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해석하는 주체에서 반응하는 신체로

아리박 2012. 4. 10. 13:24

「해석하는 주체에서 반응하는 신체로」

장은수|문학평론가

지금 한국시는 한낮의 언어로 씌어지고 있다. 세계의 질서와 자아의 구조가 서로를 닮으려 하면서 빚어낸 서정적 환각은 거의 종말을 고했다. 동시에 시를 통해 나쁜 세계를 성찰하고 미래를 계획해 보려는 서사적 기획도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 또 일상의 압도적 폭력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는 자아의 비루함을 고백하고 주체를 재구축해 보려는 이성적 시도 역시 거의 완벽한 파산을 맞았다. 그러나 이 모든 좌절과 실패, 탄식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한국시는 지금 낯선 언어의 유례없는 풍요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시’라는 관념론에 사로잡히는 대신에 ‘언어’라는 유물론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시적 움직임 앞에서 우리는 단숨에 혼란에 빠졌으며(도대체 이런 게 시란 말인가!), 그 물결에 휩쓸려 허우적대고 있다(이걸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해부하여 재구축하고, 어떻게 읽어서 비판하며, 무슨 이름을 붙여 입에 올리든지 상관없이 지난 십 년간의 한국시는 이들을 괄호 치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이제 한국시는 밤의 고요 속에서 성숙한 성찰의 언어로 씌어지지 않는다. 지난 백 년 동안 한국시를 지배해 왔던, 언어의 표층 아래에 의미의 심층을 심으려는 구조적 운동이나 최소 언어로 최대 의미를 담으려는 언어 경제학적 운동은 이제 그 에너지를 모조리 소진한 채 갈 길을 잃고 멈추었다. 이들을 위한 비평 언어들이 수없이 쏟아지지만 거기에서 현대를 발견하고 미래를 예감해 보려는 시도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신 넘쳐나는 것은 ‘시’라는 오랜 습관에 의지한 지겹고 지루한 동어반복의 담론들이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심층을 벗어던지고 표면으로 언어를 미끄러뜨리는, 어떠한 경제도 없이 언어적 과잉과 잉여를 뽐내는 시들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이런 시들은 눈부신 햇빛 아래에서 씌어진다. 정오에 모든 목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왁자글왁자글 웅성거리는 거리 축제의 언어로, 목소리를 가진 모든 주체들이 자신의 고유한 표지를 벗어던지고 동시에 소리를 지르는 지독한 소음의 언어로 씌어진다.
가령, 김 언의 시는 예전에 심층이라고 믿었던 언어에 대한 지독한 성찰이 그대로 밀고 올라와 표층을 이룬다. 시와 시론을 끝끝내 분리하고 시론의 언어적 상관물을 구축하려 했던 김춘수적 시도는 그의 시 앞에서 순식간에 무력화된다. 김행숙의 시는 이 시대 연애시의 높은 절정이지만 그 연애에는 주체를 나타내는 고유한 표지인 얼굴이 없다. 서동욱의 표현을 빌리면, 얼굴 대신 ‘고기’가 사랑을 한다. 특정하게 고정된 ‘나’와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비인칭 또는 익명의 존재가 매번 새로운 존재로 만나 그때그때 사랑을 노는 것이다. 유형진의 시는 문명의 흔적을 온몸에 새긴 주체가 지배적인 목소리를 내는 듯 보이지만 이하석 등의 시와는 달리 문명/자연과 같은 낡은 이항대립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시는 순간순간 다른 주체들이 끼어들어 연신 고함을 질러대면서 하울링 현상이 나타나는 소리의 난장을 제공한다.
한낮의 언어로 씌어진 시에서는, 시인이 시적 사건을 쓰는 게 아니라 어떤 사건, 그러니까 언어가 갑자기 넘쳐흘러 시처럼 보이는 그 사건이 시적 주체를 쓴다. 시인은 더 이상 시적 언어의 의미를 최종 심급에서 보증하는 ‘큰 목소리’로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은 사건에 관여된 수많은 목소리들이 겹쳐진 채로 한꺼번에 나타나는 어떤 장소 또는 위치로 표시된다. 그러니 서정적 자아니 시적 주체니 하는 것들은 더 이상 조그마한 가치조차도 없다.
그렇다면 독자는 어떨까? 그 사전적 정의와는 상관없이 독자는 이제 더 이상 시를 ‘읽는’ 사람이 아니다. ‘읽다’라는 동사는 시의 구조를 들여다보고, 시의 언어를 분석하며, 비유나 상징을 발견하고, 그 모든 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어떤 행위로서 흔히 상상된다. 그러나 한낮의 언어로 씌어진 시들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소음’을 그 고유성으로 하는 이 시들은 의미의 실현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의미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가로막는 데다 본래부터 해석학적 시선이 들어설 만한 깊이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눈에서 뇌로 직접 파고들어 머릿속에서 갑자기 출현했다 사라지고, 그것과 마주치는 신체들에 어떤 반응(예를 들면 웃음, 울음, 찡그림, 구역질, 갸우뚱 등과 같은)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제 시는 해석하는 주체의 놀이터가 아니다. 사실 시에는 해석할 만한 것은 단 한 줄도 없다. 오히려 시인은 철저한 리얼리스트이다. 그는 비유하거나 상징하거나 알레고리화하지 않는다. 그는 언어 뒤에 감추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보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그릴 뿐이다. 그 언어가 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자아나 세계의 이면에 있는 어떤 특별한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일상성에 오염된 언어를 일부러 비틀어서 보여 주기 때문이 아니다. 언어가 더렵혀지다니, 정말 이상한 생각이 아닌가.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언어를 더럽힌단 말인가. 그렇다면 언어를 정화하는 것은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가능하며, 그것이 정화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시의 리얼리즘은 바깥의 실체나 감추어진 질서를 반영하는 낡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감각’의 리얼리즘이다.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은 그것이 세계의 은밀하게 작동하는 폭력성을 드러내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굴이란 본래 그렇게 고기의 형태로, 온갖 힘에 의해 끊임없이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형태로, 단 한 순간도 고정되지 않는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에 포착된 사건들도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심층을 들여다보고 그 이면을 끄집어내고 그 의미를 읽으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반응해야 한다.
한낮의 언어로 씌어진 시들은 더 이상 해석하는 주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반응하는 신체를 요청한다. 지난 세기에 강정이나 이원의 시를 통해 나는 이미 이러한 시대의 도래를 예감해 왔다. 우리는 시를 ‘읽으면서’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놀라거나 얼굴을 찌푸리거나 집어 던지거나 외우거나 다른 시를 짓거나 하는 등등의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 뿐이다. 좋은 시(만약에 이런 게 있기만 하다면)는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잘 반응하는 신체를 자신의 친구로 불러들인다. 아니, 읽는 신체로 하여금 잘 반응하게 할 때에만 비로소 좋은 시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근 한국시에, 좋든 나쁘든 간에, 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시들을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술이란 분란의 형태로만 제대로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소음으로 가득한, 한낮의 언어로 씌어진 시들을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제 시는 언어의 새로운 도전일 뿐만 아니라 읽는 신체들의 새로운 도전도 요구하는 것이다.

* 장은수 , 「해석하는 주체에서 반응하는 신체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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