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신춘문예 시
2025 현대경제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대상ㆍ 파밭 / 엄경순
파밭
하얀 다리를 걷어 올린 푸른 대궁
채마밭 굵은 파들이 쑥쑥 자란다
대궁 안은 한 숨 두 숨 잔뜩 부풀었는데
속내를 알 수 없는 통통한 옆구리를
청개구리 한 마리가 발가락으로 간질인다
세상을 머금은 듯 단단히 여민 대궁
아무리 흔들어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꺾지 않으면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속을 보려고 대궁을 꺾을 수도 없다
대궁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세상
가만히 숨죽여 귀 기울이면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끙끙 속을 태우며 들어앉았다가
말문이 터지듯 어느새 쑤욱 답을 밀고 올라와
파바밭! 꽃대 위에서 하얀 꿏망울로 터진다
파밭에서는 꽃이 필 때마다
나비랑 벌 무리 좋아라 야단법석이다
대궁은 여전히 무슨 궁리 그리 깊은지
하얀 꽃 속 까만 씨알이 응어리처럼 영근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있던가
작은 세상이 일일이 영그는 이치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백제의 향로 같은 깊은 침묵이 피워 올린 꽃대는
푸른 속내흘 감추며 더욱 단단해져가고
꽃씨는 벌써부터 파 밭 파 밭 아우성인데
나는 생각이 여무는 그 침묵이 좋아라
발뒤꿈치 들고 조용조용 서 있는 파뿌리들
엄경순.1977년 충남 청양 출생
2014 동서문학상 가작, 2020 동서문학상 동상
새벽배송 공작소 ㆍ김선욱
잠든 사람이 더 많을 열두 시 반
작고 노란 봉고차에 이형화물처럼 올라타서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졸음과 함께 앉아서
로켓도 쏘아 올릴듯한 기지에 도착해서
거대한 명령과 굉음에 쪼그라들어서
너도 나도 그냥 입고 온 대로 입고서
무심한 컨테이너벨트 앞에 서서
잘못 거드린 도미노처럼
쏟아지는 토트박스 토트박스
왼손은 청기 오른손은 백기
청기 백기 함께 올려
청기 백기 함께 내려
반복하다가 가끔
청기가 어딘가에 끼어서
박스와 박스사이라거나 선반의 틈,
깜빡하고 가져와버린 마음에도 끼어서
십오 분의 쉬는 시간에
끼었던 손을 빤히 바라보는 것
내가 나한테 이래도 될까
하고 물어보는 것, 그때
여러분은 이곳에 돈 벌러 온 것 이라며
줄줄 새는 욕으로 우리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토를 달지 않고 묵묵하게
청기백기 청기백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능숙한 백기를 든다
집에 있거나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너무 큰 옷을 입은 물품들이
롤테이너에 실려 도크 밖으로 빠져나갈 때마다
새벽이 닳아간다
병렬로 놓인 무수한 트럭 틈 사이로 햇빛이 스며든다
혹시 꼭 안가셔도 되는 분 있습니까
조금 더 일하실 수 있는 분 있습니까
힘 빠진 청백기 대여섯 개가 죄처럼 들려지고
나는 옆 사람 얼굴을 쳐다보고
그 사람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우리가 우리한테 이래도 될까
김선욱ㆍ1989년 전북 익산 출생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과 졸업
2025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안수현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 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래 있었던 토마토 과육에선
제 심장을 디디고 선 싹이 자라곤 한다
해묵은 양수를 받아마시며,
그것은 꽤나 외로운 일이다
그래도 토마토는 그렇게 한다
안수현- 1998년 출생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과, 문예창작학과 졸업 ㆍ이화여자대학원 국어국문과 석사, 박사 수료
2025 오륙도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박상철
허수아비
눈물이 없다고 가슴까지 메마른 건 아니다
바람이 흔들리지만 마음은 굳건하다
때때로 혼자 뭉게구름을 타고 올라
온 들녘을 다녀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바람에 찢긴 누더기
외로움에 부러진 가지를 놓지 못하고
너덜너덜해진 팔
새들은 제 세상인 양 집을 짓는다
우거진 수풀 사이
내 겨드랑이는 종달새의 집
바람에 기울어진 몸이
몇 몇 새를 쫓지 못하고 동거를 허락한다
오래된 들녘에 덩그러니 나는 버려져 있어
빈 방을 안고 몰래 나간 새들을 기다린다
