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연애’
김 행 숙 (시인)
한밤을 내내도록 머리맡 지붕 위에서 퍼득이며 보채어 우는 안타까운 울음소리에 나도 전전히 잠 한잠 못 이루고, 날이 밝아 일어나자 창을 열고 내다보니, 지붕 위 공중 기ㅅ대 끝 햇빛에, 어제 저녁 내리우기를 잊은, 울다 지친 아이처럼 까부러져 걸려 있는 물질 아닌 심상 하나
―― 유치환, 「심상心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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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가 문학적인 사건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던 때로 거슬러가 보면, 신청년들이 열렬하고 심각하게 ‘자유연애’를 부르짖는 풍경과 만나게 된다. 1910년대 말 1920년대 초는 “예술이냐? 연애냐?”(염상섭, 「암야暗夜」)라는 외침이 터져나오던 때였다. 한편에선 모든 소설과 시가 연애소설 연애시가 되어버렸다는 냉소도 있었지만, 이 냉소를 오히려 속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었을 만큼 연애는 고상하고 고귀하게 칭송되었다. 김동인은 당대 소설의 주조主潮를 “사랑 없는 결혼은 제로”라는 표현으로 요약하기도 했고, 《백조》 동인들은 명월관이나 국일관 같은 요정 출입을 ‘순례’라는 낭만적인 용어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 연애는 일종의 시대적인 유행이었으며, 전근대적인 사회를 향해 던지는 문제 제기의 형식이었고, 예술적인 초월의 계기로 고양되기도 했다. 그때의 연애는 자연스러운 사건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인 선택에 가까웠다. 즉, 연애는 전근대적인 관습에 따르지 않고 근대적인 삶의 형식을 선택한다는 의지의 표명일 수 있었다. 따라서 연애로 인한 고민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진지하고 엄숙한 것이 될 수 있었다.
비극적인 연애는 그 비극성으로 인하여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찬양되었다. 이광수가 「문학文學이란 하何오」에서 흥미를 주는 문학의 재료로 부모의 허락을 받을 수 없는 불행에 빠진 젊은이들의 연애를 꼽을 수 있었던 것은, 자아의 의지와 연애의 진실성을 그 불행한 조건이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청년들에게 연애는 순수하고 열렬한 감정이 가장 잘 표출되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비극적인 연애는, 오상순의 수사를 빌자면, “모든 사상思想과 억제抑制를 홍모鴻毛보다 경輕하게 충파衝破”하는 자아의 힘과 자발성을 드러내주는 계기였다. 여기서 이들은 “인생의 숭고한 미美”를 발견하였다.
당시에 문학 작품은 연애의 참고서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 한편에는 연애를 예술의 계기로 고양시키고자 한 문학청년들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에게 현실의 애인은 문학적인 발단에 불과했고, 이상적인 애인은 문학적인 피조물, ‘작품’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연애가 예술의 계기로 고양됨과 더불어 ‘낭만적인 사랑’은 근대의 아름다운 신화로 더욱 뿌리깊게 자리잡는다. 즉, 연애는 예술의 계기로서, 예술은 사랑의 교본으로서 서로에게 상승 효과를 발휘해 왔다. 이렇게 연애는 문학적인 감수성 깊숙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테리 이글턴의 말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낭만주의 시대의 뒤를 잇는 후예들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낭만주의 시대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 이후 사람들(post- Romanti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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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는 『한국 현대시 형태론』(1954)이라는 책에서 서정주와 유치환을 서구 낭만주의의 핵심에 도달한 시인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폐허》·《백조》에 있어서는 ‘분위기’뿐이었던 낭만주의가 이 두 시인에 의해 ‘정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경우의 ‘정신’은 ‘목숨’과 동의어로 쓰이는데, 생의 철학으로 표출된 니체적 낭만주의로서 유치환의 『청마시초』와 서정주의 『화사집』은 한국시사에서 서정의 깊이를 비쳐준 이면경二面鏡으로 기려지고 있다.
또 다른 맥락에서, 청마 유치환이 남긴 숱한 연애편지와 연시들도 낭만주의적인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아 씌어졌다. “마리아를 통해서 천주에게 이르듯이 내게 있어 이성은 고독한 밤 항해에 아득히 빛나는 등대불, 채울 수 없는 허망을 비치는 구원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구름에 그린다』, 1959)는 유치환의 고백은 ‘낭만적 동경’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낭만적 동경은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이란 이미지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청마의 너무나도 유명한 시 「기빨」, 그것은 그의 표현대로, “물질 아닌 심상 하나”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표ㅅ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그는 ‘깃발’처럼 그리워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깃발’이 나부끼듯이 그는 편지를 썼고 시를 썼다. 그의 두 편의 시, 「그리움」을 보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고 부르짖기도 하고,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즉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기빨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하고 방황하기도 한다. 정말로 그대는 뭍처럼 까딱하지도 않는 것일까? 정말로 그대가 꽃같이 숨어버린 것일까? 어쩌면 그가 그대를 뭍으로 호명한 것이며, 꽃처럼 숨긴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파도처럼 울부짖고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다. 이것이 그가 선택한 사랑의 방식이며 사랑의 ‘문학적’ 양태였다. 그는 스스로 깃대에 묶여 있었다. 깃대에 묶이지 않은 깃발은 백로처럼 날개를 펼 수 없으므로.
