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감각적인 시를 위하여

아리박 2012. 4. 10. 13:33

감각적인 시를 위하여

고 성 만(시인)

1. 시각

사물을 본다는 행위는 언어보다 선행한다. 어린이는 말할 수 있기 전에 사물을 보며 인식하게 된다(존 버거, 『이미지』). 본다는 것은 무엇보다 가장 우선하는 감각이다. 사람은 보기를 원한다. 보는 것에 대한 배고픔은 끊임없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야구를 보고, 미술품을 감상한다. 나는 얀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커다란 맑은 눈,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가느다란 치아, 약간 호기심을 가진 듯 슬퍼 보이는 표정, 몇 백 년이라는 시공을 거슬러 지금 내게 온 저 소녀는 앞으로도 보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보는 것’이 언어보다 선행한다는 것에는 보는 것이 단순한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봄’으로써 우리는 세계에서 우리들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 언어 이전에 세계를 보고, 세계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는 것이다.

소리가 열차를 끌고 간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이 밤을 끌고 간다

칸칸이 불을 밝히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소리에 글려 구불구불 미끄러지는 열차

나는 얌전한 소리의 입자처럼 앉아서

창밖을 내다본다

강을 지나는지 소리가 더욱 거세어지고

푸른 밤하늘 위에

열차의 내부가 환하게 떠있다

멀리 가로등이 흘러가는 야경 위에

곁에 앉은 젊은 여인의 얼굴이 겹쳐진다

소리가 문득 사라진다

옛날에 잊어버린

젖은 이름 하나가 비눗방울처럼

밤하늘에 켜졌다가 사라진다.

- 강인한, 「밤의 메트로」

시․청․후․미․촉 오감이 있지만, 가장 강한 것은 시각이다. 그래서 이미지화하게 되면 시각화한다고 인식한다. 보는 것은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멀리에서 가까이로, 가까이에서 멀리로 이동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진행하는 도중 청각이 끼어든다. 감각으로 이미지화함으로써 시인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다.

화자는 강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청각조차 시각(‘얌전한 소리의 입자처럼 앉아서’)으로 인식한다. 멀리 열차가 지나간다. 환한 불을 켜고 강 위를 지나는 중이다. 그 열차에 젊은 여인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잊어버린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지금은 헤어진,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구구절절 스며든다. 시인은 시각을 통해서 청각을 불러오며, 감각을 통해 언어를 직조한다. 이러한 감각을 통하여 시는 아름다운 무늬로 다시 태어난다.

2. 촉각

구스타프 클림트의 저 유명한 그림 ‘키스’를 기억한다. 황금색 의상을 걸치고 눈을 감은 여인의 얼굴을 감싸 쥔 채 점점 더 입술을 향해 가는 남자. 전혀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남자가 가고 있는 곳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그의 입술은 여자의 입술에 포개지고 살짝 열린 입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혀는 입 안 구석구석을 탐색할 것이고, 남자의 어깨에 매달린 여자는 서서히 무너져 굳게 닫았던 빗장을 열 것이다. 남녀는 서로의 빈 곳을 향하여 맹렬하게 돌진하는 중이다. 이렇듯, 사랑의 감정은 시각이나 청각에서 출발하지만 촉각으로 완성된다.

신체기관 중 ‘눈’이 가장 예민하지만 실제로는 ‘피부’가 가장 감각적이다. 눈을 잃으면 나중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 촉각이므로 촉각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나무들이 숨은 눈을 뜨는 장면은 오래전에 읽었던 동화가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미래는 시간의 이동에 의한 게 아니라 시간의 소멸에 의한 잠정적 결론, 너의 문 안에서 나는 모든 사랑이 체험하는 종말의 예언을 저작한다 너는 내 혀에서 음악과 시의 법칙을 섭취하려 든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 든다 그러니까 이 키스는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이다 너의 문은 나의 키스에 의해 열리고 나의 키스에 의해 영원히 닫힌다 나는 너의 마지막 남자다 그러나 네게 나는 최초의 남자다

- 강정, 「키스」, 부분

이 시에서 ‘키스’는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키스를 함으로써 세상은 다시 한 번 열린다. 키스하기 이전과 키스하고 난 이후의 세계로 구분할 수 있다. 키스 이전의 생이 어릴 적이라면 키스 이후의 생은 어른으로 인식된다. 키스는 서로의 깊은 내면을 의미한다.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각기 다른 과정을 통해 살아온 과거를 함축한다. 그래서 ‘너의 문은 나의 키스에 의해 열리고 나의 키스에 의해 영원히 닫’히는 것이다. 시의 화자는 키스로 폭발하여 축축한 허공과 만나 하나의 전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 날카로운 키스를 나누는 ‘너’와 ‘나’는 미립자이고 전부이다. 이들이 키스하는 순간, ‘푸른 빛과 노란 빛이 섞’인 비가 내리고 나무들이 눈을 뜨는 동화가 실현된다.

