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스크랩] 시 창작 이론 1

아리박 2009. 8. 4. 13:20

 

시창작이론1

1.시와 시의 언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지금까지 시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내려졌으나 완벽한 정의는 나오지 않았다. 원래 시의 정의는 나올 수도 없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시는 이미 의미가 없는 것이요 발전이란 것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대에 따라 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시 자체도 변모하기 때문이다.

편의상 시는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 뜻을 말로 나타낸 것이라는 정의에서 출발해 보자. '시언지(詩言志)'라는 이 정의는 동양의 전통적인 시관(詩觀)으로 오랫동안 통용되어 왔다. 먼저 뜻을 보자. 문학을 정의할 때 '가치 있는 체험을 내용으로 한다'고 하니, 시에서의 뜻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표현하지 않고는 못배길 절실한 그 무엇이 여기서의 뜻이라고 하겠다.

이번에는 뜻을 전달하는 '말'에 주목해 보자. 문학이 언어 예술이므로 시에서의 말도 제재(題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경우에 있어서 언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가 하면 시의 형태도 소설이나 희곡과는 다르다. 짧고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짧고 압축된 형태의 문학이면 모두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절제(節制)된 언어의 질서가 어떤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이처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해명해야 할 과제가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에 대한 부당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좋다. 시는 아름다워야만 한다든가, 고상한 세계를 노래해야만 한다든가, 시는 일상 생활에서는 쓸모가 없다든가 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는 것이 시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시의 언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알아보자. 언어를 매개로 하는 문학 중에서도 가장 언어에 민감한 갈래가 시이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정서·사상 등을 제한된 형식과 언어 속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어(詩語)의 선택에 각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역사적·사회적으로 형성된 관습적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즉 언어는 어떤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記號)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의 이와 같은 기능은 필수적이다. 이처럼 지시적 기능(指示的機能)을 가진 언어의 의미를 외연적(外延的) 의미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어로 채택된 언어는 외연적 의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시어는 관습적인 때가 벗겨진,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의미의 언어이어야만 한다.

고향(故鄕)은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意味)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선(線)을 그어 보라.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선(線)의 의미(意味)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絶望)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
그 무한한 안정(安定)에 싸여.
들길을 간다.
(이형기, '들길')

이 시에는 들길을 걸어가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시를 읽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가 삶에 지쳐 귀향(歸鄕)길에 오른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 고향이란 그 누구에게나 안식과 평화를 베풀어 주는 따뜻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된다.
따라서, 시의 제목인 '들길'은 바로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에는 물론 삶에 실패하여 빈손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화자의 궁핍한 심정이 암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화자의 가난한 귀향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자기를 성찰(省察)함으로써 얻게 된 정신의 충만함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가난했으므로 참다운 고향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속적인 만족과 쾌락이란 덧없고 허망하다는 것, 참된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상의 설명은, 물론 시인이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전체 의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전체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좀더 긴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시를 설명 혹은 분석하는 일은 일상적인 언어 행위인데 반해, 시 그 자체는 일상어를 초월한 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일상어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이 시적인 진실, 즉 궁핍한 귀향자가 들길을 가며 깨달은 생(生)의 진실을 한 마디로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 선(線)을 그어 보라. /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 선(線)의 의미(意味)'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창조한 언어, 즉 시의 언어라 할 수 있다. 다음을 보자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본래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은 서울에 있는 한 지역의 구체적인 지명이다. 번지란 땅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1행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겼다는 것은 원래 자연이었던 곳에 인간의 주택지가 인위적으로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2행에서는 자연인 그 산에 살던 비둘기만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1행과 2행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 구조(對立構造)로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1행의 번지는 문명을, 2행의 번지는 자연적 삶의 터전을 뜻하게 된다. 이처럼 시어는 언어의 지시적 의미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를 함축적(含蓄的), 또는 내포적(內包的) 의미라고 한다.
지시적이고 객관적인 외연적 의미에서 암시적(暗示的)이고 주관적인 내포적 의미로 확대되어 가면서 시어는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리고 시어가 하나의 의미로 포착되지 않고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때 오히려 시의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산(山)에
산(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 '산유화(山有花)'의 2연)

이 시에서 '저만치'의 뜻은 무엇일까? 우선 어떤 거리를 지시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몇 미터라고 해석될 수는 없다. 전체적 문맥으로 보아 꽃이 저기, 저 쪽에서 피어 있다는 의미에서 거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저만치'는 시인이 꽃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심정적(心情的) 거리감으로 해석되어도 좋다. 그런가 하면 '저만치'는 '저렇게' 또는 '저와 같이'로 어떤 상태나 정황(情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산에서 피는 꽃은 저렇게 외로이 피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만치'를 거리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상태나 정황으로 해석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상승 작용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저만치'의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한 단어 또는 한 문장 구조 속에 두 개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를 일러 언어의 다의성(多義性), 또는 모호성(模糊性)이라 한다. 이것은 문학, 특히 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2.시와 서정

시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서정성(抒情性)이다.전통적인 시에서부터 오늘날의 실험시에 이르기까지, 작품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시는 산문(散文)과 달리 어느 정도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서정성이란 대상을 의미나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감정이나 느낌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것은 음악의 세계와 매우
유사하다. 음악에서는 직접적이거나 분명한 의미, 혹은 개념의 전달이 없다. 다만, 소리의 변화가 주는 감각적인 분위기와 느낌이 어떤 감정을 유발시키고, 청자(聽者)는 자신의 주관을 통해 그 의미를 상상할 따름이다.

