 누님의 청옥(靑玉) 가락지.

    -정용진<에메랄드 레익(Emerald Lake)>전문-




이 시는 캐나다 록키산맥 중턱에 있는 호수의 맑은 물빛을 드려다 보면서 누님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것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국생활의 모습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제목에서 풍기는 호수의 이름과 1연의 ‘구만리 창천’이라는 표현, 3연, 4연의 진술을 통해 시적 대상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하늘과 호수의 대비법이 청옥 가락지와 결합하면서 심상 속에 새겨진 누님의 이미지를 표출해냄으로써 아울러 고국에 대한 내밀한 그리움까지 묘사해낸다. 그의 또 다른 시 <옥수수>는  전통 서정시의 기법을 통해 옥수수를 자신을 업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선명함게 보여준다.  감동과 정서를 주관적으로 읊은 서정시의 본령에 충실한 그의 시는 아련한 추억의 풍경을 다감하게 선사한다.  




시에라 산에 올랐다가/ 계곡 자갈 사이에서 낮잠 자고 있던/ 석어 한 마리 잡아 /벽난로 옆에 두었더니/온 집안에 집 안에 물너울이 인다// 여 나무 살 적/ 어머니가 소금에 절여준 석어/ 유달산 바위에/ 널어 말리는데/ 하늘이 푸르디푸르러/ 석어랑 함께 둥둥 떠다니다가 깨어보니/ 반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니는 낮잠만 자다 온 나를 쓰다듬어 주시며/ 열 마리나 도망쳤구나 하셨는데/ 그 때 멀리 가버린/ 꿈에 날던 석어 한 마리/ 벽난로 옆에서/ 어머니랑 웃고 있다 /

        - 최석봉의<석어>전문-




‘석어’는 그리 익숙한 단어는 아니다. 바닷고기인 조기(石魚) , 민물고기인 자가사리(螫魚)를 말하는데 ‘석어’를 한자로 쓰지 않은 것은 시인의 의도라 이해된다. “시에라 산에 올랐다가/ 계곡 자갈 사이에서 낮잠 자고 있던/ 석어 한 마리”와  “여 나무 살 적/ 어머니가 소금에 절여준 석어”는 같은 발음의 다른 뜻(同音異義)의 단어를 수사학적으로 연결시킨 재미를 보여준다. ‘석어’는 어머니와의 추억, 혹은 정체성의 완고함을 드러내는 일종의 장치이며 유기적인 측면에서 볼 때, 타국 땅에서 살아가는 “이방인” 내지는 “혼혈아”처럼 현재의 자기 모습을 은유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민생활의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꿈에서 깬 어린 자식에게 '열 마리나 도망쳐버린 석어' 라고 재치 있게 말씀하시는 어머니,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모성애가 잔잔하면서도 뭉클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흰 머리칼 쓸어 넘기면서/ 할머니가 벌판을 이고 돌아올 때/ 대문 여는 소리였다가/ 구름 되어 도시로 간 손자의 구두소리였다가/ 달에 치성을 드리는/ 며느리의 치마 끄는 소리// 한 바퀴/ 두 바퀴/ 한 家門의 족보를 재끼고/ 옛 것이 간 자리에// 새 것이 오는/ 조선의 함성

                       -윤휘윤 <맷돌>후반부-




윤휘윤의 시는 관념적 관점에서 바라본 해석적 지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시인의 눈이 사물의 현상과 의미를 파악하는데 시의 기조를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브제가 되는 ‘맷돌’은 구체적인 사물이지만 시인의 심리 속에 내장되어 있는 추억을 통해 재구축된 시적 공간은 관념의 세계이다. 관념의 세계라고 했지만 "흰 머리칼 쓸어 넘기면서/ 할머니가 벌판을 이고 돌아올 때/ 대문 여는 소리였다가/ 구름 되어 도시로 간 손자의 구두소리였다가 /달에 치성을 드리는/ 며느리의 치마 끄는 소리" 처럼 시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고향의 모습이다. 향수어린 정조가 물씬 풍겨나오고 향토적 정서가 아련하다.  “지축을 꿰뚫은 듯/ 중심은 잡았지만/ 自轉의 의지를 잡지 못한 채 끝도 없이 원을 그“리는 <콤파스>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개성 있는 작품이다. 관념을 개념으로 천착하려는 시인의 시세계가 무리 없이 전개 된다.  




