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생각

[스크랩] 법정의 삶을 이룬 소박한 세 가지 행복

아리박 2010. 3. 25. 00:13
법정의 삶을 이룬 소박한 세 가지 행복
발자취 | 무소유마저 버리고 간 법정
글 이임광 칼럼니스트 [llkhkb@yahoo.co.kr]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 좌선하고 6시에 차를 마신다. 다기를 매만지며 하루 생각의 실마리를 푸는 시간이다. 오전에는 채소밭을 돌보고, 어정거리다 좌선하고 글을 쓴다. 12시에 점심공양 하고 2시까지 산길 여기저기를 대지팡이 짚고 산책한다. 오후에는 좌선하고 나뭇가지나 쌓인 낙엽을 치운다. 저녁이 되면 어둡기 전에 밥 먹고 7시부터 9시까지는 촛불이나 등잔 밑에서 책을 읽거나, 나가서 낙엽 지는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무엇엔가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홀로 있으면 내면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법정의 하루 일과다. 법정은 일생을 이 하루처럼 살다 갔다. 산골 오두막에서 누구보다 간소하고 검소하게 살았지만, 법정은 불편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날마다 경이로운 자연과 안타깝도록 사랑한 산밑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정은 환절기마다 심해지는 기침으로 청중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근처에 인가 한 채 없는 눈고장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홀로 끓여 먹으며 20년 가까이 지냈다.

이제 그만 편안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시라는 제자들과 주위 사람들의 거듭된 권유에도 법정은 미소로만 답했다. 2007년 가을법회 이후 법문이 중단됐기 때문에 이듬해 봄법회에는 법정을 만나 말씀을 들으려는 5000여 명의 사람들로 법당과 설법전과 절 마당이 발 디딜 틈 없었다.

당시 법정은 병 치료차 석 달간 외국에 건너가 생활할 때의 소회를 밝히면서 “모든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법정은 투병기간에 체중이 45kg까지 줄어 뼈와 가죽만 남은 부처님 고행상 같았다. 그러나 법정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오히려 절마당에 가득 모인 청중에게 “햇볕에 앉아 계시는 분들, 자외선이 너무 독하니 서둘러 나무 아래로 가십시오”라고 권유했다. 물론 청중은 뙤약볕에 앉아 법문을 경청했다.

2003년 법정은 10년째 이끌던 시민단체 ‘맑고 향기롭게’의 회주와 길상사 회주직을 내놓는다고 발표했다. 모든 공식 직책을 내려놓고 자연인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해 가을 남쪽 섬에서 겨울을 나다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법정이 말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그 시간을 무가치한 것, 헛된 것, 무의미한 것에 쓰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들에 대한 모독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위해 써야겠다고 순간순간 마음먹게 된다. 이것은 나뿐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5년 가을법회 후 지인들과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법정은 “때가 되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육신을 벗어버리고 싶다”고 지나치듯 말했다. “묵은 짐으로부터 거듭거듭 떨치고 나오는 것이 중이 사는 맛”이라고도 했다. 누군가 “출가 50년이 아니냐”는 질문에 “나, 그런 것 모르는데” 하며 숫자의 의미를 부정했다.

수행의 세계에는 정년이 없다는 것이 법정의 지론이었다. 깨닫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스스로 문에 빗장을 지르고 들어앉는 곳을 ‘무문관(無門關)’이라고 한다. 법정도 “수행은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말했다.

영동 산간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내리던 날, 모두가 염려스러워했지만 법정은 부지런히 강원도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밖에서 눈 걱정하는 것보다 오두막에서 눈 내리는 소리를 듣는 쪽이 한결 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인혁당 사건 후 수행, 무소유 실천
절에 갇히면 팔만대장경도 빨래판



다비식장에 마련된 법정스님의 영정에 한줄기 햇살이 비추고 있다.
이 시대의 정신적 스승 법정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다 대학 재학 중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섰다.

오대산의 절을 향해 떠났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로 올라와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뒤 그 자리에서 삭발하고 출가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생활을 했으며,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가서 스승을 모시고 정진했다. 그 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다지다 28세 되던 해인 1959년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스님과 더불어 불교사전을 편찬했다. 이 기간 4·19와 5·16을 겪었다. 이때 맺은 운허스님과 인연으로 이후에도 경전 편찬 일을 계속했다.

새로 개설된 동국역경원의 초기 작업으로 산을 내려와 서울 봉은사에 머물렀고, 불교 경전 번역 일을 하던 중 함석헌·장준하·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유신철폐개헌서명운동을 펼치는 등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했다.