시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음악이 소리를 통하여 어떤 대상을 이해한다면, 시는 소리가 포함된 언어를 통해 대상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적인 요소이다. 산문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만, 시는 주관적 혹은 감정적으로
느끼는 언어인 것이다. 나아가 시에서는 대상과 주관이 아예 하나로 융합되거나 결합된다.때로 인간에게는 감정적(感情的)인 의미가 이지적(理智的)인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경우도 많다. 이에 따라, 언어를 이지적인 의미를 지향하는 것과 감정적인 의미를 지향하는 것의 두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전자를 산문의 언어, 후자를 시의 언어라고 부른다. 산문의 언어가 중시하는 것은 이지적인 의미, 즉 외연적(外延的)인 의미이며, 시의 언어가 중시하는 것은 감정적인 의미, 즉 내포적(內包的) 의미이다.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招魂)'에서)

이 시에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는 무슨 뜻일까? 먼저, '돌'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의 전체적인 문맥으로 볼 때, 여기서의 '돌'은 '바위의 조각으로 모래보다 큰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 즉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돌'이 가진 한 부분의 속성만을 확대하여 '붙박이로 자리를 지키는 존재'라는 내포적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이는 곧 님에 대한 시적 화자의 변치 않는 사랑이 형상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이 관심을 가진 것은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연유된 자신의 슬프고 허무한 감정 그 자체의 형상화(形象化)이다. 이처럼 감정의 표현은 문학, 특히 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3. 이미지와 수사

시어의 생명은 객관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함축적인 의미에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는 논리적 분석의 대상만은 아니다.
문학 일반이 그렇듯 시는 독자에게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독자는 이를 통해 시적 체험(詩的體驗)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 절실하게 느꼈던 체험이나 감각을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제재인 언어를 통해 그것을 감각화(感覺化)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감정이나 사상이 감각과 통일되어 나타난 것이다.독자들은 누구나 여러 가지 감각 기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를 통한 환기(喚起)가 가능한 것이다. 예컨대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고 했을 때 '소리'라는 청각과 '푸른'이라는 시각의 두 이미지가 합쳐져 있다. 이것을 공감각(共感覺)적 이미지라고도 하는데, 보이지 않고 들리기만 하는 종소리를 보이는 대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는 시의 회화성(繪畵性) 획득에 크게 기여한다.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이 시의 주된 정서는 '설움'이다. 그러나 그 정서는 '서럽다'는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제삿날 큰 집의 불빛', '해질녘 가을 강', '사랑 끝
울음', '소리 죽은 가을 강' 등의 이미지들이 모여 만들어 낸 정서다.특히, 공감각적(共感覺的) 표현인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울음(청각)'과 '타는(시각)'이 만나, '설움'의 정서는 한층 선명해지고, 동시에 심화되고 있다. 이처럼 직설적, 추상적인 어법을 피하고 감각적인 표현을 지향할 때, 시는 보다 참신하고 풍요로운 예술적 형상화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새로운 의미, 새로운 이미지를 얻기 위해 비유의 방법을 동원한다. 비유의 방법이 가능한 것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유사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전혀 닮아 보이지 않는 두 사물 사이에서도 공통점을 찾아 내기도 한다.이 공통점을 시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그 방식에 따라 직유(直喩)·은유(隱喩)·의인(擬人)·제유(提喩)·환유법(換喩法)등의 비유법이 성립하게 된다.

스스로의 생명을 키워

그 생명을 다 하기 위하여

빛 있는 곳으로 가지를 늘여

잎을 펴고
빛을 모아 꽃을 피우듯이
추운 이 겨울날
나는 나의 빛을 찬아 모아
스스로의 생명을 덥히고
그 생명을 늘여
환한 그 내일을 열어 가리.
(조병화, '난(蘭)')

이 시에서 '빛'은 시 전편에 반복되어 나타남으로써 시인 자신의 어떤 관념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상징적 차원에 있다. 이 시의 화자인
'나'는 단순히 '빛을 찾아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보조 관념인 '빛'은 자연스럽게 원관념인 '이상, 희망, 혹은 이념' 등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이처럼 상징이란 가시(可視)의 세계, 곧 물질 세계가 연상의 힘에 의하여 시인의 관념인 불가시(不可視)의 세계, 곧 정신 세계를 드러내는 표현 양식이다



4. 운율과 시짓기

서정시의 본질은 언어의 유기적(有機的) 조직을 통해 의미와 음악의 통일을 이루어내는 데 있다. 이 때 시의 음악성, 곧 가락(리듬)을
가리켜 운율이라고 한다. 음악이 시간 예술이며, 음의 고저장단(高低長短)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듯이 운율 역시 운율 요소들의 규칙적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규칙적 반복은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일정한 의미를 지닌 조화로운 형식이다. 운율이 조화로운 질서임을 구체적 예를 통해 알아보자.

괴나리 / 봇짐을 / 짊어지고 //
아리랑 / 고개로 / 넘어간다 //
아버지 / 어머니 / 어서오소 //
북간도 / 벌판이 / 좋다더라 //

('신아리랑'에서)

이 민요는 3마디가 1행을 이루고 있고, 이러한 행이 반복되어 1연을 이루고 있다. 1마디를 1걸음으로 치면 3걸음이 1행을 이룬다. 이
걸음은 소리의 걸음이기 때문에 음보(音步, foot)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위의 민요는 3음보 가락으로 되어 있다.우리 나라의 시는 대부분 3음보와 4음보의 가락으로 되어 있다. 민요와 현대시에는 3음보와 4음보가 두루 쓰이고, 고려 가요에는 3음보가 많으며, 시조(時調)와 가사(歌辭)는 모두 4음보로 되어 있다.

다시 위의 민요를 보면 1음보의 글자 수가 3자와 4자로 되어 있다. 즉, 3·3·4 // 3·3·4 // 의 규칙적 반복인 것이다. 그러면서
3·3·3으로 하지 않고 3·3·4로 변화를 주면서도 뒤의 글자수가 한 자가 많은 4자여서 전체적인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처럼 운율은 규칙적 반복과 변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강(秋江)에 / 밤이 드니∨물결이 / 차노뫼라 //
낙시 / 드리치니∨고기 아니 / 무노ㅁ라 //
무심(無心)한 / 달빗만 싯고∨빈 배 저어 / 오노라 //

(월산대군(月山大君)

이 평시조는 4음보로 된 1행이 3번 반복되어 있다. 그러나 글자 수조차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3·4·3·4 // 2·4·4·4 // 3·5·4·3으로 3·4를 중심으로 가감(加減)되고 있다. 평시조는 4음보의 규칙적 반복이 외형적으로 틀이 잡혀 있는 시이므로 정형시(定型詩)에 속한다. 그리고 운율이 겉으로 드러나 있으므로 외재율(外在律)에 속한다.

해야 / 솟아라. // 해야 / 솟아라. /// 말갛게 / 씻은 얼굴 // 고운 해야 / 솟아라./
산 너머 / 산 너머서 // 어둠을 / 살라먹고, /// 산 너머서 / 밤새도록 // 어둠을 /
살라먹고, /// 이글이글 / 앳된 얼굴 // 고운 해야 / 솟아라

(박두진, '해'에서)

이 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산문(散文)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호흡 단위로 율독(律讀)하면 4음보의 가락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운율이 겉으로 틀 지어져 있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 속에 내포되어 있으므로 자유시라 하고, 그 운율은 내재율(內在律)이라 한다.