3, 일상에의 몰입, 혹은 관조의 여유




글로벌 시대에 걸 맞는 이민생활의 장점은 무엇보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직접 체험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맛있는 음식이 다양한 소스의 혼합으로 완성되듯 문화도 다양하게 섞일수록 감칠맛이 나는 다문화가 탄생될 것이고 이처럼 다문화가 존재하는 미국에서의 삶은 적응하기에 따라서 색다른 즐거움과 다양한 재미를 변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민생활의 시공간을 변주하기보다 일상의 삶과 자연이나 사물 같은 세계를 응시함은 삶의 고단함 보다는 자연에 감흥하거나 삶을 관조하는 가운데 낯선 세계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목정성을 보여준다. 이세방, 신지혜, 손지언, 조정하의 시는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 위안, 자기 구원에 비중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지각이나 감정 등 마음의 상태에 대한 진실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의 가치기준을 재현적 진실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과일시장을 찾아 나선다//무지개 보다 더 아름답고 분명한 얼굴들/싱싱하고 동글동글한 동그라미들/그지없이 어여쁘지만 그냥 깨물어 먹고 싶다/하지만 저렇게 예쁜 과일들을 깨물어 먹다니?/주책없이 웃기만 하던 하느님은 웃음을 그친다/사람이 과일을 먹어야 내가 씨가 되어/흙으로 가 볼 수 있쟎아? 하늘에서만 사니까/흙이 그리운 거 있쟎아?/

                         -이세방의<과일시장에서 만난 하느님>후반부-




이세방의 시는 일종의 생활시라 할 수 있다. “하얗게 신 아내의 머리에 염색을 해”주는 일이나 과일가게와 같은 주변에서 모티프를 찾아내는 그의 시는, 시가 일상과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보여준다. “아내는 세상 사람의 눈이 두려워/제 모습을 감추는 행위를 원하는 것이고/나 또한 그 행위에 가세하고 있는 것이다.” 라든가 “몸과 마음은 쓰러질듯/휘어진 나무처럼/간신히 서 있을 때” “얼굴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만/하느님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좌판에서 나온다/하느님은 잔털이 송글 글한 키위 속에 있다”는 시적 발화는 자기반성의 미덕과 함께 ‘만물은 신(神)들로 가득 차 있다’ 말고 한 탈레스의 물활론 적 사유를 보여준다. 일상적 삶이 모티프가 되어 시들은 읽는데 편안하다.  소통의 원활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이 시인이 지닌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새벽 산책길/크게 심호흡을 한다//그때마다 공기 한줌이 빨려들었다 빨려나간다/삼천대천 우주가 내 코끝으로 들락날락한다//나를 빠져나간 공기가 다시 네 속으로 빨려든다//너를 빠져나온 공기가 다시 내 속으로 빨려든다//내가 빨아들인 이 공기도/지금은 아득히 사라진 古代, 그 어느 死者의/내부를 탱탱이 살찌웠던 그 물빛/숨결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풀무를 돌리며/차가운 눈물을 따뜻이 데워냈을 것이다//저 길가에, 푸른 화두 주렁주렁 매달고 서있는/상수리나무들과, 희미한 종소리로/새벽을 틔워내던 초롱꽃들. /새벽 산책길,/불현듯 내 코끝이 찡해진다/  -신지혜의 <공기 한 줌>전문-




신지혜의 시는 ‘공기’ 라는 일정한 대상에 대한 나름의 깨달음을 명시적으로 들려준다. ‘공기’ 라는 사물을 통해 “위태로운/허공 절벽을 시시때때로 박차 오르던 이름 모를 새들과/나 한 숨결 고루 나누면서도/가없는 수평의 겸허를 깨닫지 못했다”는 깊은 사유를 진솔하게 드러낸다.  가시적 이미지를 이루지 않고 가청적 이미지를 이루는 시인의 이러한 진술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탐구와 사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벽 산책길의 일상을 관조하면서 과거를 통한 현재의 반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어느 死者의/내부를 탱탱이 살찌웠던 그 물빛/숨결이었을” 대목에서는 해석적 진술의 묘미를 맛본다.  