그는 잘 알려져 있듯이 엄청난 양의 연애편지를 남겼다. 청마는 습작시절 훗날 그의 부인이 될 한 소녀(권재순)에게 시를 쓰듯 열심히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1967년 교통사고로 홀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20여 년간 한 여인(이영도)에게 사과상자 세 상자를 채울 만큼의 편지를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청마 사후에 그의 편지는 한 권의 책,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로 묶여 세상에 개봉되기도 했다. 청마의 열성적인 편지를 받은 또 다른 여인(반희정)도 있다. 그녀도 청마 사후에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이 수많은 편지들은 청마와 그의 연인들을 깃대에 매달린 깃발 같은 존재로 떠올리게 한다. 때론 잔잔하게 또 때로는 찢어질 듯 강렬하게 펄럭이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들. 편지는 ‘떨어져 있음’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다. ‘먼’ 사랑을 편지는 보조한다.
그러므로 청마는 「우편국에서」란 시에서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고 노래하기도 했다. ‘행복론’도 우체국 풍경으로부터 펼쳐진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 전문
「일월」, 「생명의 서」, 「바위」 등과 함께 청마의 시는 도드라지게 남성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점에서 한국시사에서 희귀한 예를 이룬다. 반면에, 흔히 청마의 연시는 그의 서정시인으로서의 감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와 대조적으로 혹은 갈등관계로 얘기되곤 했다. 실상 청마의 연시는 대중적으로 애송되긴 했지만 문학사적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위에 인용한 시는 숱한 연애편지에 인용되었을 것이다. 청마의 시인 줄은 모르지만, 이 시를 기억하는 이들도 꽤 많을 것이다. 청마가 읽히던 시대에도 문학작품은 연애의 참고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연애는 문학적인 향기를 뿜을 수도 있었으며 예술적인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운!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여성임이 얼마나 귀합니까. 생각하고 이해함이 여성의 덕에다 진정 아름다운 빛을 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와 같은 찬사는, “오늘도 나는 지극한 당신의 애정 앞에 나의 진실성을 따져 봅니다. 만에 하나라도 내게 당신의 슬프고 외로운 참된 애정을 받음에 한 점의 허위가 있다면 나는 마땅히 인간이 아니므로 죽어야 옳을 것입니다”와 같은 자기반성과 향상 의지로 연결되고, “내게로 밀려오는 당신의 밀물 같은 벅찬 애정을 나는 이렇게도 어찌할 도리 없이 공수拱手의 무능으로 답하고 있다니―생각할수록 슬픔과 그리움이 가슴을 후비듯 죄어듭니다. 이제 ‘운명運命’에 대하여 글을 하나 쓰렵니다”와 같은 예술적인 열정과 보답으로 이어진다.(『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생명의 서」와 「깃발」은, 혹은 「바위」와 「그리움」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동류의 힘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청마에게 사랑은 슈퍼 에고(Super-ego)에 견인되어 있다.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며, 환멸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이나 자학으로 빠진다.
‘낭만적인 사랑’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작동하긴 하지만, 20세기초에 시대적인 비전과 연결되었던 에너지는 끊어져 버렸다. ‘낭만적인 사랑’은 여전히 하나의 매혹이고 흥미롭지만 이미 진부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청마는 그 매혹을 너무나도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실천하여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지극히 고전적인 멜로가 되었다. 종종 ‘신화’와 ‘소문’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떤 이에게 청마의 사랑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은 이제 정말 ‘노스탤지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누군가는 ‘노스탤지어’의 힘과 믿음으로 펄럭이고, 또 누군가는 그로부터 힘겹게 혹은 쿨하게 탈주할 것이다. 또는 나는 다른 종족이며 내 사랑의 기원은 다른 데 있다고 엇갈리는 손가락을 뻗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듯이 같은 사랑도 없을 테지만, 더욱이 우리는 사랑의 감수성 혹은 연애의 감수성이 급격히 재편성되는 때에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있다. 근대적인 신화들의 운명이 대개 그러하듯이.
김행숙 시인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어교육과 및 같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9년『현대문학』에 「뿔」 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현재 고려대와 상명대에 출강하고 있다. 시집으로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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