시의 운율에는 음수율(音數律), 음위율(音位律), 음성률(音聲律)등도 있다. 음수율은 글자수의 정형성을 말하는데 우리 나라 시의 기본적인 음수율은 주로 3·4조나 4·4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음위율은 압운법(押韻法)을 말하는 것으로, 한시(漢詩)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음성률은 음의 고저 강약(高低强弱)에 의존하는 것이다.

운율의 요소로는 이 외에 음성 상징(音聲象徵), 의성어(擬聲語), 반복과 병렬등이 있으며, 행·연 등의 시의 형태도 운율과 관계가 있다. 음성 상징은 음색(音色)과 음상(音相)을 이용한다. 예컨대 발자국 소리를 '자박자박'이라고 표현하는 경우와 '저벅저벅'으로 하는 경우의 음성 상징은 서로 같지 않다. 전자처럼 양모음(陽母音)을 쓸 경우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지만, 음모음(陰母音)을 쓸 경우 어둡고 둔중(鈍重)한 느낌을 준다.

또 ㄴ·ㄹ·ㅁ·ㅇ과 같은 자음과, 모음과 모음 사이에 발음되는 ㅂ·ㄷ·ㅈ의 음도 즐겁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김영랑의 시 구절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과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의성어는 소리를 모방한 것으로, 실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삐이 뱃종 뱃종! / 하는 놈도 있고박두진의 '사슴'에서와 같은 것이다. 반복의 경우는 앞의 박두진의 '해'에서 잘 볼 수 있으며 병렬은 한시의 대구(對句)에서 잘 나타나 있다.

시를 공부하면서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은, 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및 분석과 창작하는 일의 선후 관계이다. 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나 분석은 이론의 문제일 터이고 창작은 직접 써 보는 일이 되는 셈인데, 무엇을 먼저 공부해야 옳은가 하는 문제는 당연한 물음이 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몇 편의 시를 창작 혹은 분석해 보고 기쁨을 얻게 되면 대부분은 시를 많이 아는 양 우쭐거려 보기도 하고 마치 시인이 된 양 자찬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시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며, 시인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시를 가장 모를 때라고 한다면 오히려 옳은 말일 것이다. 조금 알고 있음에 만족하고 그치는 경우, 그 편협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시의 세계를 그릇되게 인식하고 심지어 시의 본질까지도 왜곡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문자 언어를 매개체로 하는 예술인 경우에 꼭 필요한 말로, '이해할 수 없으면 쓰지도 못 하고, 쓸 수 없으면 이해할 수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론과 실제의 조화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글 공부를 위해서는 '이해하지 못 하면 쓸 수 없다'는 말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시 짓기를 위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밟다 보면 짓기를 사사롭게 시도하지 않으며, 지으면서 그 과정 속에서 얻은 것을
조심스럽게 적용하려 할 것이다. 이에 널리 알려진 시를 분석하는 요령을 네 가지 차원에서 알아 보고자 한다.



5. 제목에 관심을 가져라

제목을 사람으로 말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간파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제목을
보면 그 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제목이 '무제'인 경우를 접하게 되면 독자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말 그대로 제목 '題'이 없다 '無'는 의미일텐데, 제목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제목으로 선택한 의도가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역설적 의미를 담은 것일 수도 있겠고, 내용 자체가 제목이 없는 것에 대한 내용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제목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거나 그저 무성의한 제목 붙이기에 다름 아닐 수도 있겠다.

이렇게 다양한 내용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은 풍부하게 정서를 환기시킬 수 있지 않겠나 하겠지만 그만큼 애매할 수도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제목부터 애매한 시는 결국 애매한 시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용 없는 시가 어디 있겠는가?

파도에 휩쓸려도
산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돌멩이가 되리라.

새싹이 돋아나고
태양이 다시 떠오르 듯
이제
웅덩이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리라.

기적 소리를 멀리하고 떠나가는
열차의 바퀴에 치어
가늘게 떨고 있는 손가락의 기억을
잊을 수 있는
하얀 새가 되리라.

(고교생 작품, '무제')

위에 제시된 시는 제목 '무제'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세 가지의 되고 싶은 존재가 연결 고리없이 흩어진 채 끝맺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무제'라는 제목을 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그러나 제목은 시가 갖고 있는 내용을 어떤방식으로든지 암시해 주어야 한다. 제목도 시의 일부이다. 유치환의 '깃발'은 이를 잘 드러내준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시의 본문에서는 '이것은'으로 제목 '깃발'을 지시해 놓고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 '애수(哀愁)',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고 은유되어 있다. 제목을 뺀 본문에는 '깃발'이라는 시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서 제목 '깃발'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위에 열거된 비유의 원관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이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제1연)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박두진, '해' 제 1, 2연)

이 시들은 제목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을 형상화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해'인 만큼 '해야 솟아라'는 표현은 광명의 세계를
추구하는 내용일 테고,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역시 촛불을 켜야 할 어둠의 시간을 거절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같은
내용을 암시하는 제목이다.



6. 시어의 이미지를 활용하라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상상력, 표현 기법, 율격, 어조, 이미지 등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미지는 시가 압축을 생명으로 삼는 문학이면서도 구체성을 잃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어(詩語)란 시에만 쓰이는 특별한 언어가 아니라, 일상적 언어가 시 작품의 재료로 선택될 때 이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시어와
일상적 언어는 다른 점이 있다. 일상적 언어는 언어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이 사전적 의미로 국한되지만 시어는 언어 기호가 갖는
자체의 의미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연상되는 내용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의미이다.