물방울/ 너를 바라보면/ 어룽대는 번뇌의 그림자/ 모서리를 궁굴리며/떨어지고 / 본다// 태고적부터/ 겸허 띠로 허리 두르고 /아래로 아래로/ 굽히는 해맑은 모습/ 빛나는 별빛이다//우듬지 한 끝에 맺힌 너/태양처럼 우러러 방울진 내 눈망울/ 말갛게 헹구는 / 세월 속 먹구름 //없어진 듯/살아 숨 쉬고 사라진 듯/ 되살아 반짝이는/ 물방울 꽃의 구원久遠의 숨결이다 //물방울이 되고 싶다

            -손지언의 <물방울이 되고 싶다>전문-




독백 적 진술은 인식주체(시인)가 스스로 대상이 되어 반성하고 기원하는 형태가 주류를 이룬다. 그 구조를 살펴보면 대개 회고적 시점과 기원적 시점,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앞 서 말한 신지혜의 시가 회고적 시점에서 씌어졌다면 손지언의 시는 과거와 현재의 반성을 토대로 미래의 삶에 대해 희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물방울에 대한 희구와 소망은 “어룽대는 번뇌의 그림자” 라는 반성에 진술의 초점이 모아져 있는 것이 아니라 "되살아 반짝이는 물방울 꽃“처럼 구원의 숨결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은 간절한 기원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기도의 형식을 차용하여 소망을 전하는 맑은 시심이 마음을 정갈하게 씻어준다. ”우듬지 한 끝에 맺힌 이슬“과 같이 사랑과 화해로 세계를 끌어안는 시심은 독자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움이 한 치 자라/ 꽃 한 송이가 핀다 //연보라 빛 연정 수줍게 피어나 /바람에 나풀댄다 //푸른 실 다리 타고 /뛰어 오르는 열망의 키 /더 붙잡을 수 없어/ 안타까운 가슴 꽃으로 핀다 //더 그리우면 하나 더 핀다

         조정하의 <나팔꽃>전문-




해석적 진술의 경우 일반적으로 존재와 의미의 탐구를 통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보여주는데 조정하의 시는 시적 대상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써 관조적 시점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관조적 해석의 양상은 다양하지만 “ 나팔꽃” 과 “ 강”은 그 중에서도 정의적(定議的)인 해석의 양상을 보여준다. 순정한 여인네의 그리움을 키워드로 삼고 “안타까운 가슴 꽃” 으로 해석한 “나팔꽃” 을 읽으며 그리움이라는 관념이 눈에 보일 듯 손에 잡힐 듯 애틋하게 다가옴을 느꼈다. “그리움이 한 치 자라/ 꽃 한 송이가 핀다//더 그리우면 하나 더 핀다” 지금쯤 시인의 꽃밭에는 무성한 그리움이 무수한 나팔을 불고 있을 것 같다.




4, 숙명적 노마드의 존재




현대인은 자신의 삶에서조차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늘 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들과 조우한다는 노마디즘의 속성을 지닌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개념에서 빌려 온 노마디즘(Nomadism), 즉 유목주의는 기존 가치와 삶의 방식을 맹종하는 게 아니라 불모지를 이동해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노마드란 유목민처럼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것, 곧 한 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뜻한다. 이는 단순히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의 여행을 의미한다. 마음만 먹으면 전 세계를 24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글로벌시대에 역마살과도 같은 이러한 기질은 새로운 세상을 찾는 이들에게 走馬加鞭(주마가편)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시인이란 천분(天分)을 타고난 자들에게 노마드 적인 삶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닐까, 배정웅, 기영주의 시에서 끊임없이 나와 타자를 분리시키는 고착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유를 추구하는 노마디즘을 확인해 본다.




작은 먼지 한 톨에도 세상의 인력이 존재하다고/*바가바드기타 한 대목에 그렇게 씌어져 있었네/이승의 면면 작디작은 풀꽃에 이르기까지/서로서로를 그리워하는 저 몸짓은 모두 인력의 탓이리/한번도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신은/당신의 그지없는 인력으로 수시로 우리를 잡아당겼다 놓았다하네/한갓 신의 가느다란 실 끝에 매달려서/나 이날 이때까지 영혼없는 헝겊 인형처럼 대롱거렸을 뿐/내 가슴속에 불꽃처럼 일어나는 이 그리움도/기실은 그 인력의 작용이리  아아 잠들기 전 내 가난한 램프에 불 켜리/아르헨티나산 볼펜 글씨로 노트장  마지막 전언인 듯 몇 자 적어놓으리/먼 훗날 누군가가 있어 이 글을 읽고서는/지금의 나처럼 생각이 끝없이 깊어지리/세상의 어드메 숲 속 먼데서 붉은 가슴울새가/어둠의 시간을 쪼고 쪼아도 그리운 슬픔의 잠 못내 뒤척이겠네/-배정웅의<인력에 대하여>전문-



