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라고 외친 햄릿의 고민은 펜을 들고 백지 앞에 앉은 시인의 고민이기도 하다. 시를 써야겠다는 그 순간부터 시인은 햄릿처럼 고민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성자와 창녀 사이에서, 수다와 침묵 사이에서, 욕망과 해탈 사이에서, 감성과 지성 사이에서, 내용과 형식 사이에서, 관조와 참여 사이에서,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시인은 정처 없이 흔들리면서 고민하는 자다.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갈등하는 사람, 그가 시인이다. 〈창작은 자기와의 끝없는 고투〉 〈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라〉 시를 가슴으로 쓸 것인가, 손끝으로 쓸 것인가? 습작기에 이런 주제를 두고 누구나 한번쯤 입씨름을 해봤을 것이다. 사소하지만 쉽게 해답을 찾기 어려운 화두 중의 하나다. 작품의 진정성(가슴)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표현기술(손끝)에 심혈을 기울일 것인가? 굳이 나누자면 나는 손끝의 문학을 먼저 배운 축에 속한다. 시에 처음 눈을 뜬 고등학교 시절이 그랬다. 나는 시를 ‘쓰는’ 소년이 아니라 ‘만드는’ 소년이었다. 어쩌다 새로이 하나의 단어와 문장을 만나면 그것들이 주는 울림 때문에 몇 날 며칠 아팠다. 어떤 단어는 환각제 같았고, 어떤 문장은 하느님 같았다. 그것들은 나를 꽁꽁 묶어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했고, 목마르게 했고, 그러다가 어느 때는 또 하염없이 나를 해방시켰다. ‘측백나무’라는 말을 만나면 나는 측백나무의 모양과 빛깔과 향기에 취해 다른 나무들을 볼 수가 없었다. ‘이마’라는 말도 그 무렵 나를 사로잡은 말 중의 하나다. 어느 날 이 말이 나를 강타했다. 이마는 ‘얼굴의 눈썹 위로부터 머리털이 난 아래까지의 부분’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훨씬 뛰어넘어 나를 설레게 했다. 이마는 때로 ‘밝다’라는 형용사의 변형된 명사형이었고, 햇빛이 비치는 아침의 연못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찰랑이는 머리카락이었다. 언어가 아니라 마치 무슨 환상의 기호 같았다. 나는 말에 사로잡혀 말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말의 감옥 속에서 행복했으므로 거기를 벗어나기 싫었다. 나는 말이 지시하는 대로 손끝으로 또닥또닥 시를 만들 뿐이었다. 1980년, 스무 살이 된 나에게 세상은 손끝으로 시를 만드는 일을 회의하게 만들었다. 대학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다. “가슴으로 쓴 시가 진짜 시다.” 시를 합평하는 자리에서도 술집에서도 나는 그 말을 들었다. 선배들은 또 이런 말도 했다. “시를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를 살아야 해.” 아아, 시를 쓰지도 못하는데 시를 살아야 한다니! 손끝으로 시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난처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삶과 시의 일치를 강조하던 그 시기에 나는 선배들의 조언이 문학적 허영의 표현에 불과하다면서 슬쩍 대들어보기도 했다. 그런 나를 향해 선배들은 일침을 가했다. “자네 시는 뒷심이 약해!” 이때 들은 ‘뒷심’이라는 말 때문에 나는 거의 1년 동안 뒷심이 강한 시란 뭘까, 하고 혼자 고민을 거듭했다. 나를 고민 속으로 몰아넣은 그 선배는 심각한 얼굴로 이런 말도 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어제 다 읽었는데 말이야, 삶의 고통이 뭔지, 죽음이 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그리하여 나는 서서히 문학의 무거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늘 손에 들고 있던 박목월과 서정주와 김춘수와 정현종 시집을 내려놓고 선배들이 권하는 역사와 사회과학 책들을 집어 들었다. 시집으로는 고은과 신경림과 김지하와 이시영의 이름이 든 것을 탐했다. 그리고 시학 강의실에 일찌감치 와 앉아 있던 보들레르와 바슐라르 같은 서양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아졌다. 꼭 그런 것도 아닌데 왠지 그렇게 해야만 시를 가슴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 황석영이 한 인터뷰 자리에서 자신은 “소설을 엉덩이로 쓴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것은 작가가 소설에 투여하는 집중적인 시간과 인내의 중요성을 말한 것일 터이다. 어찌 소설뿐이랴. 시를 쓰려거든 당신은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쓰고, 엉덩이로도 쓴다고 생각하라. 가슴으로는 붉고 뜨거운 정신을 찾고, 손끝으로는 푸르고 차가운 언어를 매만질 것이며, 엉덩이를 묵직하게 방바닥에 붙이고 시에 몰두하라. 〈손끝으로 또닥또닥 쓰던 내게 “가슴으로 쓴 시가 진짜 시다”〉 감성을 앞세워 쓸 것인지, 지성을 바탕으로 쓸 것인지도 고민하지 마라. 김춘수는 “일상 속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느끼느냐 하는 능력”을 감성이라 하고, “비교하고 대조하는 작용”을 지성이라 한다면, 그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면 안 된다고 하였다. 당신은 감성이 녹슬지 않게 신체의 감각기관을 항상 활짝 열어두고, 지성이 바닥나지 않게 책읽기를 밥 먹듯이 하라. 그리하여 시를 쓸 때는 감성과 지성이 비빔밥이 되도록 골고루 비벼라. 시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고민도 끝까지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어느 글에서 문장을 배우는 사람은 먼저 형식을 배우라고 권한다. “문장을 배우는 사람은 옛사람의 글을 대할 때 가장 먼저 형식을 만나고, 다음으로 그 내용을 만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 내용을 통해 형식을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문장의 형식을 만나 배우지도 않고서 어떻게 그 내용을 취하고 형식을 버리는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문학사에서 시 쓰는 자가 취해야 할 태도를 가장 통쾌하게 정리한 시인은 김수영이다. 저 유명한 ‘온몸의 시학’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직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말은 시가 무엇인지 규정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김수영식 비판이다. 그는 시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데서 새로운 시가 탄생한다고 믿었다. 시인이란 끊임없이 이탈하는 자임을 스스로 보여줌으로써 그 어느 문법에도 갇히지 않는 변화와 갱신의 의지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작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말을 통해 김수영은 시인의 창작행위가 어떠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역설한다. 시를 쓰는 시인 자신이 창조의 주체임을 깨닫고 철저히 인식의 전복을 꾀하는 일이 ‘온몸의 이행’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신과 육체를 모두 대지와 신께 바치는 오체투지의 자세와 다를 바 없다. 시를 창작하는 일은 온몸으로 하는 반성의 과정이며, 현재진행형의 사랑이며 고투이기에 김수영의 말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이칭(艾靑)도 시인에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끝없이 긴장할 것을 주문한다. “예술과 생활이 통일과 조화를 얻도록 노력하기 위하여, 시인들은 항상 현실과 이상의 중간에 자신을 던져 놓아, 마치 물 따라 나아가는 배가 그에 거슬러 거꾸로 부는 바람의 시련에 저항하듯, 자신의 생명을 불안정과 흔들림 속에서 나아가게 한다.” 정현종이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사물의 꿈·1〉)고 노래할 때의 그 나무가 바로 시인이다. 그렇게 흔들리는 기쁨을 소설가 박범신은 이렇게 표현했다. “문학, 목매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라고.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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