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감동적인 사랑 詩를 찾아서

아리박 2012. 2. 15. 15:11

감동적인 사랑 詩를 찾아서 /이승하



1
세계 시문학사는 어찌 보면 연애시의 역사이다. 동서의 어디를 보아도 연애시가 씌어지지 않았던 나라가 없었고, 고금의 어디를 보아도 연애시가 씌어지지 않았던 시대가 없었다. 2600년 전 희랍의 서정시인 사포의 작품은 거의 전부가 염정가(艶情歌)이다. 이성에 대한 광적인 사랑이 초래한 질투와 배신과 증오가 그녀 시의 주된 테마였다. 기원전 11세기부터 500년 동안 중국 각지에서 불려진 민요를 모은 『詩經』을 봐도 태반이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이다. 사랑이 주는 달콤한 맛을 감미롭게 노래한 남성 화자의 시 <靜女>와 어떤 난관이 닥쳐도 사랑을 성취하겠다는 당찬 여성 화자의 시 <東方之日>은 그 옛날 중국인의 연애감정이나 오늘 우리의 연애감정이나 별 차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워즈워드, 바이런, 마야코프스키, 네루다, 김소월, 서정주……. 위대한 시인은 모두 주옥 같은 연애시를 남겼다.
우리 나라의 경우 최초의 서정시 <황조가>는 실연의 비애를, 고조선 시대의 <공무도하가>는 님을 잃은 슬픔을 담은 시이다. 유리왕이나 백수광부의 처나 잃어버린 사랑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했기에 시를 남겼다. 조선조 초기 성리학자들에게 남녀상열지사라고 욕을 먹은 고려가요와 조선의 명기 황진이의 시조는 이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노래함으로써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가 되었다. 사랑이야말로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일진대 어느 시인인들 연애시를 쓰고 싶지 않을 것인가. 특히 이른바 ‘베스트셀러’ 시집은 연애시 일색이다. 시인이 읊조리는 사랑노래에 아직은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수십 판을 찍는 시집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지금 우리 시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정통문학권(혹은 순수문학권?) 시인들의 시를 몇 편 읽어보며 이 땅에 그려지는 사랑의 풍속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2
사랑은
눈 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 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그대의 별이 되어> 부분

연애시의 대종은 뭐니뭐니 해도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솔직히 토로하는 것이다. 허영자는 사랑이야말로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Love is blind.”라는 서양의 명언에서 시작하는 이 시를 통해 시인은 이기적인 사랑과 이타적인 사랑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이기적인 사랑은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하겠지만 이타적인 사랑은 그렇지 않다고, 남을 배려하는 사랑을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려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한다. 하염없이 기다리고 한없이 베푸는 고전적인 사랑법을 두고 시대에 맞지 않는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욕할 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꿈꾸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영원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겠는가. 사랑은 또한 동물에 불과한 인간을 사고하는 인간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幸福>)는 유치환의 시구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 그 자체에서 환희와 보람을 느끼는 플라토닉 러브에 대한 예찬을 허영자 시인은 이 시에서 하고 있다. 이성에 대한 정신적인 사랑은 충분히 ‘별이 되는 일’이지만 이런 사랑은 사실 실체가 확연히 잡히지가 않는다. 그래서 감동이 약화될 수 있는데, 허영자의 다른 시를 보자.

가만히/바라보리라//原始의 숲에 타는/野性의 불길//황홀히/너를 사를 때까지//새까만 숯으로/태울 때까지.(<熱慕>에서)
잠들 줄 모르는 그리움/출렁이는 관능이여/네 영혼과/육신의/끝없는 갈증이/마침내/천 길 벼랑에 이마를 짓찧고/희디흰 포말로 부서지는/마조히즘의 결정이여.(<파도> 전문)
이 세상 끝끝머리/그 어디메쯤서/흔들리고 있다 해도/장님처럼 나는 더듬어 갈 수 있으리니/蜜蠟의 살갗에 물결이 이는/내 觸角이 아는 비밀(<그대>에서)

이런 시편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러브 신은 별이 되는 막연한 그리움과는 다르다. 가슴에 담아둔 사랑도 사랑이지만 내 몸으로 확인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실현 불가능한 음란한 사랑을 꿈꾸며 너를 사르고 싶어했지만 정작 타오른 것은 화자의 몸이었다(<熱慕>). 이 세상에는 학대받기를 원하는 이상 성욕도 분명히 있으며(<파도>), 살갗에 가 닿은 나의 촉각으로 기억하는 육욕적인 사랑도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실체가 아니겠냐고 시인은 역설한다. 그렇다, 사랑은 실천하는 것이다.