생각해보라. 첫 키스의 설렘과 감촉을, 어떤 사람을 처음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며, 나를 그 안에 가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키스는 황홀하지만 역겨운 구취를 동반한다. 다만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

사랑이 끝나면 사랑했던 시간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 다가온다. 모든 사랑은 독을 품고 있다. 키스는 독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며, 내 몸의 독을 상대방과 나누는 행위이다. 키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촉감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촉감이 살아있는 시를 쓸 필요가 있다. 되도록 많이 살려야 생생하고 쫄깃쫄깃한 시가 된다.

3. 후각

어떤 사람이 제비꽃에서는 레몬과 벨벳에 담갔던 각설탕을 태운 듯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다이앤 애커먼, 『감각의 박물학』).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제비꽃을 아주 좋아해서, 조세핀은 제비꽃향이 나는 향수를 자주 뿌렸고, 그녀가 죽었을 때 나폴레옹은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제비꽃을 꺾어 로켓에 넣은 다음 죽을 때까지 그것을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한다. 제비꽃을 가지고 설탕에 절여먹는 요리가 있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눈으로 보고 맛으로 느끼며,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는 사실!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상상! 꽃을 무쳐먹는다는 것은 오감을 자극하는 일이다. 시야말로 오감을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감각 중에 가장 직접적인 것은 후각이다.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것이 왜 그럴까. 인간은 후각이 발달한 동물이어서, 다른 감각보다 후각이 더 생생하고 예민하다고 한다. 아기가 냄새를 통해 엄마를 지각하듯이,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은 후각을 통해서 전달된다.

두개의 발이 허공을 두드린다

질겨진 가죽은 둥둥 두둥둥

북을 쳐대고

졸아붙은 새 가슴

벌떡벌떡 재주를 넘어보고

훌쩍이는 눈물콧물

천지를 집어 삼킬 듯

어설픈 고요를 깨부수고

번쩍 눈을 뜨는 형광등으로

줄기차게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는

게걸스레 산을 먹어 치우고

난데없이 늘어선 꽃내음

뭉글뭉글 달려드는 안개 안개

꽃 안개가

한치 앞을 모르고 가로 지른다

순간

어룽진 섶 다리 난간에

어룽어룽 소스라치는

그림자

땅 속에서

땅 속에서

지금도 살아있는 온달바보

바보온달

- 김기리, 「세월 속에서」

이 시에는 시각(‘게걸스럽게 산을 먹어 치우고’), 청각(‘굵은 빗줄기’), 촉각(‘뭉글뭉글 달려드는 안개’), 미각(‘먹어 치우고’), 후각(‘늘어선 꽃내음’) 등 여러 가지 감각이 뒤섞여있다. 그만큼 정제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표현이 현란하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시에서, 주제, 이미지, 운율, 함축 등등 어느 하나라도 강렬해야 존재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는, 이미지가 단연 앞서는 것을 알 수 있고, 그중에서도 후각이 가장 먼저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성공한 시인가? 내가 보기에 이 시는 ‘가능성’ 면에서 열려있다. 제목(「세월 속에서」)에서 암시하듯이 회고적 정서가 주조를 이룸으로써, 완성작에 가깝지 않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더 힘이 있다. 화자는 지독한 회한에 싸인 평강공주처럼 ‘땅 속에서/ 지금도 살아있는 온달바보/ 바보온달’라고 중얼거린다. 무언가 가슴을 쿵, 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다. 다만 그것은 세월에 맡길 뿐이다.

'문학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 용어  (0) 2012.09.19
순우리말 사전  (0) 2012.05.15
현존과 부재의 틈에 관한 은유  (0) 2012.04.10
미세한 시인의 눈  (0) 2012.04.10
해석하는 주체에서 반응하는 신체로  (0) 2012.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