흔히 말하는 직유니 은유니 상징이니 하는 표현 기법은 시어가 일상어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앞에서 언급한 '해'의
경우 '해'를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는 밝음, 정열, 희망 등이다. '어둠을 살라 먹고 ∼ 해야 솟아라'를 반복하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밝은 세계로 향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일 것은 당연하다. 유치환의 '일월(日月)'을 보면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유치환, '일월(日月)' 제 1연)

제목부터 '해와 달'로 설정되면서, 제 1연에서는 '내가 가는 곳 어디인들 밝은 대낮이 없을 소냐(있을 것이다)'하여 '밝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읊었다. 같은 시인의 다른 작품을 보자.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중략)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 '바위')

이 작품은 '바위'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죽은 뒤에 산에 있는 바윗 덩어리로 환생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위가 가지고 있는 단단하면서도 불감부동(不感不動)의 이미지를 지닌 그 속성을 닮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 해', '바위'는 두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어들이다. 어떤 작품이든지 핵심 시어는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대개는 작품의
제재(題材)가 되는데 이 제재에 대한 이미지를 통하여 내용 분석을 시도하면 70% 정도는 작가가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시의 흐름이 어떤 방향이냐에 따라 시어의 이미지는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생사(生死
춘산(春山)에 눈 녹일 바람
어제 불고 간 데 없다.
그 바람 불어야
이 언덕 파릇파릇 새싹 돋아

두 작품의 '바람'은 어떠한가. 전자는 '잎새를 흔들리게 하는 바람'으로 나를 괴롭게 할 정도라면 외부적 시련의 이미지로 적당하다.
그러나 후자는 눈을 녹이고 새싹을 돋게 만드는 '바람'이니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바람'이 아닌가. 이와같이 같은 시어라도 시적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은 시어로서 선택된 일상어의 흥미로운 여행이다.

' 밤(夜)'은 어둠의 속성으로 부정적 현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붓한 공간을 제시해주는 포근한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눈(雪)'은 추위와 관련되는 속성으로 고통, 시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랑의 매개체나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일러 일반적 이미지 혹은 보편적 이미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보편성을 떠난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하는 만큼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7. 시어 선택과 작가 의도 파악하기

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시를 통하여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다.작가의 의도를 독자가 알아차린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도 기쁜 일이다.

그러면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시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 내려고 했는가 하는 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여기에서 '무엇'은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對象)'일 것이며, '어떻게'는 '표현 기법'일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데, 어떤 언어를 사용하여 이를 대치(代置)시키고 있으며, 대신한 그 나름대로의 표현 기법에 의하여
어떠한 의미로 환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아차리는 일이 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작가의 창작 의도에 대한 깊이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나의 눈높이를 맞추고 그 지점에서 대상과 다듬어진 시구(詩句)를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원리이다. 이에 대한 쉬운 이해는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김소월, '길' 제 1연)

'갈 길을 잃은 나그네의 비애(悲哀)'를 주제로 한 김소월 시 '길'의 첫 연이다. 여기에서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 압도하는 시어는
'가마귀'이다. '가마귀'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모진 신세나 어두운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작가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만약
선택된 시어가 '가마귀'가 아니고 '참새'였다면 이 시는 어떤 모습일까?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참새 짹짹 울며 새었소.

이와 같은 모습일 텐데, 분위기는 너무나 달라진다. 작가 자신의 길 잃은 나그네로서의 모습을 형상화시키기에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일 뿐이다. '참새'가 아니고 '까치', '종달새' 등의 다른 새였다 해도 '가마귀'가 드러내는 분위기만큼의 정서는 표현해내지 못 할
것이다. 즉 어두운 분위기를 위해서는 가장 잘 선택된 시어라고 여겨진다. 박목월의 시 '청노루'를 보자.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살펴 보아야 할 핵심 소재(제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청노루'다.

시의 유기적 구성을 위해 동원된 시어가 모두 자연물이라면 그 중에는 유일하게 동물로 선택된 '청노루'가 있다 작가는 거기에 이 시의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 뻔하다. 작가의 깊은 마음을 이러한 식으로 헤아렸다면 '청노루'라는 제재를 가운데 두고 해석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그런데 우리에게 의심스러운 것은 청(靑), 즉 푸른 색깔의 노루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노루는 송아지처럼 누런 색깔일 뿐이다.

그럼 이 시를 '황노루 / 맑은 눈에 // 도는 / 구름'이라고 시어를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이 시가 주는 이미지는 신선함이
아니라 칙칙함이다. 이렇게 되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한 신선한 봄, 아름다운 봄의 이미지는 본래의 의도와 벗어나게 되는 실패작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작가는 실재(實在)하지도 않는 '청노루'라는 시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시어의 선택면에서 '청노루'와는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개나리'라는 시를 한번 읽어보자.

샛노란 얼굴빛으로
앙증스런 눈웃음으로
너의 가여린 몸짓은
이 봄날을 위해
고스란히 탄생되었고……

티없이 맑은 하늘을 우러러
대지의 언 가슴을 녹이는
너의 기도는
무언의 고독으로 떨고 있구나

오늘쯤 나는
너를 만나러 가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다

개나리 화관을 머리에 이고
개나리 목걸이를 목에다 걸고
개나리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나풀나풀 날개짓으로
너를 만나고 싶다

노오란 꽃잎이 먼저 스러져야만
연두빛 잎사귀가 트이는
너의 엇갈린 슬픈 사연을 듣고 싶다

나의 빈 가슴 하나 가득
너를 부비고
온통 싱그러운 마음으로
돌아오고 싶다.

(김영실, '개나리'(주부 백일장 시부문 장원작))

이 시는 '청노루'에서처럼 작가의 의도적 시어 선택이 흔적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나리'에서도 '청노루'를 해석하는 방법은 똑같이 통할 것 같다. 즉 시 전체를 통하여 가장 특징적인 시어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나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나리'를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눈길보다도 '나비'의 시선이 더욱 정확하고 예리할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음직하다. 그리하여 '오늘쯤 나는 / 너를 만나러 가는 / 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었던 것이며, '노오란 꽃망울이 먼저 스러져야만
/ 연두빛 잎사귀가 트이는' 개나리의 '엇갈린 슬픈 사연을'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정확한 관찰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작가는 여섯 연으로 이루어진 '개나리'전 편을 통하여 3연에만 단 한 번의 '나비'를 등장시키고 있어 핵심 시어의 절제면에서도 무척이나 돋보인다.