1975년 인혁당사건으로 무고한 사람들에게 사형이 집행되자 큰 충격과 자책을 느껴 본래의 수행승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자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아무도 거처를 모르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 문명의 도구조차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아왔다.

법정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재냈고, 1994년부터는 순수 시민운동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었다. 1996년에는 서울 도심의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12월14일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로 있다 2003년 12월 회주직에서 물러났다. 언젠가 법회가 열리기 전,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한 기자가 법정에게 물었다.

“스님은 산중수행자이면서 글을 쓰시고, 전에는 주기적으로 신문, 칼럼까지 쓰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 대답으로 법정은 해인사 선방에서 수행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루는 팔만대장경을 모셔둔 장경각 쪽에서 할머니가 내려오면서 법정에게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법정이 “지금 내려오신 곳에 있습니다” 하고 일러 주자, 할머니 왈 “아, 그 빨래판 같은 거요?” 하는 것이었다.

그때 법정은 우리 불교가 옛 것만 답습하고 제도권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팔만대장경의 말씀도 한낱 ‘빨래판 같은 것’에 불과할 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살아 있는 언어로 불교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산중에 혼자 사는 법정에게 글쓰기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죽음도 미리 배워 두어야 한다
중생이 앓으면 나도 앓는다


2008년 여름은 갑자기 찾아온 큰 병으로 법정에게도 무척 고된 시간이었다. 그 해 겨울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경제 한파로 모두의 마음이 움츠러들었을 때 법정은 옛 선사의 말을 빌려 “추울 때는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더위가 되라”고 말했다.

당시 강원도 오두막생활 17년째이던 법정은 겨울을 남쪽지방에 마련한 임시 거처에서 나기로 했다. 힘든 투병생활 끝이어서 잠시 산중을 떠나 있어야 했고, 또한 ‘묵은 곳을 털고 새로워지기 위함’이었다.

법회 다음날 법정의 마지막 산문집이 된 <아름다운 마무리>가 나왔다. 2003년 길상사 창건 6주년 때 사석에서 법정은 평소 가까이 지내는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죽으면 절대로 거창한 다비식이나 화장 의식을 거행하지 말라. 무슨 제왕이라고 세상 떠들썩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또 사리 줍는다고 재를 뒤적이는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 수의도 만들 필요 없다. 내가 입던 승복 그대로 입혀 내가 즐겨 눕던 작은 대나무 침상에 뉘여 그대로 화장해 달라. 나 죽은 다음 시주 걷어 거창한 탑 같은 것 세우지 말 것이며, 어떤 비본질적 행위로도 죽은 뒤의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

법정은 평소 죽음은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생명의 질서이며 삶의 신비라고 말하고는 했다. 삶에 죽음이 없다면 삶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며, 죽음이 삶을 받쳐주기 때문에 그 삶이 빛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법정은 일찍부터 삶을 배우듯 죽음도 미리 배워 둬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어렵지만, 죽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살 만큼 살다 명이 다해 가게 되면 병원에 실려 가지 않고 평소 살던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다.”

법정은 이미 사그라지는 잿불 같은 목숨인데 약물을 주사하거나 산소호흡기를 들이대 연명의술에 의존하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커다란 고통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현대의술로도 소생이 불가능한 경우라면 조용히 한 생애의 막을 내리도록 거들고 지켜보는 것이 도리이니 병원이 아닌 평소 낯익은 생활공간에서 친지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삶을 마감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법정은 입적 전날인 3월10일 밤, 상좌스님 8명에게 “어디서든 내 제자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라. 정진의 힘으로 죽을 때 어지럽지 않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남기고 길상사와 수류산방에 가고 싶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길상사에 도착한 후 “길상사입니다”라고 알려주자 법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오후 1시 31분 열반에 들었다. 평소 병원을 멀리하던 법정도 큰 병에 걸려 부득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병을 치료하면서 법정은 속으로 이렇게 염원했다.

“이 병고를 거치면서 더욱 너그럽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인간적으로나 수행자로서 더욱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주어진 남은 세월을 더욱 알차고 참되게 살고 싶다. 이웃에 필요한 존재로 채워져야겠다. 앓게 되면 철이 드는지 뻔히 알면서도 새삼스럽게 모든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인다. 그리고 나를 에워싼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문득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법정은 병원 대기실에서 인내심을 배웠다고 했다. 예약된 시간에 서둘러 도착해도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때가 많아 더러는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진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것도 환자에게는 치유가 되겠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성급하고 조급한 마음을 어디 가서 고치겠는가? 병원대기실에서 기다리며 성급하고 조급한 생각도 함께 치료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 뒤부터는 기다리는 일이 결코 지루하거나 무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법정은 병상에서 줄곧 순간순간의 삶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언제 어디서 인생을 하직하더라도 후회 없는 삶이 돼야 한다. 돌이켜보면 삶이란 순간순간의 존재다.”

