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2022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아 읽기

아리박 2022. 1. 8. 06:18

2022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아 읽기

아리산방

 

 

2022 강원일보 신춘문예

 

 

목다보

 

                                      송 하 담

 

아버지는 목수였다

 

팔뚝의 물관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나무는 해저를 걷던 뿌리를 생각했다 말 수 적은 아버지가 나무에 박히고 있었다

 

나무와 나는

 

수 많은 못질의 향방을 읽는다

 

콘크리트에 박히는 못의 환희를 떠올리면 불의 나라가 근처였다 쇠못은 고달픈 공성의 날들 당신의 여정을 기억한다 아버지 못은 나무 못 나무의 빈 곳을 나무로 채우는 일은 어린 내게 시시해 보였다뭉툭한 모서리가 버려진 나무들을 데려와 숲이 되었다 당신은 나무의 깊은 풍경으로 걸어 갔다 내 콧수염이 무성해질 때까지 숲도 그렇게 무성해졌다 누군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박하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 빈 곳은 신의 거처였고 나의 씨앗이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신을 옮기는 사람

 

나무는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당신에겐 노동은 어려운 말 그의 일은 산책처럼 낮은 곳의 이야기였다 숲과 숲 사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걷고 걸었다

 

신은 죽어 나무에 깃들고

 

아버지는 죽어 신이 되었다

 

나무가 햇살을 키우고

 

나는 매일 신의 술어를 읽는다

 

목어처럼 해저를 걷는다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엽록체에 대한 기억

                                         이경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을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갇히여 돌아설 수 없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있고

표정이라고는 창백한 빛뿐인 고요한 방이

암흑 속을 빠르게 날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분명 하루가 지난 거 같은데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

 
 

2022 경상일보 신춘문예

 

눈사람과 돌멩이의 한낮

                                  신춘희

 

 

눈사람 한쪽 눈이 삐뚤게 붙어 있다

돌멩이 하나 머금었다

 

지금 조금씩 녹고 있는데

눈두덩이가 시릴 만큼 너를 오래 붙잡고 싶어

미안하지만 나는 점점 온기를 갖고

안타깝지만 너는 점점 부피를 줄이고

한동안 우린 밀착된 결빙으로 중력을 버티지

눈송이들 모여 숨겨둔 방

이곳은 해의 꼬리가 닿지 않아 심장을 두기 좋지

두근대는 돌멩이가 감정이라면

겨울은 안전한 밀실이야

사람들은 그저 눈빛을 얹어주거나

손끝으로 훑어볼 뿐

녹아내려야 하는 운명엔 관심이 없지

내가 너를 지키는 방법은

구름을 불러 모으는 일

눈이 자꾸 짓물러지고 있어

눈 속에 갇힌 마음이 죄다 흘러내리고 있어

우리가 견뎌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처음 눈덩이 궁글렸을 때의 설렘 같은 거

아이들 모두 돌아간 뒤 입꼬리를 움직여본 거

별들이 싱싱해서 우리는 하나였던 거야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낮이야

돌멩이와 눈덩이가 분별되어야 하는 시간이야

마지막 냉기가 사라지면

너는 나를 놓아줄 테지

그때까지 나는 너의 공중이 될 거야

머리가 기울고 있어

몸에 금이 가고 있어

물의 장례가 시작되고 있어

 

,돌멩이 하나 그렁그렁 쏟아저 내린다

 

 

 

 

2022 광남일보 신춘문예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감

 

                                           이 정 임

 

잘방잘방

 

가을 강은 할 말이 참 많답니다

저렇게 눈부신 석양은 처음이라고 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도무지 닫혀 있던 입

흰 귓바퀴 꽃을 봅니다

안개 짙은 그 하얀 꽃을요

 

나는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한 바퀴 즐거운 나의 집, 두 바퀴 세 바퀴 현을 타 봅니다 눈 감고 오물오물 따라하는 어르신 핑 돌아 떨어지는 눈물 한낮의 요양원 창 밖으로 찔금 찍어 냅니다 사람들은 먼 나무 위에 앉아 졸고 가을 강은 나를 자꾸 떠밀고 갑니다 알 없는 안경 너머로 두 다리 유니폼의 건장한 날이 있습니다 서슬퍼런 기백이 있습니다 백지로 두고 떠나자고 적은 적이 있답니다 구절초 강아지풀 억새 어우러진 둔덕 제 모습에 반해 석양을 품은

 