커튼을 올려도 소식 없는 아이들처럼
나는 독거노인이 되어 저물녘 소멸을 노래한다
2025 전북도민 신춘문예 시 당선/ 임수율 /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
라디오를 켜놓고 소머리를 감긴다
단단한 이빨 속에 곱씹은 풀들이
이끼가 되었다
부릅뜬 눈으로 저녁 너머를 되새김하는,
머리만 남은 소가 싱크대에 식은 울음을 쏟고,
두꺼운 혀와 솟아오른 귀를 씻기다가 나는,
한 줄기 바람이 되기도 하고
익을수록 쫑긋해지는 귀에서 흘러나오는
천둥소리, 풀벌레 소리,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우우 끓는 한낮
뽀얗게 우러난 사태를 국자로 휘휘 젓는다
씹을 때마다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 쩝쩝거리는
국밥 속에서 흰 눈 밟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아,
발 담근 소의 냇물과 옥수수, 질경이, 개망초와
억새를 꾸역꾸역 건져 먹는다
소 울음소리에 주파수 맞추면
라디오는 소와 놀던 풀밭의 새들과
꽃잎 열리는 소리를 쏟아놓고
임수율 ㆍ1966 장수 출생
한국방송작가교육원 수료, 경희사이버대학 재학 중
2025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미정/ 침목
침목
스위스 빙하 열차의 기울어진 유리잔을 생각했다
버틸 수 있는 각도, 그런 거 있잖아
결빙 구간이 자주 반복되었다
나는 선로를 따라 쩍쩍 갈라지고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 물이 되어 몸이 몸으로 늘어지고
완전히 누우면 각진 하늘이, 조금 측면으로 기울이면 삐죽이
솟아있는 아파트 옥상과 낙상주의가 적힌 사물함이 보였다
신은 나를 물속에 둔 채로 자주 자리를 비웠다
그럴 때마다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말고 그 속에 얼굴을 파묻었는데
나랑 같이 있자
사이프러스 큰 나무들이 비켜서 있다
철 지난 비둘기를 부르고 솟대를 걸고 손톱을 물어 뜯고,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열두 번 모으면 사랑해 한번
커튼이 열리면 각자의 성호를 긋고 밥상을 마주하는 사람들
비릿한 철 냄새와 밥 냄새가 섞이고
열차는 제시간에 들어오거나 연착되었다
내 자리는 콘크리트가 대신하고, 폐목이 되어 공원으로
옮겨질 거라는데
부유하는 법을 배운 건 그때부터
신은 나를 통과하게 될 것이다
기다림은 다시 기다림으로 연결된다
누구든 꾹꾹 밟고 지나가길
그렇게 홀가분해지도록 나를 분리하기 시작한다
김미정ㆍ1972 강원 황지 출생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ㆍ칠곡 거주
2025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김지민 / 넝쿨은 집으로 가요
넝쿨은 집으로 가요
꿈이 쳐들어와 며칠째 끌고 가요
뿌리가 박혀 있는 재건축지구로
굴러다니는 벽시계 옆 이불과 옷가지 사이 사하라 장미는 피어
태엽을 작동하고 고양이가 고양이 꼬리를 잡고 무너진 담장을 친친 감아요
마침표를 찍었어도 빈집과 빈집 사이로 길이 지나가요
세발자전거와 두발자전거 사이에 있던 들뜬 목소리
그 소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살고
넝쿨은 집으로 집으로 또 집으로 가요
갈라진 벽으로 들어온 찢어진 햇빛
빛과 함께 살아나는 먼지
벽지에서 헤매다 색을 잃어가는 색연필
메뉴판에서 썩어가는 토마토를 불러와 요리해요
어제와 다름없는 지붕을 만들어요
오르톨랑이 차려진 식탁
먹어본 적 없는 맛이 불러온 우리 집
이곳의 하늘이 가라앉을 동안
그늘이 그늘을 부풀려 발이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우리의 과거는 해체되고 있어요
우리만 떠나고
여기엔
아침이 오고 쓰레기도 생기고 꽃이 피고 길이 지나가고
고양이는 거실에서 짝짓기를 하고
살아 본 적 없는 세상에서
살아 본 적 없이 사는 것들이
이끼가 나무 의자를 점령한 시간의 길이를 재면서 있어요
우리는 아직도 집으로 집으로
<2025 농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란 경전 /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
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
할머니 손끝에서 톡톡 핏빛으로 핀다
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
꽃잎은 빙빙 돌며 아랫집 지붕 위로
날아간다
그 집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모란 꽃잎 불어 날리는 날이면
어디선가는 사람이 죽고 부음이
날아든다
도화도 죽었으면 좋겠어 좋겠어
차마 꽃잎을 뜯지 못한 어린 손가락이
