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

추사 김정희와 수석

아리박 2024. 2. 20. 07:27
추사 김정희와 수석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본관이 경주이다.
병조판서 김노경과  문화 유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쓰고 명철했던 김정희는 1809년(순조9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시, 서화에 능했고 금석학에  조예가 깊어  1816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내어  이듬해 판독하였다. 
 
추사에 대한 여러가지 행적이 글로 작품으로 남아 있는 사례가 많이 있으나 수석에 대한 자료는 찾기 힘든 사례인데 반가운 소식이다 그때 수석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터인데 만약 이 수석을 찾을 수만 있다면 수석인으로서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 일이겠는가 그 어떤 문화재보다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서체에 관심이 많았던 추사는  중국의  금석학자 용방강의 서체 따라 배우기도 하고 조맹부, 소동파, 안진경의 서체를 익히기도 하였다. 
청나라 금석학자 강덕량의 호가 추사였는데 스승 박제가는 김정희에게 강덕량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추사]를 호로 지어주었다. 
 
그러나 김정희는 [추사]는 잘 쓰지 않았고 청나라 학자 [완원]이  자기 이름 [완]을 내려준 것에서 [완당]이라  짓고 이 호를 즐겨 썼다. 
 
(저 유명한 세한도에도 [완당]이라 새긴 낙관이 찍혀 있다. 그의  문집도  [완당집]이다.
소치  허련이 그린  것도  [완당 선생 초상화]다.
그러므로  김정희의 호를 [추사]라고 일컫기 보다는 [완당]이 더 적절할 듯하다.
지금 워낙 우리나라에 김정희 호가 [추사]로 굳어졌으니 여기서는 추사를 그대로 쓰기로 한다.) 
 
이후 문과에  급제한 추사는 1826년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탐관오리  현감 김우명(안동김씨)을 파직한다. 
 
1835년(헌종1년)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이듬해인 1836년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판의금부사에 올랐다. 
 
1840년(헌종6년) 55세 동지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세도가 안동김씨 김홍근(대사헌)과  추사에게 파직당했던 김우명이 10년전의 일인 윤상도의 옥사 사건에 추사가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하여 사헌부에서  국문을 받고 거의 죽게 되었는데 조민영이 적극 변론하여 겨우 모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추사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1840년 10웰 초에  제주도로 압송된다.
배웅에는 초의선사와 소치 허련도 있었다. 
 
추사는 1848년 12월 8일까지 8년 3개월 동안 제주도 송계순의 집 대정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처음 6개월 동안은 향토병과 국문 후유증으로 생긴 다리의 신경통, 그리고 급격한 시력 저하로 고생을 한다. 
 
제주도민들은 순박하고 친절했으며 추사도 차츰 건강을 회복한다. 
 
추사는 동생에게 편지하여 한양 서재에 있는 선덕향로(명나라때 만든 명품 골동품)와 그 가죽 깔판,  그리고 괴석 1점과 그 좌대,  영석  2 점과 그 좌대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평소 애완하던  선덕향로와 괴석(괴이하게 생긴  형태의 수석) 등 수석  몇 점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추사에게 수석은  귀양살이의 억울함과 외로운 심사를 달래주는 친구였던 셈이다. 
 
추사의 정신세계를 넓혀주고 마음을 수양하도록 해 준 것은  다름아닌 수석이었던 거다. 
 
평생 그의 손에서 벼루 10개, 붓 1000자루가 닳았다 하니 추사체라는 자기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서체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가  예서, 해서, 행서에서 추사체를 완성한 것은 제주도 유배생활 때였다고 한다. 
 
수석과 향로를 곁에 두고 감상하며 서체연구와 글씨 쓰기에 전념할 수 있었으니 추사에겐 귀양살이가 예술정신을 불 태우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추사는 개인에게 닥친 곤경과 억울한 일을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긍정적인 사람에게 고난은 크나큰 유익이다. 
 
부정적인 소인배들은 고난 당할 때 죽어버릴 생각부터 먼저 한다. 
 
곤경을 예술로 승화시킨 추사의 삶은 오늘날 조금만 힘든 일에 부딪치면 자살부터 해버리는 대한민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시대를 통털어 최고의 명품 서화로 평가받는 세한도(국보 제180호)는 추사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할 때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스승 추사에게 중국서적을 보내주는 등 성심을 다했다. 
 
추사는 고너적한 소나무 네 그루와 덩그러니 외딴집의 겨울풍경을 간결하게 그리고는 긴 발문을 썼다. 
 
제법 긴 발문의 내용은 이렇다. 
 
《사마천은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그것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 하였다.
그대 역시 세속의 거친 풍조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느뇨?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께서 "일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다.
추운 겨울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는 소나무와 잣나무이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만한 것이  없었지만  나의 곤경 이후에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을만 하지 않겠는가.》 
 
 
1848년 63세에 제주도 귀양에서 되돌아 왔지만,  1851년 친구 영의정 권돈인의 진종 예론과 연관되어 다시 함경남도 북청으로 귀양을 가서 이듬해 67세에 돌아온다. 
 
올곧은 추사는 막장으로 치닫는 안동김씨 세도정치 아래 두 번의 귀양살이 후 말년에 과천에  머물며 아버지 김노경의 묘가 있는 청계산에  자주  들렀다. 
 
추사의 문하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비롯하여 3천명의 선비가 있었다. 
 
그가 당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예술인이었는지 말해준다. 
 
추사 문하생  단계 김영황이 추사가 애지중지하는 수석 하나를 보고  탐을 내어  자기에게 달라고 조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6년 후  그는 과천에 기거하는 추사에게 3일 동안 울고불며 그 수석을 달라고 간청하였다. 
 
결국 추사는 단계에게 그 수석을 주었다. 
 
단계 김영황의 얼을 쏙 빼놓은 추사의 그 수석은  천하의 명석이었을 것이다. 
 
완전히 반해 버린 수석을 손에 넣기 위해  스승 앞에 예의도 염치도 뭉갠 제자에게 아끼는 수석을 그냥 주는 추사의 초연함. 
 
떠나야 할 때가 가까웠음을 예감한 것일까. 
 
70세의 나이에  병이 든 추사는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가 1년 안거하였다. 
 
추사의 봉은사 현판 글씨 [판전]은 그때 쓴 것이다. 
 
봉은사에서 돌아온 추사는 1856년 10월 10일  과천 [과지초당]에서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난다. 
 
불후의 명품 그림과 글씨를 남겼고  문집으로는 [완당집], [완당천도], [담연재시고] 등을 남겼다. 
 
지극히 아름다운 것은 후세에 국보가 되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남는다.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츠카  지카시(1879~1949)]는 추사에 관한 자료를 모으며  추사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최초의 추사 연구가였다.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 추사에 대한 글과 연구서가 많다. 
 
추사의 예술적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항후 10만원권 지폐를 만든다면 앞면엔 [김정희 초상화], 뒷면엔 [세한도]가 선정될 가능성이 높다. 
 
[김정희 초상화(보물 제547호)]와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10만원권 지폐에 넣는다고 해서 시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김정희 초상 보물 제547호] 이한철이 1856년 여름에 그리기 시작하여 1857년 완성

[추사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8년 3개월 지냈던 초려] 2020년 1월 9일 제주도에 가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세한도] 국보 제180호, 추사가 1844년 제주도 유배시절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이다. 여백미가 참 아름답다.

 

추사와 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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