비록 비위관脾胃管에 연명하지만 포르르 동박새 동백나무에 오르고 옛 기억 하나 둘 돌아 옵니다 참 맑은 하늘이 도리질 치다가 풀썩 잠이 들라 합니다 퐁당 물구나무를 서거나 물비늘을 따라 멀리멀리 헤엄쳐가기도 하는

 

가을 강은 심하게 몸살을 앓는 중입니다

 

소실점 잘방잘방 아스라이 붉은

 
 

 

2022 농민신문 신춘문예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강 영 선

 

시어른이 돌아 가시고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서

안부 전화가 왔다

 

노인정에 가기는 어정쩡한 젊은 노인에게 방을

내주어도 되냐고 동네 이장이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마당의 빈터는 앞집에서 농기구를 갖다 놓아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샘가 감나무에 감이 무겁게 열리자 옆집에서

곶감을 좀 보내 줄 테니 감을 따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빈 닭장에 닭을 키우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전기도 수도도 끊어 놓은 그 집에 물이 들어오고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에서 가장

밝은 집이 된 빈집

 

빈집의 주인은 빈집인데

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물어 온다

 

떼 내지 않은 나무 문패는 옛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 있어

하늘 번지수를 동사무소 가서 물어야 할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2022 동아일보 신춘문예

 

경유지에서

채 윤 희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삶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한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계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의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

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파랑은 고결함이었고 다른 대륙에 이르러 불온함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던 한 끝 열릴 때

, 아름다운 부채가 되기

열망은 그곳에서 끝난다

 

 

 
 

2022 무등일보 신춘문예

 

만유인력

양승수

 

한 알의 사과가 저문다

 

잘 여문 것 좇아 줄기와 가지 따라

억지로 삼키던 몇 모금의 물 따라

바쁘게 걸어온 길에서 폴짝 뛰어 오른다

느껴지지 않던 중력이 어느 순간 무거워져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날아오르는 것이다

떨어질 때가 된 사과는 서서히 붉어지는 것이고

떨어지고 난 사과가 여전히 싱싱한 것은

사라지지 않은 관성, 따르다 남은 습관 탓이다

사과의 단 맛은 그런 식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과를 가졌을까

하루에도 몇 개의 사과가 공중으로 날아오를까

저로부터 최대한 멀리 뻗어

그러나 고작 몇 발자국 사과를 배웅 나갔다가

휘어졌던 가지가 그 탄력으로

복원되는 궤적을 그리며 돌아온다

돌아오는 가지 하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걸음 제촉하는 신호등

가던 길 멈추고 고개 돌려 옆을 보았다면

중력이 늘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거나

받아들이거나

도로에는 각자 서로 다른 중력으로 달려온 것들

잠시 멈추어 서 있다

그러나 멈추었다는 것을 아는 자동차는 없다

아무도 시동을 끄지 않는다

떨어진 낙과의 단맛 같은 엔진소리

정지선에 닿기 전 이 곳은 공중이다

바람이 지나온 커브길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뻗어나간 잎맥의 갈림길 따라

빨아들인 햇빛 같은 후회

꽃 피었다가 졌던 시간 흘러가지 않고 멈춰

오래 서성이던 발자국이었다가

흘러갈 곳 없는 소리들 엉켜있던 것이라 한들

사과를 두고 무슨 오해라 할까

 
 
 
 
 

2022 부산일보 신춘문예

 

숲에 살롱

최은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 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예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방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아닌 것은 아니겠지요 비 오는 오후에도 어김 없이 이야기에 중독된 여자들이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감수분열하듯 옆에서 옆으로 다음 손님을 부르네요

 

여자는 거미 다리 같은 손가락으로 사뿐사뿐 머리카락을 잘라요 몸이 생기기 전부터 손가락만 있었던 것처럼 손은 여자를 떠나 가위를 들고 허공에서 춤을 춰요 원피스에서 요란하게 싸우고 있던 꽃무늬들이 살짝 얼굴을 빼자 잎사귀들이 떨어져요 떨어져서 허공으로 떠다니는 꽃들 차를 마시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요 알지 못해요 가위질 소리에 맞춰 간간이 웃음소리를 끼워 넣을 뿐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세요 붙여진 팻말에서 글자들이 살짝 떨어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서죠 비밀과 상처는 오늘은 괜찮고 내일은 거대해지다 모레면 잊고 글피엔 주저 않게 만드니까요 쉽게 묻는 게 좋을까요 쉽게 말하는 게 좋을까요 수다쟁이들이 수다스럽게 찻잔을 부딪치며 그런 건 관심 없다고 하네요