붉다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도화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속에는 붉은
말들이 무성했다
제 신발 속에 가시를 잔뜩 집어넣었을
때도
아이의 두 손을 따뜻하게 쥐고 웃었다
죽음을 이해하는 일
떨어진 꽃잎 한 장이
바람도 없이 날아간다는 것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병풍 속 나비는 물처럼 고요하다
<2025 경향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너무 작은 숫자 / 성다영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
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뭇가지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망할 것이다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 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 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그런 예측은 쉽다
다영 씨가 웃는다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
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낡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간다
되돌릴 수 없다
<202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사력 / 장희수
할머니가 없는
할머니 집에선
손에서 놓친 휴지가 바닥에 돌돌 굴렀다
무언가 멀어져가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소금밭처럼 하얗게 펼쳐지고
어떤 마음은 짠 맛을 욱여가며 삼키는
일 같았다
그 중 가장 영양가 없는 것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해본
적 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포기할 수 있었다면
또다시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생길 리 없을테니까
할머니도 이제야 뭔들
관두는 법을 배운 거겠지
다 풀린 휴지를 주섬주섬 되감아보면
휴지 한 칸도 아껴쓰라던 목소리가,
귓등에서 자꾸만 쏟아지는 것 같았는데
쏟아지면 쏟아지는 것들을 줍느라
자주 허리가 굽던 사람의 말은
더 돌아오지 않는 거지
죽을 힘을 다해본다 해도
사람들은
영정 앞으로 다가와
국화꽃을 떨어트리고 멀어져 간다
정갈하고 하얗게 펼쳐지는
꽃밭처럼,
무언가 떠나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할머니가 있었던
할머니의 집에서는
<2025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담 / 박연
우, 너는 언젠가 영가들은 창문으로
다닌다는 말을 했지
그 뒤로 밤이 되면 커튼을 쳐두었다
낯선 영가가 갑자기 어깨를 두드릴까 봐
두려운 일은 왜 매일 새롭게 생겨날까
가자지구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소년들은 처음 보는 사람을 쏘았겠지
총알이 통과한 어린 이마와 심장
고구마줄기 무침 먹으면서 봤다
전쟁을 멈추지 않는 나이 든 얼굴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빌미로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말을 들었어 맨발로
거리를 걷고 싶다 너는 내가 추워할 때
입김을 불어줄 테지. 거리에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입혀 둔 스웨터를
보자. 보라색 바탕에 웃는 얼굴이
수놓아져 있던 스웨터를 기억해?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음흉해서,
음흉이라는 이름을 붙였잖아
세상에 그런 음흉만 있다면 어떨까
나무를 따뜻하게 해 줄 거라는 속셈이
이 세계에 숨겨진 비밀의 전부라면 나는
여전히 좁은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본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오래 미워하고 있다
어디로 걸어야 할까. 방향이란 게 있을까
어디든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더 많은
숨을 살릴 수 있는 쪽으로 와중에
스스로를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너는 뭔가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해?
흩날리는 게 눈송이인 줄
알았는데 실은 이웃의 뼈를 태우고 남은
재였던 날?