인력이란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말한다. 이를테면,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지구가 빗방울을 당기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여러 종류의 인력이 존재하는데 시인은 그리움을 인력의 현상으로 풀어낸다. “먼 훗날 누군가가 있어 이 글을 읽고서는/지금의 나처럼 생각이 끝없이 깊어지”는 것 역시 인력의 작용일 것이다. 하지만  시는‘사상과 정서와 등가물’이기에 어떤 의미에서 비논리 비진실성을 띠게 된다. 과학적 진실에서 인력의 크기는 두 물체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힘의 크기가 약해지지만 시인은 고정된 공간이 아닌 탈공간의 유목 속에서 그리움의 인력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거리는 멀어질수록 커지는 역설을 보여준다. 현대시는 하이퍼를 통해 습득된  다양한 정보를 통해 세계를 재편성하기도 하는데, 백상웅은 “작은 먼지 한 톨에도 세상의 인력이 존재한다”는 인도의 옛 경전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찾아내는 내면적, 사색적, 노마드를 보여준다





여로의 끝에 와서 다시 한 번 안개 자욱한 계곡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곳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수없이 많은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만 안개의 숲에서는 아무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차고 끈적끈적한 안개를 숨쉬며 기침을 할 때면 누우런 추억이 목에서 그르렁 거립니다.




기억을 더듬어야 짙은 안개를 헤쳐 가며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어느 해 오월에는 양들이 구름처럼 하늘에 떠갔습니다. 붉은 옷을 입은 승려들은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건조기의 저녁에는 마을의 지붕들 위에 고양이들이 연기처럼 떠 있었습니다. 그 계절에 검은 제복을 입은 군대가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여름밤 숲속 여인들의 떨리는 촛불 속에서 꽃들이 나오고 개들이 하나씩 먹었습니다. 그런 밤에는 돌맹이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에 투박하게 생긴 돌 하나를 집어 들고 왔습니다. 모반의 거리에서 받았던 상처와 그 고통에 대한 기억들이 憂愁와 迷夢의 숲을 빠져 나갈 수 있게 합니다.




분별할 수 없는 글들이 나무의 등에 나타났다가 무성한 잎들과 함께 사라지곤 합니다. 나무들이 흘린 눈물로 나의 등이 젖습니다. 작은 풀들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보며 폐가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생각하고 탄식합니다. 기억들 속에서 암호를 찾아내야 하고 그 암호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영주의 <歸路>전문 -



4편의 시를 상재한 기영주의 시는 숙명적인 노마드의 존재성을 확인케 하는 시편들로 짜여져 있다. 다시 말하면, 시 속에 드러나는 언표처럼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 곳에 발붙이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그린 그림들” 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이 한 생애를 지나는 궤적을 삶이라 할 때, 개개인의 삶에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은 세계, 혹은 시대가 관통해온 역사의 흐름일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눈물과 피로 점철된 냉전과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지나왔다. 때문에 “강가를 서성이다가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과 쓸쓸한 바람이 부는 그림만 그”리는 화가의 그림은 그저 평범할 뿐인지만, 어디서도 안주 할 수 없는 슬픔의 기원을 드러낸다.  지리적 거리와는 상관없는 憂愁와 迷夢의 숲을  그려낸 화자는  "뜨거운 수액이 올라오고/ 송화가 다시 피네 /또 한 해를 견디네"라고 고백한다.  길고긴 유랑생활을 끝내 귀가하는 여정의 끝을 사시하는 풍상의 모습이다. 마침내, “기억들 속에서 암호를 찾아내” 집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는 것은 노마드의 궁극적 모습이며, 피안의 집을 향해 길을 떠나는  존재의 근원적 본질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민 생활이라는  특수한 정황 속에서도 미주시인들은 시대와 역사를 관통해온 노마드의 숙명적 존재와 시공간의 편차를 극복하는 양태를 보여준다. 현실의 벽을 넘어 일상을 관조하거나 자기 구원을 바라는 존재로서 자신의 존재가치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목적성에 도달한다. 또한  시 자체에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시가 지닌 자체부력으로 세계를 재현하는 목적성에도 부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한편의 시에 던져진 율격이나 압운(押韻)이나 비유적 언어나 의미의 그밖의 것들이 형성하는 기계적 관계가 아니라 정서적 울림을 지닌 가장 친근하고 근본적인 관계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을 맺은 시들이 언어의 미적 구축물로서 얼마나 가치를 갖느냐 하는 것은 시인 각자의 몫일 것이다.  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미주시인들의 시를 읽는 동안 그들의 삶을 함께 읽는다. 먼 타국에서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절차탁마해나가는 그들의 시적 행보에 경의를 표한다.



계건 『창작 21』 2010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