8. 서정적 자아의 위치 확인하기

시나 소설이 자서전이나 수필 등의 글과 다른 이유로는 서술자의 실체 문제를 들 수 있다. 자서전이나 수필 같은 글의 경우 서술자인
'나'는 곧 작가이다. 그러나 시나 소설의 경우 서술자는 곧 작가라는 등식을 곧이 곧대로 믿어버리면 크나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소설 작품에서 한 작가가 서술자로 하여금 성행위를 하는 표현을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고 가정할 경우, 서술자는 곧 작가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게 되면 그 작가의 가정(家庭)은 곧바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내용이 이성(異性)과 이별한 뒤에 오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작가의 경험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작가를, 서술자와 일치한다는 등식 위에서 인식하는 것은
작가 혹은 독자들이 피해야 할 기본적 예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나 소설은 수필이나 자서전과 다른 장르가 되는 것이며 시에서는 서술자를 서정적 자아(시적 화자 또는 시적 자아)소설에서는 작중 화자라고 일반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소설에서의 시점(視點 - 1인칭, 3인칭)이 시에도 있다면 의아해할 지도 모르겠다. 1인칭과 3인칭의 차이는 서술자의 위치가 작품 속에 있는가 작품 밖에 있는가에 있다. 그러니까 시의 경우 서정적 자아인 '나'가 작품 속에 있는가 작품 밖에 있는가 하는 점이 소설로 말하면 1인칭 시점 혹은 3인칭 시점이 되는 셈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絶頂)')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서정적 자아인 '나'가 작품 속에 있으며(소설로 말하자면 1인칭 시점), 이육사의 '절정(絶頂)'은 '나'가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생략된 경우로서 역시 같은 경우에 속한다.

박목월의 '나그네'에는 '나'가 작품 밖에 위치하고 있어 소설로 말하자면 3인칭 시점에 해당한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같은 내용도 서정적 자아의 위치를 바꾸어 보면서 창작을 시도해 보면 느낌은 사뭇 달라진다.

작품의 내용이 서정적 자아와 밀착되어 있는 '진달래꽃', '절정(絶頂)'을 읽을 때에 독자는 자신의 위치와 서정적 자아를 동일시하게
됨으로써 작품 속에 푹 빠지게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반대로 '나그네'의 경우는 작품의 내용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제 삼자의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마치 독자가, 독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감상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자신의 일을 서술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감정이 위주가 된 주정적(主情的)작품이 많은 편이며, 후자의 경우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작품의 내용에 간섭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서정적 자아의 감정을 노출시키기 어려운 문제가 많아 지성이 위주가 된 주지적(主知的)작품이 많은 편이다.



9. 좋아하는 시부터 관심 갖기

누구나 좋은(잘 된) 시를 쓰고 싶어 한다. 좋은 시를 쓰겠다 하면서 한 편의 시도 쓰지 못 한 채 좋은 시만을 기다리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좋은 시는 평생 그림의 떡일 뿐이며 습작시 한 편도 제대로 구경할 수 없는 초라한 시인에 머물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대개 시에 대하여 관심이 지대한 편이며, 실의에 빠져 있는 경우라 해도 좋은 시에 대한 열망 하나만으로 이를 거뜬히 극복해낼 줄 아는 굳은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문학이라는 말 자체만으로도 거기에서 큰 기쁨을 얻고 있는 사람들같이 여겨져서 왈가왈부할 것도 아닌 것 같으나 노력(습작)하지 않고 좋은 결과(작품)를 기대하는 것은 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이 세상의 모든 훌륭한 작품들은, 부단한 습작에서 얻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룩된 것들이다.

우선은 부족한 모습에서부터 시작하는 처음이 열려야 한다. 쓰는 것보다는 읽고 음미하는 즐거움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많은 작품들을 읽고 음미하는 일은 표절(남의 글을 그대로 모방함)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표절하는 잘못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애송시 하나 정도를 간직하고 산다. 나는 과연 어떤 내용의 시를 좋아 하는가? 이것을 알아보는 일은 시
쓰기의 초보 단계에서 꼭 필요하다. 모든 일에 선후 관계가 있듯이 시 쓰기에도 선후 관계는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자칫 순서를
그르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틀에 구속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무조건 좋고 나쁨으로만 시 작품을 평가하려 하는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예시한 작품들을 보자.

[가]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쏘냐

(유치환, '일월(日月)')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砂)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本然)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 '생명(生命)의 서(書)')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絶頂)')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쫒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쫒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 '또 다른 고향(故鄕)')


[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招魂)')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 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서정윤, '홀로 서기' 중 1, 2연)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떠날 것을 미리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욺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沈默)')

위에 제시된 작품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 아마도 대개는 [나]에 속한 작품일 것이다. 실제로 한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나]의 작품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 스무 편 안에 모두 속해 있다.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되는 바, 우선 [가]에 예시된 작품들은 강렬하면서도 의지적인 성격이 짙어, 시라고 하면 부드러운 인상으로 생각해 왔던 일반적 통념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시를 공유(共有)하는 것으로보다는 소유(所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독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어서, [가]가 주로 시대 상황을 문제 삼고 있음은 사회적 차원의 것이지 개인적 차원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 더 짚어 보면 개인적 차원의 시는 주로 서정성이 짙게 나타나지만 사회적 차원의 시는 참여성이 두드러져, 일반 독자는 가슴 깊이 와 닿는 심금을 울려 주는 소위 서정시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이 서정성을 다룬 시를 애송하는(혹은 애독하는) 독자들은 [가]처럼 범위가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있는
시에 대하여 무조건 배척하려 한다는 점이다. 참여적 성격이 강하다 보면 기교가 다소 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사고
깊이나 기교면에서 나름대로 충분히 가치가 인정되는 작품도 많다.

이는 반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참여적 성격이 짙은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는 [나]와 같은 시는 여리다,
비겁하다는 등의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창작을 위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니만큼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습작에
임하면 좋을까를 고민하기로 하자.

정도(正道)가 있을 수는 없다. 창작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내가 좋아하는 내용을 선택해서 시도해야 한다. 다만 어디 어디에 써
먹어야겠다는 효율성을 앞세우다보면 문학으로서의 시에 관심을 갖기보다 사회 문제에 치중하게 되어 사소한 언어 하나에도 애착을
갖고 고민하는 다소곳한 자세를 잃을까 우려할 뿐이다.



10. 초보 단계에서 시쓰기

시 쓰기를 처음 시도할 때는 먼저 형식과 내용에 신경을 쓰게 된다.형식면에서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면 정해진 틀을 그려 놓고 그 속에 내용을 끼워 넣는 것도 하나의 요령일 수 있겠다.