갚을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갚으러 오는
아이들이 즐비했던 문구점
그곳에서 우리는 소란스러운 귀를
훔치는 아이들이었지
더 이상 훔칠 귀가 없는데도 서성이기를
멈출 수 없는
어째서 세계의 비밀을 듣는 놀이를 즐겼을까
옆 나라의 수장이 계속해서 무기를
사다가 결국소년들을 팔아버렸다는 거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조용히 잊힌다는 것
말을 아끼는 동안
너는 산뜻한 손짓으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넘어지기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자꾸 밭은 숨을 쉬게 해
우리 심장은 우리의 가슴이 아니라
죽어가는 이들에게 있으니까
*
우리의 얼굴을 한 영가가 창문을 두드린다
넝쿨은 집으로 가요
김지민
꿈이 쳐들어와 며칠째 끌고 가요
뿌리가 박혀 있는 재건축지구로
굴러다니는 벽시계 옆 이불과 옷가지 사이 사하라 장미는 피어
태엽을 작동하고 고양이가 고양이 꼬리를 잡고 무너진 담장을 친친 감아요
마침표를 찍었어도 빈집과 빈집 사이로 길이 지나가요
세발자전거와 두발자전거 사이에 있던 들뜬 목소리
그 소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살고
넝쿨은 집으로 집으로 또 집으로 가요
갈라진 벽으로 들어온 찢어진 햇빛
빛과 함께 살아나는 먼지
벽지에서 헤매다 색을 잃어가는 색연필
메뉴판에서 썩어가는 토마토를 불러와 요리해요
어제와 다름없는 지붕을 만들어요
오르톨랑이 차려진 식탁
먹어본 적 없는 맛이 불러온 우리 집
이곳의 하늘이 가라앉을 동안
그늘이 그늘을 부풀려 발이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우리의 과거는 해체되고 있어요
우리만 떠나고
여기엔
아침이 오고 쓰레기도 생기고 꽃이 피고 길이 지나가고
고양이는 거실에서 짝짓기를 하고
살아 본 적 없는 세상에서
살아 본 적 없이 사는 것들이
이끼가 나무 의자를 점령한 시간의 길이를 재면서
있어요
우리는 아직도 집으로 집으로
2025년 경인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날개
박봉철
날개에 바닥이 있다. 어둠을 안고 일어선 곳에 깃털 냄새가 났다
어깨 둘둘 말며 방향을 잡아간다
바람은 심장을 꿰뚫듯 그림자를 비켜선다
새를 연상하며 새의 가벼운 뼈들을 통과한다
무게를 줄이는 새에게 구멍이 뚫려있다는
고고학적인 소견이 귓등을 강타한다
생각을 횃대 삼아 이렇게 가벼운 분위기는 처음이야,
상황만 점점 무거워지는 거지
무게를 덜기 위해
기낭이 풍선처럼 부푸는 듯 위를 갈아먹었던 게지
거품처럼 붉은 강물들이 몸속 번갈아 우거진 체액을 삼켰던 게지
가쁜 숨이 펼쳐진 입김들이 타원형처럼 포개졌고
빛의 멱살을 찾아 길을 낼 수 있을까
방향을 재면서 동시에 꼬리가 돋아났다
그때 주저앉는 평형의 몫은 없을 것이다
꼬리를 빙빙 돌려보내는 하마, 위험할 때 철썩, 철썩 보내는 비버, 방향을 틀 때
긴꼬리로 균형을 잡는 치타,
꼬리가 날개로 들.어.간.다. 거꾸로 들.어.간.다.
꼬리의 배후는 날개였을까
분주하게 묻어온, 허공을 짚어낸다
날개를 치켜들며 여긴 바닥이므로, 일어섰을 즈음
날것의 대의를 위하여
출렁이는 지평선 너머
반쯤 넘어진 표면으로 뿔뿔이 내미는 깃털
겨드랑이에 혁명을 물고 허공을 헹구던 어깻짓
기슭을 앓아, 바깥의 몸살이다
2025년 경남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책가도
이수국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오크 향 원목 책장을 창문 앞에 세웠다
책을 좋아한 왕이 책가도(冊架圖)를 세워 일월오봉도를 가렸듯
햇살과 달이 가려진 방
창틈으로 들어온 빛이 어둠을 가른다
박물관 유리문 너머 책가도
가로와 세로의 배열 속, 그림 위에 꽂힌 천년의 페이지들
그림 속 책을 보던 왕과
유리문 안을 보는 내 눈이 책가도 위에서 만났다
그림 한구석 은밀히 쓴 화공의 이름이 흔들렸다
책장 바닥에 그늘 한 권을 괴자 몸이 중심을 잡는다
무너지던 중력을 다시 세운 건 한 권의 책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꺼내면
그들의 체온이 손끝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오고
작가를 지우며 작가를 꽂는다
이럴 때 사전을 거역하는 것은 유쾌한 일
문장이 자라는 시간
스위치를 켜면 책과 나는 조도가 같아져
수백 년 전 죽은 우린 서로 이마를 맞대며 이야기한다
눈감은 순간에도 새로운 이름이 눈을 뜨고
서로 다른 시계들이 태엽을 돌리면 한 곳에서 만나는 페이지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