 
 
 
 
 
 

2022 세계일보 신춘문예

 

비 오는 날의 스페인

 

이산율리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 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은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 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밸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2022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김 종 태

 

뉴타운 소문을 태우고 마을버스가 들어왔다

 

미숫가루처럼 흙먼지만 내려놓고 폐교를 한 바퀴 돌더니

 

제비처럼 고샅길을 빠져 나갔다

 

언젠가부터 절개지 묵정밭엔 어린 의혹들이 심겨지기 시작했다 깨진 항아리 속에 갇혀 있던 뻐꾸기 소리에 둔덕 까마중 몇 복부인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귀고리를 흔든다 전과자인양 담장

안을 기웃거리던 햇살, 굴다리 밑으로 잠입하고 배 밭으로 달려간 그림자 하나가 이른 아침부터 풍선 불 듯 바람의 평수를 후후- 부풀린다

 

두부장수 확성기에 귀를 열던 도토리들 일제히 상수리나무를 버린다 선거벽보 어지럽게 붙어있는 축대 아래, 사방치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 오후가 오랜만에 찾아온 밀짚모자 주위로 몰려든다

 

뻥튀기 소리에 놀란 해바라기, 발밑에 검은 태양들은 투투둑- 파종하고 늦게 외출한 채송화는 발뒤꿈치를 높이 꺼내 분꽃의 망설임을 흔든다 태양이 시작되면 빨간 인주통이 열렸다 몇 평 봄이 처분되는 계약서 그 끝, 마을 경로당에선 코스모스와 금잔화가 형광빛 포스트잇처럼 끝도 없이 유예되고 있었다

 

이장 집 옆 모과나무가 늙은 귀띰이라도 들은 걸까 오래된 우물 속에다 노란 주먹을 툭툭 박았다 내가 헐값에 처분했던 그 시절 변두리 네온사인과 외딴집에 세를 든 귀두라미의 지하 방엔 오래도록 해가 들지 않았다 지난밤 거처를 잃은 두견새와 갑작스레 약수터에서 쫏겨난 달빛은 창문 틈에 허리가 끼어 아침까지 웅웅거렸다

 

누가 분실한 것일까

 

공사 중인 안테나처럼 힘껏 꼬리를 세운 고양이 한 마리

 

방금 눌러 찍은 붉은 태양이 채 마르지도 않은 부동산 계약서를 입에 물고서

 

인적 드문 논밭을 검은 천 조각처럼 가로질러 어디론가 재빨리 구겨지고 있다

 
 
 

 

 

2022 전북일보 신춘문예

 

빈 집

박 수 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잡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 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족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 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춤조춤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2022 조선일보 신춘문예

 

허블 등대

박 샘

 

날리는 모래들이 눈에 자꾸 끼어든다

빠지고 싶어 했던 깊이가 있었다고

열리면 닫히는 문을 열고 또 연다

 

떴다가 감았다가 점멸하는 등대처럼

별이 든 눈에서는 깜박이면 반작여서

출처를 밝힐 필요가 모래에겐 없었다

 

들 만한 깊이라면 찾기가 쉽지 않아

운석을 지나왔고 사막을 건넜으나

빠지면 나오지 않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껐다가 다시 켜진 반복은 언제 쉬나

왔다 간 잠이 또 온 불면의 행성에서

모래는 침몰을 향해 국경선을 넘는다

 
 
 
 
 

 

2022 경인일보 신춘문예

 

일 잘 하는 요즘 애들

 

전 예 지

 

 

 


프린터기가 또 말썽이다



이 애물단지를 버리든가 고치든가 이게 대기업의 수준인가요?



하루에 기본 다섯 번을 1층에서 2층으로

걸어야 하는 에스컬레이터 아니면 계단으로

왼쪽 끝 후문 쪽에서 오른쪽 끝 정문 쪽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프린터기를 하나 놔주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겨우 몇 십 만원이 아까워서 사람을 갈아 버린다

두 여자는 욕이란 욕을 다 입에 담지만

차마 입을 벌리진 못한다 멋쩍게 서로 한숨만 쉴 뿐



낡고 늙은 마트에 새로 생긴 텅 빈 매장의 취급은 이 정도



[자리 비움]



자기는 왜 자꾸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

일하기 싫어?