비 온 뒤에 무지개 서고
사랑하는 일
죄도 서러움도 안 되는 땅

정다운 어루만짐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금빛 찬란한
열매를 맺는
위대한 어머니가 되고 싶다.
―<따뜻한 땅> 부분

죄도 서러움도 되지 않는 사랑이란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라 혈육간의 사랑이다. 모성을 실천할 꿈을 꾸는 것도 사랑을 전제로 한 것임에 틀림없다. 잉태의 과정이야 어떠했든 ‘따뜻한 땅’인 모태에서 자라난 생명이 바깥세상으로 나오기만 하면 정다운 어루만짐과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키우겠다고 결심하는 것, 바로 사랑의 창조가 아니고 무엇이랴. 허영자는 이처럼 사랑이란 수많은 색깔을 갖고 있는 일종의 스펙트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일근은 『처용의 도시』와 『경주 남산』에서 천상의 사랑, 혹은 천년의 사랑을 노래하였다. 사랑이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고 그는 역설하였다. 믿어지지 않는 사랑, 그러나 시인이기에 응당 꿈꾸어 보아야 할 사랑. 현실에서도 사랑은 얼마든지 국경과 인종과 연령을 초월하게 하지 않는가.

여름에는 가뭄이 겨울에는 장마가 계속됐다
마침내 나라의 모든 슬픔의 우물 말라
한 남자의 죽음이 한 여자를 거둘 때
감은사 쌍탑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았다
삶과 죽음이 한 몸이 되는 것을 보았다
―<감은사지 8> 부분

경주 남산 머리 위로 보름달이 뜨는 저녁
사랑, 그 아름다운 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우리 약속을 보라
우주의 모래알 같은 작은 지구에서
육계육천 우주를 환히 비추는 우리 사랑을 보라
―<사랑의 약속> 부분

오십육억 칠천만 년, 멀고 먼 윤회의 바다 다 건너가서라도 그리운 그대가 내 이름 부른다면 사랑의 원을 그리며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아름다운 약속, 어느 별 어느 하늘에서 그대가 내 이름 부른다면 불타는 혜성이 되어 돌아오는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 아름다운> 부분

감은사 쌍탑이 그렇듯이 삶과 죽음이 한 몸이 되는 사랑이나 육계육천 우주를 환히 비추는 사랑, 그리고 오십육억 칠천만 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 이루는 사랑도 시인이 다루기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리라.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니까. 하지만 ‘사랑’이라는 추상명사가 너무나 먼 공간과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떠다니고 있어 도무지 현실감이 와 닿지 않는 것을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 누가 누구를, 어디가 좋아서, 어떤 과정을 거쳐 사랑했는지 그 중요한 이야기가 다 생략되어 있어 고개를 자꾸만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과 조부님이 했던 ‘사랑의 기교’를 시인은 <흑백 사진> 연작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런 시가 한결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마루 끝에 걸터앉은 아버지는 말이 없다. 저녁햇살에 길어진 감나무 그림자가 그 곁에 눕고 댓돌 위에는 가을하늘처럼 맑은 옥색 고무신 한 켤레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어머니 낮은 목소리 사이 가끔씩 낯선 울음소리가 흘러나와 안방 문풍지를 적시고 툭툭 할머니의 타이르는 소리 무겁게 새어나왔다.(…) 아버지는 돌아앉아 말이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도 견고한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흑백 사진―그 여자> 부분

무슨 사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시적 화자의 아버지는 바람을 피워 옥색 고무신을 신은 ‘그 여자’를 집에까지 데려온 것이리라. 아버지는 그 여자와의 사랑을 원했지만 할머니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고, 결국 아버지는 그 여자를 단념하기로 마음먹는다. 나 자신의 체험일 수도 있고 이웃집 친구네 집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아버지 세대의 러브 스토리가 참으로 잔잔히 전개되어 감동을 주는 시이다. 이 시의 마지막 문장에는 아버지의 이루어지지 못한 로맨스에 대한 아들의 안타까움까지 배어 있다.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의 이야기를 펼쳐놓은 <흑백 사진―가물치>는 또 어떠한가.