바람과 함께 써가는 연대기
이곳에도 낱장 사이 기압골이 있어 새로운 바람이 분다
내 안의 책장을 만지면 나는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
2025년 강원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생각하는 나무
이문희
나는 몽상가답게 낙천적이죠
구름모자를 즐겨 써요
서서 먹고 서서 자는 동안에도 반짝반짝 사색을 즐기죠
이파리가 많다는 건 생각이 많다는 증거랍니다
그래서 외롭지도 외로운 줄도 모르죠
빽빽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궁금한 게 참 많아요
덩굴장미는 용암의 뿌리에서 분출한 식물성 화산일까
바다가 파도 창고라면 하늘은 구름 공장일까
누가 저 많은 구름들을 져 날랐을까
매미에게는 몇 마력 울음의 엔진이 장착된 걸까
또 이런 생각도 해요
하늘에 갇힌 별들은 자유로울까
물고기는 어디를 날아가려 지느러미를 가진 걸까
무지개는 하늘 놀이터의 미끄럼틀일까 아니면 하늘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일까
나는 새들에게 의자를 내어주는 게 취미라면 취미
노래를 하고 싶거나
한바탕 춤을 추고 싶을 땐 바람 몰이꾼이 되어요
매일매일 석양을 바라보며
서쪽이라는 당신에게 시를 지어 주죠
누구나 나의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길거리에서 배낭 메고 여행 중인 달팽이를 만났다고 해서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겠다는 생각은 꺼주세요
오늘도 생각의 평수를 넓혀가는 나는 자유인이니까요
낮달에게 안개에게 늘 새로운 말을 걸어요
걷느라 생각에 물든 당신이라면
그늘에 잠깐 쉬어 가셔도 됩니다
나는 생각의 씨앗을 다 모아 땅에 뿌리려고 해요
파랗게 돋아나는 생각들을 환호하며 매만지게 될 거예요
나는 파란 마을 파란 집에 살아요
2025년 광주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폭설 밴드
노은
팝콘은 함성이라서 우리는 스네어 드럼을 밟는다
산과 하늘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이 오면
저 멀리서 늑대의 우두머리가 하울링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 안 아이들의 핸드폰에 폭설 경보음이 울리고
뒤적거리다 발견한 서랍 속에서 눅눅해진 팝콘
밴드 합주실은 꼭대기 층에 있어서
아이들은 지붕 없는 교실에서 자습을 했다
쿵, 쿵
우리는 무언가를 떨어뜨리기도 하였는데
무언가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커서
옥상에서 어떤 아이가 얻어터진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았다
누군가 죽은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너는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퓨즈가 나가고 모두 조용해지는 한 순간
기억 속의 학교는 영원히 어두울 것만 같아,
내가 말했다
셀 때마다 달라지는 계단의 수
잡히는 대로 꽉 쥘 수밖에 없어서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하얗게 질린 손에 온기가 돌아오길 바라며
우린 완전히 고립된 거야
둘 중 누군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열차가 운행하지 않고 교문이 눈에 묻혀도
이곳은 폭설 밴드
너와 나는 깨진 전구와 베이스 기타 줄을 들고
학교를 한 바퀴 돌았다
신발장을 지날 때마다 교실에서 이탈한 아이들은 배로 늘어나서
일렬로 늘어선 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지 않는 담임 선생님께,
추워서 옷을 벗었어요 우린 아직 힘이 넘치고 유순하답니다 서로의 입에 팝콘을 넣어주곤 겨드랑이에도 손을 넣어요,
구두 소리가 마룻바닥을 두드리면 학교는 움직입니다 교시음은 필요 없어요 베이스도요
너는 머리말을 이렇게 장식하기로 마음먹었고
늑대들이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2025 매일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구인> 광명기업
김용희