난 그날이 오면 내 팔과 내 얼굴은
밝은 웃음을 지으며
하나씩 치장을 합니다.

난 그날이 오면 사랑의
햇살을 받으며
조금씩 하얗게 피어납니다.
하얀 아이들의 웃음을 벗삼아
뭉개구름을 따라 그렇게 피어납니다.

난 그날이 오면 사랑의
햇살을 받으며
초록색 내 팔을 뻗습니다.
저 공허한 하늘에 태양을 따라
초록색 옷을 입습니다.

그날이 오면……
(고교생 작품, '목련')


친구야!
흰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하얀 겨울날
너에게 이 글을 띄운다.
지금 창 밖을 보면 아직 겨울이고
봄은 오지 않았는데
이 하얀 겨울은
너무나도 빨리 가려하는구나.
친구야!
온통 초록이던 내 마음이
오늘 아침에는 하얀빛으로 변했단다.
온 세상이 하얀 겨울로 변했듯이 말이야.
저 눈 속에서
너와 단 둘이 누워
눈물을 우리 품에 모두 안아보고 싶구나.
친구야!
왠지 하얀 겨울날은 슬퍼진다.
네가 내 곁에 없는 탓일까.
나에게 네가 없는 차가운 겨울은
모든 생명체가
깨어나지 않은 봄과 같구나.
친구야!
이 하얀 겨울이 다 가기 전
우리 기차를 타고 긴 여행을 떠나자.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젊음을 얘기하며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우리들의 사랑을 속삭이며
긴 여행을 떠나자꾸나!
(고교생 작품, '하얀 겨울날 친구에게')

'목련'은 '난 그날이 오면 ∼'과 '∼ 합니다.'를 반복해서 구사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그날'은 '목련이 필 봄날'이며, 네 번씩이나 반복 구사함으로써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게다가 '∼ 합니다.'의 내용에 '치장하고 → 꽃으로 피어나고 → 초록색 옷을 입는' 시간성을 가미시키면서 기교를 부리고 있다. '하얀 겨울날 친구에게'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어서 친구와 같이 우정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데, '친구야!'를 반복해서 부르는 틀 속에 서정적 자아의 다정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그러나 틀을 설정해 놓고 내용을 틀 속에 억지로 가두는 이와 같은 방식은 작가는 작가대로 제한된 내용을 형상화할 수밖에 없으며, 독자는 또한 독자대로 이해의 폭을 좁힐 수밖에 없다.
시 쓰기의 초보 단계에서는 이와 같은 형식에다 다양한 내용을 담아봄으로써, 정갈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등에 진 짐꾸러미가 제멋대로 놀지 않고 착 달라붙은 안착감을 갖게 해 줄 것이며, 완결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단아(端雅)한 맛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한마디로 스스로가 자기의 작품을 두고 잘 썼다고 칭찬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 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 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먼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신석정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이 시는 아홉 개의 연이지만 '어머니 /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반드시 앞에 배치하고 있는 세 단락의 구성을 보이고 있다. 또 각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는 '∼ 합시다.'의 청유 형식을 취하고 있어 공통적이다.(세 번째 단락 마지막의 '∼ 하지 않으렵니까?'를 청유형으로 고치면 '∼ 합시다.'가 된다).
첫째 부분은 '비둘기를 키웁시다.'로 끝나고, 둘째 부분은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로 끝나고, 셋째 부분은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로 끝난다. '비둘기 - 어린 양 - 새빨간 능금' 사이의 필연적인 인과 관계는 없어 보인다.그러나 이들이 상징하는 바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비둘기가 평화라면 어린 양은 순수이고 새빨간 능금은 풍성한 수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 사이의 연관된 의미를 찾자면, 평화와 순수 속에서만 풍유로운 삶이 보장된다는 뜻이 되겠다. 그리하여 작가는 평화와 순수가 부정되는 세계에서 평화롭고 순수하고 풍요로운 세계, 즉 '먼 나라'를 동경하고 있는 셈이다. 읽기도 쉽고 구조도 쉽게 파악되는 이와 같은 시에 '비둘기 - 어린 양 - 새빨간 능금'과 같이 깊은 의미망을 형성하는 기교를 첨가하게 되면 시의 맛은 한층 더해진다.



11.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은 '주제'와 통하는 말이고, '어떻게'는 '표현'의 문제이다.이에 대한 선후 관계의 정답은 없다. 독자와 만나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완성품)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습작기 청년의 시작 노트를 통해 인용해 본다.
어느 날 나는 다리 위를 걷다가 난간 틈바구니에 쌓인 흙먼지에 싹을 틔운 풀을 보았다. 그 때 나는 그 풀을 보고 예사롭게 넘길 수 없었다. 신비스러움, 놀라움, 끈질긴 생명력에서 오는 강인함, 애처로움 등 만감이 교차하여 한참을 서서 상념(想念)에 잠기고 있었다. 하나의 사실에서 오는 느낌을 감회의 목소리로 옯겨 보고 싶었다.

흙이 있는 곳이라면
풀은 어디서든 싹을 틔우고 있었구나.

얼마든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이지만 왠지 나에게는 남다른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무력해져 있던 나의 모습과 만난 풀이라는 점이 나에겐 특별한 경험이었고, 화초를 가꾸는 화분에 불청객처럼 솟아난 잡초라든가 게다가 운동장 한 가운데 혹은 계단 구석 등에서 자기 영역을 넓혀가는 풀들은 수 없이 보아왔지만 다리 난간 흙먼지 쌓인 곳에 뿌리를 내린 한 포기의 풀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특별한 경험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한 구절의 경험과 함께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으로 그 풀 한포기를 보는 순간 나는 적어도 두 가지의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한 없이 초라해지는 나에 대한 발견과 오히려 강하게 일어서려는 의지. 그리하여 이 두 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곰곰히 따져보았다. 그랬더니 목소리(어조(語調):시 작품에 나타나는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만 다를 뿐 결과는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보잘 것 없는 풀 한 포기도 발 디딜 수 있는 곳이라면 저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데, 나는 그보다도 못한 존재가 아닌가 하면서 초라한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고, 나도 강하게 일어서야지 하는 것도 무기력함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결국은 같은 내용이라는 생각 말이다. 다만 앞엣 것보다 뒤엣 것의 목소리가 강하게 드러나게 될 뿐.결과가 같다면 이 둘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표현은 없을까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마침 나는, 내가 흐르는 강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하늘과 다리와 다리 위에 서 있는 나를 통째로 안고 흘러가는 강물을 보았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싹을 틔우고 있었구나
다리 난간 위에서 나는
못 볼 것들을 보고 말았다
하늘과 다리와
다리 위에 기대어 뿌리 내린 풀과
나를 업고 흐르는 강물