하필 매니저가 없는 날

혼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본부장이 찾아온다

억울한 아르바이트생은 그나마 매니저보다 깡다구가 있다



프린터기가 2층에 있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어쩔 수,



말대꾸도 하고 참 요즘 애들 무섭다



눈이 순간 흰자로 뒤덮여진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머리 빠진 본부장은 혀를 찬다



죄송합니다



속으로 본부장이 매장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입으론 여전히

 
 
 
 
 
 

2022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조퇴' 강희정

 

 

조퇴

 

강희정

 

 

드르륵 교실문 열리는 소리



슨상님 야가 아침만 되믄

밥상머리에서 빗질을 했산단 말이요

긴 머리카락 짜르라 해도 안 짜르고

구신이 밥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참말로 아침마다 뭔 짓인지 모르것어라



킥킥 입을 가리고 웃어 대는 책상들

아버지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낮술이 뺀질뺀질 빨갛게 웃고 있는

4교시 수업




 

덩달아 붉어진 내 얼굴은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어



아버님 살펴가세요 어서가세요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찍 점심 먹고 운동장 나가 놀아라

나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님



달걀 프라이가 들국화처럼 피어 있는

생일 도시락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산들산들 집으로 걸어간다

 
 
 
 
 
 
 

202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왜소행성 134340

 

유진희

 

 

우주는 조금씩 부풀고 있고

우리는 같은 간격으로 서로 멀어지고 있어요

사방이 우주만큼 트여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좌표만 같은 비율로 커지는 세계에서

시간만이 변수라고 한다면

아득한 게 쓸쓸한 일이 되고 맙니다

다시 올 것 같지 않게 멀어지다가

어느 계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별을

찌그러진 궤도를 가진 별을

사람들은 무리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로써 우리 행성계는

완벽하게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공전 주기를 늦추고 싶은

사람들은 서둘러 여행을 떠나지만

매진 행렬이 더 빠르게 이어지고

출발을 위한 서류는 늘어납니다

서류가 늘어날수록 안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거기 여기의 세계에서

서류는 잠식하는 불안처럼 불어납니다

모든 항의에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료의 심장을 뚫어버릴 별빗은

어느 블랙홀에 갇혀버렸을까요

다른 시간 속에서 유영하던 우주비행사는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늙어버립니다

 

 

*태양계에서 퇴출한 명왕성이 받은 새 이름

 
 
 
 
 
 
 
 

2022 서울신문

 

반려울음

 

이선락

 

슬픈 시를 쓰려고 배고프다, 썼는데 배으다라 써졌다

뒤에 커서를 놓고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등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 고파지면 소리 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세면대에 틀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구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 삼킵니다 씹어도 건더기라고 없는 위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 때가 있어요 잠깐 눈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 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그리 쏟아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 손톱을 파낼 땐 눈에도 금이 가고 있었죠

얘야 ,눈빛이 많이 말랐구나 눈을 새 뜨고 있는 게 아니었어 내가,

 

손가락을 흘리고 다니지 말랬잖아요 근데 왜 까마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지 ... 보송보송 털이 난 꿈 속에서

 

 

배가 고프단 얘긴 줄 알았는데, 그림자 얘기였어

부품해진 그림자론 날아오를 수 없다, 어떤 돌은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다, 죽은 후론 배꼽도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졌다

 

처음으로 수면에 떠올라

빼꼽은 어디에 있을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깨지지 않는 것도 깨진 것이 되어버린 오후

이렇게 비좁고, 나는 깎아지른 맘 뿐이었나

 

몇 줄 적지 못한 종이 한 장 찢어, 공중에 날리는

 
 
 
 
 
 

2022 전남매일 신춘문예 

 

20220102() 18:18



미역국

강일규

 

 

산부인과 병원 근처엔 혼자 우는 울음이 많다



팔을 벌리고 부를 이름이 없어

한낮에도 울음이 바람을 끌어안고 멸망을 낳는다



저만치 뒤따라오던 아내가

전봇대를 붙잡고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다



미안

미안



건너편 정류장에서도

한 여인이 어리어리한 앳된 딸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대기실에서 마주쳤던

한 남자와 한 남자가 보호자란 인연으로

눈빛이 스칠 때마다 놓친 연과 놓은 연을 위로했다



아내의 울음이

자궁 밖으로 다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고기 반 근을 샀다

 

 

 

 

 

2022년 신춘문예 당선작

 

 

■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럭키슈퍼 / 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1997년 안양 출생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조선일보 이문재 시인 정끝별 시인의 럭키슈퍼 심사평에서 2022년 신춘문예는 '퉁치면서 눙치고, 하면서 하는 시적 패기'를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시의 봄은 세상의 봄보다 빨리 온다. 시의 나라에서는 새해 첫날이 새봄의 첫날이다. ‘신년문예가 아니고 신춘문예인 까닭이다. 엄동설한에 봄을 열어젖히는 신춘 시처럼, 시의 시제(時制)는 언제나 미래다. 천 년 전을 노래하는 시라고 해도 그 시가 좋은 시라면 시의 마지막 행은 미래로 열리기 마련이다. 이번 새해 첫날에도 시의 나라는 설레는 마음으로 입국 비자를 발급한다. 시인의 숫자가 아니라 우리 시의 영토가 다시 넓어지는 순간이다.