 


낡고 오래된 것이 아름답다
물건에 얽매이지 않아야 부자


길상사는 역사가 매우 짧으면서도 불교 사상 전례 없는 특이한 과정을 거쳐 절이 됐다. 원래 이곳은 1960년대부터 장안의 세력가와 정치인이 드나들던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다. 그 주인이던 김영한 여사가 법정에게 시주해 1997년 12월14일 창건법회를 열었다. 음식점 본관은 극락전으로, 별채는 설법전으로, 주방은 공양간으로 바뀌었다.

절 우측에 위치한 별채인 기다란 한옥 건물은 요정일 때 단체손님을 받던 곳으로, 고기 구운 기름때를 벗겨내고 수련장소로 사용했다. 법정은 길상사를 시주받은 후 단 하룻밤도 길상사에서 잠을 잔 적이 없다. 대원각을 보시받을 때도 10여 년을 고사했다. 언젠가 법정이 오래 전 머물렀던 어느 암자를 찾았을 때다.

밀린 빨랫감을 가지고 가서 빨았는데, 심야전기 덕에 더운물이 나와 차가운 개울물에서보다 일손이 훨씬 가벼웠다. 탈수기가 있어 짜는 수고도 덜어주었다. 그러나 정작 법정을 기쁘게 한 것은 그런 문명의 이기가 아니었다. 바로 걸레였다. 다락에서 여전히 쓰이는 두 장의 걸레를 발견하고 낯익은 친구를 만난 듯 만감이 새로웠다.

이 걸레는 1975년 이 암자가 세워진 날부터 함께 지내온 청소도구였다. 그곳에는 법정이 오래 전 다래헌 시절에 쓰던 양은대야 두 개도 건재했다. 세월의 풍상에 씻겨 많이 찌그러지고 벗겨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야로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1972년 어느 날 법정은 삭발해 주던 스님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마음을 내어 손수 삭발을 시도했다.

그 전까지는 혼자 산에 들어가 살면 삭발할 일이 은근히 걱정이었는데 손수 삭발할 수 있어 무척 기뻤다. 그 길로 동대문시장에 가서 거울을 하나 사 왔다. 그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삭발뿐 아니라 얼굴에 내린 세월도 함께 읽으면서 지내왔다.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 거기에는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 흔적에서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

법정은 오래된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환경을 생각하라고 가르쳤다.

“예전에는 지구생태계도 환경문제도 오늘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요즘은 절에서도 이런 검약한 가풍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넘치는 물량공세가 우리 정신을 병들게 한다. 그 많은 것을 차지하고서도 고마워하거나 만족할 줄 모른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에 정신과 눈을 파느라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여유마저 잃어가고 있다.”

2005년 쓰나미는 남아시아에서 2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법정은 “생각해보니 내가 이 세상을 의지해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이 지구의 자원을 많이 소비하고 그만큼 지구환경을 오염시킨 것 같다. 오늘과 같은 두려운 기후변화는 지구환경을 허물고 교란해온 우리 자신의 소행 때문이다.”

법정은 간소하고 단순한 삶을 강조했다. 꼭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더미에 짓눌려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 살림살이를 시시로 점검하고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덜 쓰고, 덜 버리면서 늘 깨어 있는 삶을 제시했다.

“지금 이 순간을 자신의 분수에 맞게 제대로 살고 있다면 노후에 대한 불안 같은 것에 주눅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

법정은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손대지 않고 쓰지 않는 물건이 쌓여 있다면 그것은 내게 소용없는 것이니 아낌없이 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부자란 집이나 물건을 남보다 많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고 마음이 물건에 얽매이지 않아 홀가분하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라고 할 수 있다.”

‘맑고 향기롭게’는 1993년 세상과 자연,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며 살자는 법정의 뜻에 따라 시작된 시민단체로, 그 동안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꾸준히 실천해 왔다. 1994년 강연에서 법정은 그 취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흔히 마음을 맑히라고, 비우라고 한다. 구체적 선행을 실천했을 때 마음은 맑아진다. 선행이란 다름 아닌 나누는 일이다. 내가 잠시 맡아 가지고 있던 것을 되돌려주는 일이다.”

 

TO BE CONTINUED.

출처 : BMW X CLUB
글쓴이 : 리츠(임홍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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