떠오른 생각들을 여기까지 옯겨 놓고 보니,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에 나는 무척이나 흥미를 갖게 되었다. 다리 위 위험한 곳에 싹을 틔우고 있는 풀을 보고 '못 볼 것'이라고 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이런 모습을 담고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못 볼 것'이라고 하게 되었는지. 이 애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이 애매한 표현을 살리고 싶었다. 애매한 만큼 다양한 의미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더욱이 3, 4행에서 불쑥 튀어 나온 '못 볼 것들'은 독자들에게도 충격일 수밖에 없다. 무슨 '못 볼 것들을' 보았다고 하는지 자못 궁금해질 것이며, 이러한 궁금증으로부터 이 시는 본격적인 해석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이다. '못 볼 것들을 보고 말았다'를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못 볼 것'은 '다리 난간 위에 싹을 틔운 풀'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왜 '보아서는 안 될 것'이었을까? 나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나는 더욱 초라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둘째로 '못 볼 것'은 '하늘, 다리, 풀, 나를 비추고 흐르는 강물'이다. 왜 '보아서는 안 될 것'이었을까? 앞에서 초라해진 '나'가 나의 눈에 비친 모든 존재(조화, 갈등, 고뇌하는 나까지 포함한 모든 것)를 넉넉히 안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본 순간 나도 강물처럼 넉넉한 존재로 거듭나겠다는 깨달음을 4∼7행에서 얻게 되는 구조이다. 어느 정도 완결된 맛도 있고 해서 나는 나름대로 만족해 하고 있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면 2행의 '∼ 있었구나'와 4행의 '∼ 말았다'가 어쩐지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둘 다 영탄조가 아니면 서술형으로 하고 싶었다. 그런데 2행이 감탄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면 흙먼지 쌓인 곳에 피어난 풀을 바라보는 신비로움이 나만의 것이 되어버려 자극의 폭을 제한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작자는 나름대로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폭을 마련하고 싶었다. 비춰진 모습을 그대로 제시하게 되면 정서를 환기하는 자극의 폭이 넓어지겠기에 말이다. 결국 '∼ 있었다'로 바꾸기로 했다.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싹을 틔우고 있었다
다리 난간 위에서 나는
못 볼 것들을 보고 말았다
하늘과 다리와
다리 위에 기대어 뿌리 내린 풀과
나를 업고 흐르는 강물

흥미로운 시작(詩作) 노트이다(간략한 부분 메모를 첨가 서술하였음). 아마도 위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스스로는 기쁨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 틀림 없다. 시작 노트에서 엿보이듯이 한 구절 한 구절 고민한 끝에 완성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를 쓰는 기쁨이며, 그 기쁨은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삶의 활력소가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문제가 되는 부분의 골자는 '나도 강물처럼 넉넉한 존재로 거듭나겠다는 깨달음'까지 미치지 못하였는데도 스스로는 꿈보다 해몽이 좋은 쪽으로 자의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의 의도가 독자 쪽과 많이 빗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해석에 있어서 비약이 너무 심하지 않았나 한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의 감정을 절제하여 정서적 자극의 폭을 확대시키고 있는 점은 공감이 될 수도 있겠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주제인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에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적어도 어떤 방식을 통해 시적 형상화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위에서 알아 보았다. 작가마다 과정이 사뭇 다르게 나타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12.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

시 작품 속에서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가 독자들에게 주는 감동의 폭은 참으로 다양하다.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벌어진 틈을 '정서적 자극의 폭'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독자들의 반응을어떻게 다양하게 보여주는가는 다음의 예를 통하여 알아 보자.

[가] 예쁜 새
[나] 비에 젖은 새

'[가] 예쁜 새'에서 대상은 '새'이다. 이 '새'가 예쁘다고 말하는 이는 물론 서정적 자아이다. '[나] 비에 젖은 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상은 '새'이며, 이 '새'가 비에 젖었다고 말하는 이는 서정적 자아이다. '새'라는 대상이 밝혀지고 서정적 자아가 밝혀졌으면, 이제는 '새'와 '서정적 자아'의 거리가 [가]와 [나]에서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라 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시적(可視的)인 거리가 아니라, 감정이 얼마나 개입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전자를 '거리가 가깝다', 후자를 '거리가 멀다'로 부르게 되는 추상적인 거리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가]와 [나]에 나타난, 대상과 서정적 자아의 거리는 확연히 구별된다. 즉 [가]는 '새'를 서정적 자아가 직접 '예쁘다'고 말하는 경우이고, [나]는 '새'가 '비에 젖어 있는 상태'를 서정적 자아가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인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가]는 서정적 자아의 '새'에 대한 '예쁜' 감정이 잘 드러나 있고, [나]는 서정적 자아가 자기의 감정을 절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비에 젖어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니까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가 [가]는 밀착되어 있고, [나]는 느슨한 셈이 된다.
그러면 이같은 점이 시를 다듬거나 독자가 읽게 되는 경우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물론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기 위해 대상과 서정적 자아와 독자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 하였다.

작가 ------- 작 품 ------- 독자

서정적 자아 --새


위의 도식에서 수평적 측면은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를 나타내는데, 이것이 작품으로 이루어질 때 독자는 바로 이 작품을 읽게 된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정서적 자극의 폭'은 여기에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서정적 자아'와 '새'의 거리가 가까운 [가]의 경우 이를 감상하게 되는 독자의 위치와, 반대의 경우인 [나]에서 나타나는 독자의 위치는 다르다. 즉[가]는 서정적 자아와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도 가까운 이유 때문에 이미 작가가 '새'를 '예쁘다'고 규정지은 것밖에는 더 이상의 정서를 환기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 [나]를 보자. '서정적 자아'가 '새'를 '비에 젖었다'고 표현했는데, 이 시를 감상하는 독자는 서정적 자아와 대상의 거리가 [가]보다 많이 벌어져 있는 틈으로 여유있게 위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비에 젖은' '새'라는 객관적 표현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에 젖었기' 때문에 '초라하다', '불쌍하다' 혹은 '애처롭다' 등 동정심 내지는 '고독', '슬픔'의 다양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게 된다.다시 말해서 독자에게 정서에 대한 환기를 충분히 시킴으로써 자유로운 감정 적용의 기회를 제공해 주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미루어 본다면 시에도 '나만의 시'가 있는가 하면 '독자와 함께 하는 시'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가]와 같은 '나만의 시'가 좋다든가 [나]와 같은 '독자와 함께 하는 시'가 좋다는 식의 규정을 위함이 아니다. 상황에 알맞는 시적 표현이어야만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일 뿐이다.