 

(럭키슈퍼)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최근 시의 파장 안에 있으면서도 지금-여기의 사회 현실과 청춘의 당사자성이 감지된다는 미덕이 있었다. 버려진 과일(홍시), 낙과(사과), 씨는 물론 껍질째 먹는 과일(자두), 그리고 부풀었다 터지는 단물 빠진 풍선껌, 헐렁한 양말, 납작한 동전을 먹는 자판기 등이 있는 럭키슈퍼가 화자의 현주소다. 젊은이의 미래와는 먼 오브제들이다. 화자는 농담 맛이 가득한 럭키슈퍼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화자의 동창이자 럭키슈퍼사장 딸은 감미료로 비유되는 대기업의 맛을 맛보고 있다는 대비도 능청스럽다. 퉁치면서 눙치고, ()하면서 통()하는 행운의 의미를 농담과 엮어내는 시적 패기를 높이 평가했다. 신춘 같은 미래를 향해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딜런 토마스), 그런 시의 힘을 기대한다

 

 

 

 

■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 백가경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

 

*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Hypercube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1991년 생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백가경시부문 심사평 -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한다는 것 보여준다고 심사위원 박준 김행숙 김현 님들께서 정리했다.

 

우리 삶의 시간은 살아내는능동과 살아지는수동이 얼마간 뒤섞이기 마련이다. 반면 우리가 시를 쓰는 시간은 온전한 능동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투고된 작품들은 언어와 삶의 주체를 회복하려는 저마다의 고투다. 이 흔적을 따라 읽는 것은 경외가 가득한 것이었고 이들 가운데에서 한 편만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것은 고민을 더하는 일이었다.

 

백가경의 시는 명징한 언어로 작품을 구축한다. 어떤 모호성에 기대어 상상을 비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사유와 진술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은 자칫 단순해지고 평이해질 위험이 따르는 것이지만 시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공고하게 세계를 확장시킨다.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투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시인이다.

 

앞으로도 내내 지난할 시간 속에서 시인만의 가장 고른 것들을 우리에게 꺼내주시길 기대한다.

 

 

 

 

 

 

■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드볼트 / 오산하

 

 

눈을 감았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국가를 떠올리면서 습한 냄새를 맡으면서 안개 속으로 뛰어들면서 길거리의 새를 하나둘 세면서 걸어

 

눈이 마주쳐도 날아가지 않는 새 발로 바닥을 밟아도 도망가지 않는 새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넘어졌어 까맣게 피멍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서 생일 축하해 문자를 받고 시차가 생겼어 하루 늦게 생일을 맞이하면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과 선물 받은 오르골을 돌리면 모르는 노래가 나온다 노래는 언젠가 끝나겠지

 

전쟁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언제가 가장 끔찍할 거 같아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대 거기에 자신을 묻을 거라고 했어 나는 Green DayHoliday를 들으면서 반역자! 반역자! 죽어버린 사람들의 피가 흘렀어 아 곧 종말이구나 그래서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구나

 

두 개의 음 두 개의 박자 머리 위로 떨어지는 15층의 사람과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차 사람의 바싹 마른 피부와 솟구칠 힘도 없는 피 물 물 물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에 다 녹아버린 얼음의 흔적과 끈적한 더위가 있어

 

라는 붙잡아도 부서진다 길을 걷다가 쪼그려 앉아서 새를 가만히 쳐다봤어 새가 내 눈알을 파먹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었어 계속 굴러가다가 영원히 남도록 그곳은 마치 도서관 같다

 

추워 라는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았어 이건 한 세기 전 살아있던 사람의 눈알이구나

 

계속 걸었어 뚝 뚝 흘리면서 걸었어 끊어진 다리 뒤집어진 배 치지 않는 파도 하늘에서 떨어진 새 검은 새 검 눈동자 뽑힌 눈알 굴러가는 심장 굴러 떨어지는 법을 배운 나 깔깔 웃는다

 