외국인 친구를 사귀려면 여기로 와요 압둘, 쿤, 표씨투 친해지면 각자의 신에게 기도해줄 거예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글로벌 회사랍니다 요즘은 각자도생이라지만 도는 멀고 생은 가까운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해요 매운맛 짠맛 단맛 모두 준비되어 있어요 성실한 태양 아래 정직한 땀을 흘려봐요 투자에 실패해 실성한 사람 하나쯤 알고 있지 않나요? 압둘, 땀 흘리고 먹는 점심은 맛있지? 압둘이 얘기합니다 땀을 많이 흘리면 입맛이 없어요 농담도 잘하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봐요 쿤과 표씨투가 싱긋 웃습니다
서서히
표정을 잃게 되어도 주머니가
빵 빵 해질 거예요 배부를 거예요
소속이란 등껍질을 가져봐요 노동자란 명찰을 달아주고 하루의 휴일을 선물해 드릴게요 혼자 쌓고 혼자 무너뜨리는 계획에 지쳤나요 자꾸 삐걱대는 녹슨 곳이 발견되나요 이곳에서 기름칠을 하고 헐거운 곳을 조여보아요 감출 수 없는 등의 표정을 작업복으로 덮어 봐요 작업복을 입으면 얼룩이 대수롭지 않고 털썩 주저앉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툭툭 털고 일어나는 털털함을 배워보세요 먼지 풀 풀 날리는 공장이지만 한 뼘씩 자라는 미래를 그려봅시다 동그란 베어링을 만들다 보면 자꾸 가게 될 겁니다 긍정 쪽으로
밝은 빛이 이곳에 있습니다 일종의 상징이지요 바람이지요 떠오르는 해를 보며 출근길에 몸을 실어보세요 터널을 좋아하나요 터널이 좋아지게 될 거예요 끝엔 항상 빛이 있다는 사실로
어둠에 갇혔나요
이곳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분류 : (중소기업) 제조업 - 선박 부품 제작
임금 : 최저시급, 일 8시간(잔업 1시간), 격주 토요일 근무
깔 깔 깔
쿤이 땀 흘리며
너트를 조이는 래칫 렌치를
이곳 사람들은 깔깔이라 부릅니다
웃음 많은
이곳으로 와요
2025년 문화일보신춘문예
고등어 가족
장주호
이전의 삶이라면
분명 기요틴이 되었을
치밀하고도 잘 짜인 나무
그 반질반질한 재단 위에 올라선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입김의 뜨거움
오로지 죽어서 죽을 수 없는 존재만이
허공의 달과 눈을 맞출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가죽 채찍처럼 후려치던 짜디짠 미름쇠
이윽고 죽 찢어진다
구석구석 발려진다
각자의 영역을 나온 순간 비극
농축된 작은 금속들은온몸의 살을 후벼 파는데
걸쭉한 피 한 줄기가 느껴지는 듯하여
구긴 초대장을 얼른 이마 위로 가져간다
요리를 기다리는 콩과 콩깍지 사이
아픈 멍을 스스로 눌러보는 것은 즐거운 일일까?
분쇄기들엔 의도가 있다는 것이 앵무새와는 다른
점
들어가는 입과 나가는 입을 구분할 수 없고
고등어의 가시는 꼭꼭 씹을 수 있다
그 자잘함에 표본이 되지는 못한다
얼굴 그림자 위로 젓가락이 곡예비행을 한다
그 짭짤함에 도무지 끊지를 못한다
2025년 한라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백야
원수현
창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아주 작아서 내 눈에만 보이는 창을
사람들은 으레 그랬듯 그저 스쳐 지나갈 것이고
나는 그 작은 곳에 눈을 대고 밖을 보기로 했어
틈 사이로
가진 것들이 보였다 너무도 많고 때로는 아무것도 없고
많아서 우는 사람들
없어서 우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불행함을 하나씩 눈에 넣었지
이곳을 떠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빙하를 뚫고 도달한 곳이 빙하라니요!
그곳도 돌았다 빙글빙글 꼭짓점도 결국에는
그대는 미치어 있는가
그대는 미쳐 있던가
아 다르고 어 달라서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뱀을 피해 장대에 올라간다고 했다
점점 더 길어지는 그림자들
우리의 그림자가 세상을 덮을 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깨진 창문을 다시 기우는 사람이 있었다
2025년 경상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산리 보물선
이수하
그가 어떤 파랑도 타고 넘는 보물선을 만든다
담벼락 밖으로 삐져나온 보일러 연통은 좌표
개나리 꽃가지는 방위를 살피는 나침반이다
턱선의 땀방울을 향해 양어깨가 번갈아 오가며
오후를 스패너로 조인다
기름통을 싣고 와 기계실에 연결했으니
골목에서 얻은 메트리스를 선실 바닥으로 삼고
커튼은 돛으로 쓴다
눈썹에 와닿는 입김
문턱에 가는 실금 따라 살얼음이 생긴다
아귀가 맞지 않는 곳에서 갈매기 울음이 새어 나온다
유모차는 뭐 하려고?