가물치 한 마리 짚으로 꿰어들고 경남 양산군 하북면 삼감리로 걸어가는 키 큰 고모부 모습 나도 보이네. 산후조리하고 있던 할머니의 민망한 마음 보이네. (…) 금줄 친 사립문 밖에서 백년손님 맏사위 멋쩍게 맞으며 신라 와당의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듣네. 아직도 살아 푸드덕거리는 가물치 소리 생생히 들려오네.
―<흑백 사진―가물치> 부분

이 시에는 느낄 수 있는 사랑은 일가붙이 사이의 사랑, 즉 시로써 다루기가 결코 쉽지 않은 사랑이다. 시적 화자의 고무부가, 출산을 한 장모한테 축하를 해주러 가물치를 사 들고 갔으니 이 아니 쑥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다들 웃고 있다. 고모부는 선한 눈가 웃음을 웃고, 할머니는 민망한 얼굴로 미소짓고, 할아버지는 신라 와당의 얼굴로 크게 웃는다. 독자도 씩, 웃게 된다. 이 세 사람 사이의 사랑은 세상 그 무엇보다 고결한 것이라 독자는 감동의 물살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초스피드의 이 시대에, 쉽게 부딪치고 크게 상처받는 사랑법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나는 앞선 세대 사람들이 했던 이런 식의 사랑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흑백 사진 속에 숨어 있는 그들의 사랑법을 공개한 시인의 기억력에도 박수를 보낸다. “운명의 목덜미를 잡아 흔들어 달아나기에는 늦은, 반음 늦은 60년대의 사랑법”(<흑백 사진―배호>)이 나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 어찌 필자의 나이 때문이랴. 누구나 하는 첫사랑, 인간의 보편적인 그 사랑의 체험을 진솔하게 그려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정일근의 연애시는 고색창연하다. 신라를 무대로 한 연애시는 형이상학적이면서 추상적이고, <흑백 사진> 연작은 유년기의 추억을 더듬고 있어 회고적이면서 구체적이다.
정일근의 연애시와 극단적으로 다른 시가 김신용의 연애시일 것이다. 천상의 연애시가 아니라 공사장과 선술집과 창녀촌의 연애시이며, 천년의 연애시가 아니라 그날 벌어 그날 먹는 하루살이들의 노래이다. 하염없이 기다리고 한없이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살과 살의, 성기와 성기의 사랑이다. 김신용이 그린 사랑은 형이하학적인 사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외시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발가벗어야 한다.
저기 시멘트의 벌판, 불모의 땅이 보이지. 네 풀씨의 넋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모든 버려진 것을 사랑해야 한다. 남들이 먹고 걷어차 버린 깡통처럼
쭈그러진 여인의 성기까지.
―<어둠에 대하여> 부분

이 시의 제1연은 “그때 그가 나타났어, 마치 幻影처럼”이다. 화자는 대합실 구석에서 걸레처럼 구겨 박혀 굶주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가 나타나, “쓰레기통을 뒤져”, “밥 찌꺼기 앙상한 생선 뼈다귀를 내밀며”, 말한다. 그는 역을 제집인 양, 대합실을 안방인 양 여기고 살아가는 거지이다. 위에 인용한 부분이 그가 말한 내용이다. 거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 심오했는지 화자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먹은 것을 다 토하고 만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거지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배운다. “모든 버려진 것들”과 “남들이 먹고 걷어차 버린 깡통”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하여 시인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해주어야 하며, 그들을 사랑해주어야 한다고 독자에게 말한다. 김신용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가난했기 때문에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몸으로 벌어먹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용직 노동자, 창녀, 부랑자, 전과자들, 이른바 양아치들(넝마주이를 속되게 표현한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밑바닥 인생을 통칭해서 쓰고 있다)이다. 배운 사람의 눈에 그들은 무식한 놈들이고 가진 사람의 눈에 그들은 거지이지만 사랑도 하지 못하게 저주받은 생은 아니다.