13. 일상적 시각으로부터의 탈피

문학의 생명이 신선함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과거를 답습한다거나 모방의 차원에 그친 문학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벌써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는 말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늘 신선한 눈을 갖기 위한 고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주변의 사물에서부터 심오한 철학에까지 다방변에 걸쳐 예사로운 눈으로 그것들을 대하지 않는다. 뛰어난 관찰력, 상상력, 추리력 등이 발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바로 문학이 신선한 창조이게 하는 생명력이다. 모든 예술 작품이 다 그러하지만 시는 정교한 언어 예술인 까닭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언어 생활이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라는 측면을 덧붙인다면 더더욱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문학의 생명은 관찰력, 상상력, 추리력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관찰력이다. '사소한 사물이나 현상도 그냥 내버려 두지 말라. 거기에 기기묘묘한 착상이 있고 원리가 있고 언어가 있다.'는 이 말은 시인의 기본 정신이다.

즉 말을 확대 해석해 보면, 요는 관찰하라는 말이 되는 것이며, 이 관찰하라는 말은 일상적인 시각에 머무르지 말고 거기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일찍이 러시아의 형식주의 작가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란 개념은 일상적인 시각의 파괴란 의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육교 위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주먹을 불끈 쥐고
노래를 부르며
누군가 그들을 군중이라 불렀다

(중략)

아주 쬐그만 안개꽃들이
다발로 떠내려 가는 것이
먼 강에 보이는구나
때때로 시너를 끼얹고
사랑하라 사랑하라
뛰어내리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그 뿐
주위는 다시 적막에 젖고
아들아 작은 가지 끝에서
너는 언제나 홀로 시드는구나
환한 대낮에
한 묶음으로 묶여서

(고영조, '안개꽃'중에서.('시와 문학' 가을호))

위의 시는 '안개꽃'을 소재로 하고 있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시각에서 '안개꽃'은 순결, 순수 혹은 순결한 사랑, 순수한 사랑 등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방식대로의 시라면 이와 같은 내용이게 마련이다.

마침 그런 일이 있었다. 시 공부에 열을 올리던 친구들 앞에 안개꽃이 가득한 꽃병을 올려 놓고, 안개꽃을 소재로하여 시를 지어
보라고 했더니 50명 중 45명의 친구들이 순결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사랑의 이미지를 풍기는 시 작품을 제출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친구들이 일상적 사고 방식에만 머물러 있었지 새로운 시각에는 별로 눈을 돌리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고영조의 '안개꽃'은 새로운 눈을 갖게 해 준다. '안개꽃'을 노래하면서도 단순히 그 서경적인 묘사나 혹은 아름다움의 한탄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 내면에 숨겨진 존재론적 의미 탐색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는 기본적으로 사물 탐구를 통해 인간 존재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그것을 사회적인 의미로 확산시킨다.

다시 말해 '안개꽃'에 반영된 죽음의 의미는 사회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시가 애초부터 사회 의식에 바탕을 두고 씌어졌다는 것은 도입부에서 암시되고 있다. '육교 위로 /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 주먹을 불끈 쥐고 / 노래를 부르며 / 누군가 그들을 군중이라 불렀다'라는 첫 5행이 그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도입부를 읽으면서 이미 시의 제목으로 제시된 '안개꽃'과 '데모하는 군중'이라는 두 사물의 의미론적
등가성(等價性)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가령 에즈라 파운드의 저 유명한 '지하철 역에서' 군중을 비에 젖은 봉숭아 꽃잎으로
비유했던 사실과 유사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안개꽃은 장미나 백합처럼 개체로 피어나는 꽃이 아니라 무리지어 피는 꽃이라는 점에서 군중적 이미지에 훨씬 가깝다. 동시에 안개
역시 우리가 살아온 미망에 빠졌던 시대의 사회 생활을 환기시켜 주는 데 적절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거리에 짓밟힌 한 묶음의 시든 안개꽃다발을 통해서 지난 시대 독재와 항거하다가 죽어간 우리의 젊은 넋들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시는 우리 사회의 아픔을 사물 탐구의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월미도는
뿌연 바다로 막혀 있다.

월미도는
노을진 바다로 막혀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바다'하면 '확 트이는 느낌 / 가슴을 열어 놓은 느낌 / 시원함 / 나아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할 땐
바다를 찾고, 바다로부터 신선한 마음을 담아오는 습관도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바다는 트여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 구절을 옮겨놓고 보면, 시는 답답한 내 마음을 털어 놓는 그릇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런 일상성보다 신선한 맛을 느껴보고 싶을 때, '월미도는 / 뿌연 바다로 막혀 있다.

월미도는
노을진 바다로 막혀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바다'하면 '확 트이는 느낌 / 가슴을 열어 놓은 느낌 / 시원함 / 나아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할 땐 바다를 찾고, 바다로부터 신선한 마음을 담아오는 습관도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바다는 트여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 구절을 옮겨놓고 보면, 시는 답답한 내 마음을 털어 놓는 그릇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런 일상성보다 신선한 맛을 느껴보고 싶을 때, '월미도는 / 뿌연 바다로 막혀 있다'로 바꾸어 보자.

그러면 서정적 자아는 월미도 땅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바다 쪽에서 월미도 땅을 바라보는 입장이 되어 버린다.
바다에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자신을 한 척의 배의 입장으로 설정해도 색다른 느낌은 충분하리라고 본다. 적어도 뭍에 대한 그리움
정도의 내용을 형상화할 수도 있겠으니 말이다. 문제는 사물을 바라보되 틀에 박힌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고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출처:신배섭의 국어마을)

 

출처 : 갈밭의 흔들림에도
글쓴이 : 慈慧/박효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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