엄마를 밀고 가려고
부러진 선풍기는 내놓아야지
거기 푸드덕 새가 살아
의자는 도로 갖다 놔 애들도 올 텐데
발 뻗을 곳이 없잖아
그는 제 식구 찾아가겠다고
삐걱대는 의자를 타고 헌 옷가지들 챙긴다
의자 다리가 구부러진 못을 물고 기우뚱거린다
잠가도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
쇠 파이프의 긴 그림자가 기울어지는 들보를 받쳐 든다
나무 벌레 구멍 속에서 금가루 같은 햇볕 쏟아내면
갯벼룩이 기어 나온다
벼락바람이 불고
얼룩무늬 골목이 스멀스멀 방문을 밀쳐둔다
2025년 무등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오키가하라*
이지우
외로움이란 자꾸 발견되는 이상기후
나는 지금부터 나를 고백하는 것으로
숲에 도달할 수 있다
여름이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어떤 날, 나는 스스로를 바꿔 보기로 했다 노력과 사랑을 뒤섞어서
밥과 함께 삼켜 보기로 했다 문장 속으로 회피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새벽을 참 좋아하고
이것은 글로 포기할 마음을 먹는다는 것
창 너머로는 고장난 실외기가 소음 없이 돌아간다
다리 사이로 차오르는 땀과 찝찝함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
내게는 있다
사람이 너무 좋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안한 마음이 지속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녹아버린 빙하처럼
외로움은 누군가가 주목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중요해지는 것이다
나는 선풍기로 외로운, 혼자인, 함께는 불가능한 스스로를 견뎌낸다 곧이어 풀과 꽃을 기록했다
푸르다, 푸른 것이다 나무는 나무라는 이름으로 죽어간다
아직 나 살아있어요, 하고서
2025년 광남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허수아비
박상철
눈물이 없다고 가슴까지 메마른 건 아니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마음은 굳건하다
때때로 혼자 뭉게구름을 타고 올라
온 들녘을 다녀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바람에 찢긴 누더기
외로움에 부러진 가지를 놓지 못하고
너덜너덜해진 팔
새들은 제 세상인 양 집을 짓는다
우거진 수풀 사이
내 겨드랑이는 종달새 집
바람에 기울어진 몸이
몇 몇 새를 쫓지 못하고 동거를 허락한다
오래된 들녘에 덩그러니 나는 버려져 있어
빈 방을 안고 몰래 나간 새들을 기다린다
커튼을 올려도 소식 없는 아이들처럼
나는 독거노인이 되어 저물녘 소멸을 노래한다
2025년 오륙도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카카리키 앵무
이주경
조용히 우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미풍에 머리카락 날리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창문보다 낮게 목소리를 죽이는 아이, 이웃집엔 중문도 방음벽도 없단다 얌전히 울면 해바라기 씨를 가득 줄 테야
호기심 많은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쪼아대도 가둔다 짧고 단단한 부리로 백합 꽃잎을 쪼아대도 가둔다 동글동글한 눈빛으로 수도꼭지를 툭툭 건드려도 가둔다 집안에서 제일 예민한 각도로 웅크리는 아이, 이웃집엔 꽃병도 수도꼭지도 없단다 너의 호기심을 잠그면 해바라기 밭을 줄 테야
혼자 놀기 좋아하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오후 햇살이 올리브색 깃털 위로 미끄러져도 가둔다 건반 위를 콩콩 뛰어다니기만 해도 가둔다 깨지지 않는 거울을 보고 혼잣말을 해도 가둔다 방안에서 깃털을 고르는 아이, 이웃집엔 햇살도 거울도 없단다 방안 가득 네 꿈을 펼친다면 새장을 통째로 줄 테야
아파트 밖을 나서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창문 여는 소리만 들려도 가둔다 놀이터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높아져도 가둔다 마오리족의 깃털처럼 가벼워지려는 아이를 가둔다 창살 안에서 노란 깃털을 뽐내는 아이, 이웃집엔 너 같은 아이도 악보도 없단다 내 앞에서만 노래하면 새장을 요람처럼 흔들어 줄 테야
2025년 전북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름다운 눈사람 / 이수빈
아름다운 눈사람
이수빈
선생님이 급하게 교무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신다 나는 두 손을 내민다 선생님이 장갑을 끼워주신다 목장갑 위에 비닐장갑을 끼우고 실핀으로 단단히 고정해주신다 나는 손을 쥐었다 편다 부스럭 소리가 난다 마음 편히 놀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운동장 위로 얕게 쌓인 눈 새하얗고 둥글어야 해 아이들이 말한다 눈을 아무리 세게 쥐어도 뭉쳐지지 않고 흩어진다 작은 바람에 쉽게 날아간다 흙덩이 같은 눈덩이를 안고 있는 아이들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는 아이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다룬다 개를 쓰다듬듯 품에 안은 채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눈덩이가 매끈하고 단단해진다 아주 새하얗고 둥근 모양의 완벽한 눈덩이를 갖는다
눈덩이가 내 품속에 있어서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그 세상이 아름다운 것도 같고 서툴지 않은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한데