1998년 경기도 성남 출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예정

 

 

 

 

 

■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웅큼취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1996년 서울 출생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재학

 

 

 

 

 

■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 박재숙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 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 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지난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 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복을 향한 강한 의지인 거야

 

공복은 채움의 예비의식이기도 해 그러므로 내 침대는 늘 비어서 오늘 아침이 봄, 때때로 난 널 사랑해 내 생각대로 꽃피게 하고 싶어 레시피는 간단해 갖가지 감정의 재료들을 봄흙으로 만든 황토침대에 쏟아부으면 끝, 그럼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꽃밭의 식사를 할 수 있어

 

사계절은 한결같아 언제나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불쑥 깨진 거울을 들이미는 봄의 손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내가 보여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울의 트릭이 보여

 

그래도 방언 같은 아지랑이의 말을 기억하는 내 침대는 여전히 오늘 아침이 봄

 

1967년 전북 부안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엄마 달과 물고기 / 김미경

 

물고기는 내 오빠다

오빠가 물고기인줄 알면서도 내 엄마 달은 물살에 휩쓸려 떠밀려가는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눈물이 없는 달

우리가 잠든 밤마다 환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놀라고 걱정스럽게 만드는 달 말이다

이런 달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만 많다

물거품이 이는 곳에 가면 은빛 곡선을 가진 오빠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기가 발을 핥고 있어서 젖 물릴 때가 됐다고 한다

물고기의 얼굴은 내 얼굴

우리는 형제다

물속에 잠긴 달이 운구릉을 헤적거리다 곱은다리에서 암흑 속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검은 그림자에 싸여 비틀거리는 아빠도 함께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힘이 세다.

 

 

엄마 달과 물고기는

모성의 부재로 인한 비극미와 더불어 달 이라는 매개를 통해 역사인식은 물론 은유와 상징성까지 획득하고 있다. 이때의 달은 타자와의 조화로운 삶을 염원하고, 공동체의 의지를 추동하는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서 좀 생뚱맞지만, 예전 신춘문예 딩선작 월면채굴기 소개합니다.

 

 

월면 채굴기 / 류성훈

 

몸 누일 곳을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흡연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릿속

돌멩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 곳에 풀어놓으면서

아버지가 고요의 바다 어디쯤을 채굴하고 있었다

병들도 힘 빠질 무렵

두개골을 망치질하는 마른기침이

울퉁불퉁한 삶 쪽으로 흔들렸다

몸속의 돌은 달 뒤편을 돌 같아

닳고 닳은 땅 보다도 단단하고

검을수록 깊은 광맥으로 이어져 있는데

어느 갱도에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저 큰 굴착기가 가지고 나올 단단한 돌

돌아와 때때로 돌아눕던 그는

다리의 성근 터럭을 젊은 내게 보여주었다

달의 얼룩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날

아무에게도 거기서 뭘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창 밖 저탄 더미. 캐낸 달빛이

벌써 내게 문병오고 있었다

 

 

 

2022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상자 놀이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가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심사평

평범한 소재서 리듬감 이끌어낸 상상력... 서정시 품격 한층 높여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됐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이 중에서 '가뭄', '포도', '청년 희망 회복', '상자 놀이'가 경합한 끝에 '상자 놀이'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마지막에 아쉽게 수상의 영예에서 밀려난 다른 작품들 역시 서정적 울림과 개성을 지닌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중론이었다.

(중략)

결국 끝까지 남은 '상자 놀이'가 별다른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우선 '상자 놀이'는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미가 서정시로서 갖춰야 할 품격을 한층 높인다. 시상을 전개하는 맑고 순수한 시행의 흐름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서 막힘없이 운용돼 운문적 리듬감으로 충일하다. 또 시행과 시행을 건너뛰는 간결함과 담백함으로 우리 마음의 여백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는 풍부한 상상력이 여운을 자아낸다. 이 시는 "뜯지 않은 택배"라는 평범한 소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쓰지 않고 현실에 발을 댄 독특한 시선으로 변주하는 공간 변용 능력과 감정의 안배가 뛰어나다. 상자의 닫혀 있음과 열림, 그를 통해 드러나는 어둠과 빛이 팬데믹 시대의 도시적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내를 주거 공간에 집약해낸다. 무엇보다 당선작과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른 점도 안심케 하는 대목이다. 산문화와 장식적인 수사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시적 풍경 속에서 이 신예시인이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덧대어 어떤 삶의 박동과 리듬을 우리에게 선물해줄지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나희덕, 박형준, 문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