그녀는 왜 마약중독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어도
새벽털이를 위해 숨어 있는 게 분명했어. 난 눈 부릅떴지.
그리고 등불을 켜듯, 그녀의 몸에
내 몸을 심었네. 사방 막힌 벽에 기대서서, 추위 때문일까
살은 굳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었지만
솜털 한오라기 철조망처럼 아팠지만
내 뻥 뚫린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머리 위
작은 창에는, 거미줄에 죽은 날벌레가 흔들리고 있었어. 그 밤.
―<공중변소 속에서> 부분

이런 사랑도 가능한 것이리라. 화자는 공중변소 속에서 만난 마약중독자 여인의 몸에 자신의 몸을 ‘심는다’. 더러운 두 몸의 더러운 엮어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이어지는 다음 시행 덕분이다.

내 몸에서 풍기던,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악취는
그 밀폐의 공간 속에 고인 악취는 얼마나 포근했던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네. 마약처럼

욕정을 이기지 못해 이루어진, 성기와 성기의 만남이라고 하여 이런 사랑을 비난할 이유를 나는 찾아낼 수 없다. 갈 데가 없는, 기댈 곳이 없는 두 사람이 이렇게 ‘포근하게’ 체온을 나눈 그 밤의 사랑도 분명 사랑인 것이다. 김신용은 하층민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수건을 입에 물고 섹스폰을 불면
소매치기 벙어리 여인은 노래를 불렀지
문둥이 미쓰 리는 몽그라진 손으로 젓가락을 두드리고
돗자리 부대 남희 엄마 넘치도록 막걸리를 따뤘지
…(중략)…
속치마 바람으로, 자고 가요. 제발
자고 가요. 지나가는 남자만 보면 술 취해 미친 듯
손 흔드는 남희 엄마 기어이 부녀보호소로 끌려가고
벙어리 여인 신음 하나 행적 없이 사라져가고
미쓰 리 또한 소록도를 향해 풍문으로 떠나갔지만
―<수건 섹스폰> 부분

시인이 시방 몹시 그리워하고 있는 세 여인은 굴곡이 많이 진 생애를 살다 간 사람이다. 특히 돗자리 부대 남희 엄마는 몸으로 벌어먹고 살았던 사람이다. ‘돗자리 부대’란 아마도 돗자리를 들고 다니며 들판과 산에서 몸을 파는, 옛날로 치면 들병이 같은 여자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남희 엄마는 결국 부녀보호소로 끌려가고 벙어리 여인은 행적도 없이 사라진다. 미스 리는 소록도로 갔다는 풍문을 듣는다. 노래를 부르고 젓가락을 두드리고 막걸리를 따르는 세 여인과 더불어 수건을 입에 물고 색스혼 부는 흉내를 내며 놀았던 그 어느 날 밤을 시인은 ‘사모치게’ 그리워한다. 마지막 행 “사모치게 수건 섹스폰이 불고 싶은 날”은 그들 밑바닥 인생들을 시인 자신이 얼마나 연민하고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한 뼈아픈 고백이다. “못났으므로/살아 있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 같은 것……”이라는 시구에는 김신용의 몸으로 익힌 인생철학이 담겨 있다. 그의 시는 나로 하여금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아름다운 여인,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이별……. 동서고금의 시인들이 갖고 있던 사랑에 대한 개념을 깨뜨리며 김신용은 이처럼 ‘처절한’ 사랑을 아름답다고 노래하였다. 그의 시에서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실체이다.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정신이 아니라 육체이다.