하고 있던 목도리를 푼다 모자를 벗는다 장갑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내 눈사람은 너무 잘 챙겨입어서 더 이상 눈사람 같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교실로 돌아가고 없다 밟히고 파헤쳐져 더 이상 하얗지 않은 운동장을 본다
선생님 제 눈사람이 가장 새하얗고 둥글어요 그리고 또 커요 나는 말하고 선생님은 오랫동안 내 눈사람을 바라보신다 어찌할 수 없어서 울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선생님이 서 계신다 나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지만 같이 울상이 된다 이 순간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린다
서울신문
2025신춘문예
디스토피아/백아온[서울신문 2025 신춘문예 - 시]
플라스틱 인간을 사랑했다.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가 피우는 카멜 담배의 낙타가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거나 레몬청을 시지 않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말해줬다. 나는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그것들로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항상 쇼윈도 불이 꺼지고, 조명 상가들도 문을 닫았다. 집에 돌아가면 투명한 호리병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둔 호리병을.
그와 있다 보면,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진짜라고 믿어졌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망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 의해 회복되는 우울한 로맨스 영화처럼.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요, 내가 엄마를 찾아볼게요.
어느 날은 그늘에 있기엔 너무 추웠다.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찼다. 당신도 춥지 않아요? 물어보려던 것을 꾹 삼키고 말았다. 나는 그 공원에서 덜덜 떨며 그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오랜만에 행운목에 물을 주고 왔어요. 행운목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잘 살지요. 나는 가만 듣다가
당신은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없어요? 나라고 아무런 사연도 없는 줄 알아요? 화가 치밀었다. 그동안 그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사연이 알고 싶었고, 그 역시 나의 사연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길 바랐다. 그늘에서 바깥으로 걸어 나갔고 그는 벤치에 그대로 앉아서 텅 빈 손을 흔들었다.
그를 정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플라스틱 피부에 덧칠된 이목구비와 단 하나의 표정을 보았다.
가까운 미래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 줄곧 생각해 왔는데. 지금껏 그와 나 둘 중 누구도, 서로에게 안기지 못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제조 일자가 쓰인 전구처럼 동시에 빛나고 동시에 꺼지길 바랐다.
저수지에 가서 호리병을 거꾸로 들고 바닥을 두드렸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깨뜨려보려고 주먹을 쥐었을 때, 어디선가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호리병을 그대로 버려둔 채 바깥으로 달려갔다.
도망친 곳에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가 폐기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었다. 내가 가짜였더라도 당신은 적당히 건강하게 지내요. 이따금 사람들과 핑퐁을 치기도 하고. 오래된 불안과 결핍은 나를 더 아쉽게 할 테니까요. 당신의 이마는 부드러웠어요.
나는 그가 닫아준 몇 줄의 감상과 조용한 꿈들을 기억하려고 했다.
2025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예의 / 최경민
옆자리가 그랬다
살아있으면 유기동물 구조협회구요
죽어있으면 청소업체예요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나가면
누울 자리를 뺏긴다는 걸
그래도 가야 한다
새벽에 하는 연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반대편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쌍하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고양이는
새벽에 일어난 우리들보다
조금 더 불쌍하다
그래도
다 보고 올까요
죽어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관할구역 끝까지 갔다
사실은 좋아하지 않는 걸 하는 게
기본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최경민 시인: 1995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현서울시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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