3
오늘 우리 시단이 봉착해 있는 크나큰 문제점의 하나는 독자와 시인과의 괴리현상이다. 평론가가 격찬을 했다고 해서, 문예지 여러 곳에 서평이 실렸다고 해서, 신문지상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고 해서, 유명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고 해서,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그 시집이 많이 판매되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다수의 독자가 즐겨 읽는 시집은 따로 있다. 류시화, 용혜원, 원태연, 이정하, 이해인 같은 이가 낸 시집은 모두 수십 판씩을 찍은 ‘베스트셀러’이다. 그들이 낸 시집 가운데 대표적인 한두 권만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아니라 간행하는 족족, 즉 근 10년의 세월(혹은 그 이상)을 두고 지속적으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것도 공통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집에 대해 문학권에서의 평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필자가 졸고 <방랑하는 명상가 혹은 신비주의자>(『작가세계』, 1999. 가을)에서 류시화의 시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위에 나열한 다섯 시인을 비롯하여 베스트셀러 시인군에 속하는 시인의 작품을 다룬 평문을 아직은 보지 못하였다.
오늘날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세계사, 창작과비평사 등 유명 출판사의 시집 판매고는 IMF 사태 이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있다고 한다. 시의 질적 저하를 문제삼는 평론가가 있기는 하지만 질적 저하가 주된 이유인 것 같지는 않고, 시의 문화적 역할 영역이 축소된 탓이 아닌가 싶다. 전에 이들 출판사의 시집을 사서 읽던 사람들이 요즈음은 인터넷 세상을 유영하고 있거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실용서를 읽고 있거나,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재미있는 영화 비디오를 빌려보고 있다. 즉, 시인 지망생이거나 시집을 즐겨 읽는 취미를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닌 한 시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다. ‘시집을 즐겨 읽는 취미를 갖고 사는 사람’은 대중 취향의 시집을 그때나 지금이나 읽고 있다. 시인이 여러 해 갖은 마음고생을 겪으며(출판사를 찾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펴낸 시집이 독자와 아름다운 만남을 이룩하지 못하고 시인이 아는 몇몇 주변 사람, 특히 동료 시인들이나 읽어주는 동인지가 되고 있는 이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은 베스트셀러 시집과 좋은 시집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언젠가 베스트셀러 시집들을 싸잡아 다음과 같이 공박한 바 있다.

첫 번째 특징은 두말할 것 없이 사랑의 시, 그리움의 시, 우정의 시라는 점이다. 시집의 제목에, 시의 제목에, 그리고 편편의 시에 ‘사랑’이라는 명사는 무수히 등장한다. (…) 상업적 연시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과 이별, 우정과 진실의 노래는 이렇듯 유치하기 짝이 없다. 시적 수련의 흔적은 도무지 느낄 수 없는 대신 편마다 어설픈 감상이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유치함과 감상성이야말로 독자의 감정에 강력히 호소하는 힘을 발휘함으로써 이들 시집을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게 한다. (…) 상업적 연시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도 ‘사랑’과 ‘이별’일 것이다. 누구를 왜 사랑하게 되었고 어떻게 이별하게 되었는지 사건의 추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된 채 그저 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고 이별은 대단히 슬프다는 식의 통속적인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진실이니 꿈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관념화가 지나쳐 우리네 보편적 삶과는 철저히 유리되어 있는 것이다.
―<상업적 연시와 그 수용층의 문제>, 『현대시』, 1995. 4.

5년 전, 비탄에 사로잡혀 이런 말을 했었지만 유명 서점의 시집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면 나아진 것이 조금도 없다. 그때 내가 언급했던 시인들이 지금도 여전히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상업적인 전략에 입각해서 출간된다고 보여지는 이들 시집과는 달리 정통문학권 내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의 시집 속에서는 ‘연애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으며, 그 연애시의 값어치가 베스트셀러 시집 속 연애시의 값어치보다 못하지 않음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정된 지면으로 말미암아 나의 심금을 울린 연애시를 더 많이 소개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앞에서 언급한 세 시인의 연애시는 오늘날 이 땅에서 씌어지고 있는 연애시의 작은 예일 뿐이다. 대형서점에서 매긴 순위에 현혹되어 우리의 말초감각을 자극하고, 관념적인 사랑 타령으로 일관하는 베스트셀러 시집에 손을 뻗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사랑의 시, 시인의 고뇌를 동반한 사랑의 시에 지금부터라도 눈길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 시문학이란 것이 생존해 있게 하는 길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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