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스크랩] 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 /이영혜(시인)

아리박 2009. 12. 24. 16:23
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


상처가 덧날 때 피어나는 고통의 꽃
이영혜(시인)




언제 어디서 어떤 순간에 좋은 시상을 얻어, 어떻게 좋은 시를 써낼 것인가 하는 것은 모든 시인들의 화두이자 영원한 고민이다. 온 몸이 예민한 감각기관으로 덮여있어 남보다 빠르게 증폭되어 반응하고, 초고속 신경계를 거친 그 자극들이 대뇌 통합중추에서 유기적으로 잘 수용되고 통합 확장되어, 시로 잘 정리되어 나오는 타고난 시인들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불행하게도 나는 그렇지 못한 편이다. 시인으로 치면, 어떤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수용에도 무척 둔감한 편이고, 조그마한 시상을 잡아도 그것이 한 편의 시로 어우러져 익어 나오는 데도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다. 혹자는, 이제 어떤 시제를 던져 주어도 척척 한 편의 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실제 많은 유능한 시인들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시제에 맞는 시들을 잘들 써낸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백일장처럼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한 편의 시를 지어내는 일이 잘 안 된다. 아무리 쥐어짜도 시다운 시가 써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아주 오랫동안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하고 지낼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불현듯 스치는 시상이나, 오브제를 몇 개씩 메모해 두었다가 구조를 잡고 살을 붙이는 등의 시적 작업을 거쳐 비교적 수월하게 몇 편의 시를 완성하기도 한다.

결국, 내게 시 쓰기의 가장 중요한 작업은 시가 될 수 있는 시상의 포착, 오브제를 취득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순간은 억지로 얻어지기 보다는, 어떤 순간에 자연스럽게 찾아오거나, 찰나에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며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거나 아플 때, 마치 상처에 선혈로 솟았다가 그 위에 돋아나는 피딱지가 피워내는 꽃처럼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야간 대학원 문창과에 다니는 일은 권태롭고 단조로운 생활에 새로운 활력소를 얻는 즐거운 일이면서도, 생전 처음 문학공부를 해보는 나에게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매주마다 들어있는 시창작 시간. 내 순서에 습작시를 가져가서 합평시간에 동료들과 교수님께 난타를 당하는 일은 무척이나 두렵고 부담되는 스트레스였다. 겉으로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겸손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아드레날린 수치는 폭발 직전까지 상승되어 있곤 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자유롭게 다작을 하지 못하는 나는, 내게 할당된 시간에 신작시를 들고 가야하는 일이 늘 버거웠고, 번번이 억지로 짜맞춘 급조된 시를 들고 가서는 불안하게 앉아 있곤 하였다.

그날도 그랬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꾸며진 시를 제출했지만, 이미 문단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C시인과 M시인, 교수님의 눈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좋은 평을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난도질당할 줄이야! 다른 동료들의 온건한 지적, M시인의 조목조목 상세한 비평을 들으며 내 얼굴은 이미 벌겋게 상기되어가고 있었는데, 대학원 입학 전부터도 안면이 있었고 내내 돈독한 친분을 쌓아오던 C시인이 내 가슴에 예리한 비수를 꽂고 말았다. “이 작품은 시가 아닙니다.”로 시작한 날선 비평. 안 그래도 조마조마 두 방망이 세 방망이 콩닥거리던 내 소심한 심장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구구절절 다 맞는 지적에 더 이상 변명을 할 여지도 없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 그 시간을 끝냈는지 모르게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늘 있는 호프집에서의 뒤풀이 자리에도 핑계를 대고 불참했다.

자동차 시동을 켜고 집을 향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복된 습관이 나를 집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몇 년 동안 안이한 자세로 시를 써 온 치열하지 못한 내 자신이 형편없이 부끄럽고, 비참했다. 온통 자괴감이 나를 휘감아왔다. 창밖에는 초여름을 재촉하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긴 신호대기에 걸려 서서 답답한 마음에 차창을 내렸는데… 비릿한 비 냄새에 섞여 바람에 실려 들어오는 싸한 향기! 아카시아였다. 드림랜드 지나 길가 나지막한 야산 언덕이 흰 소금을 뿌려놓은 듯, 캄캄한 밤에도 하다.

순간 오래 된 기억중추의 시냅스들이 정신없이 빨라지며 신경회로를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픈 기억들이 향기에 섞여 끌려나왔다.

이 냄새……. 아기 분 냄새, 아기가 젖 토한 냄새, 저 흰 꽃……. 몽글몽글 게워놓은 아기 젖……. 아, 그리고……. 이맘때 지워진 나의 아기……. 마취에서 깨어날 때 내 속에서 올라오던 휘발성 마취약 냄새까지. 우연하게도 나는 두 아이 모두 봄에 잉태해서 아까시 꽃 필 무렵 심한 입덧을 했고, 다음 해 1월과 2월에 출산을 했다. 지워진 아이도 봄에 잉태되었으니까, 낙태의 시기도 아까시 꽃이 만개한 시기였다. 봄은 만물의 생명이 꿈틀대는 계절임에 나도 예외가 아니었나 보다.

다음 신호 대기에 걸려 섰을 때, 나는 한 발로 브레이크를 밟은 채로 가방 속의 수첩을 꺼내서 떠오른 생각들을 정신없이 메모하기 시작했다. 다 되었다. 이제 한 편의 시는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집에 들어갈 때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춰진 내 입가에는 우울하지만, 한 줄기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아기분 하얀 향내 밀려온다
내게서 지워진 아이들이
조막손으로 바람을 부채질하고 있는 거다

움텄던 싹들 파내고 난 후
움푹 파인 구덩이에서 피어오르던
폐사지 흙냄새처럼 싸한 마취약 냄새

크지 않는 기억 속의 아이들
흰 젖을 몽글몽글 게워내며
아까시 나무 안에서
일 년 치의 안부를 날려 보낸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손사래 치며
밀어 보내는 아릿한 전언
내 빈 둥지 가득히
아기분 잊혀진 냄새 차오른다

- 졸시 「아까시 꽃 피면」 전문


시는 자기 체험이요, 자기 고백이다. 그런데 결핍의 느낌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인간이 유한적 존재라는 의식일 것이다. 인간은 늘 자신이 결핍된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 같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 목숨이란 문제를 살핀다. 말하자면 이 문제들은 가장 강렬한 시 쓰기의 동력이다. 특히 여자, 모성에게 낙태의 기억은 인위적 생명의 박탈이라는 평생 씻지 못할 죄의식을 갖게 한다. 좀처럼 아물기 힘든 아픈 상처이면서 또한 가장 강렬한 체험 중의 하나이다.

그 밤, 나는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잊어버리기 전에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야 했다. 용기를 내어 나한테 솔직하기로 했다. 부끄럽고 아픈 상처들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아물지 않는 상처를 한 번 더 덧내기로 했다. 그러자 비교적 쉽게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밤, 오랜만에 100%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시를 한 편 아프게 낳았다. 가장 괴롭고 아팠던 순간, 선물처럼 시상 하나가 내게 내렸던 것이다.

한 주 동안 그 옥동자를 깨끗이 씻기고 먹이고 분칠해서 소중히 강보에 싸아 안고, 다음 주 합평 시간에 얼굴을 보여주었다. 떨리는 마음…….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다들 공감과 호평을 보냈다. H교수님은, 뒤풀이 장소에서, 시를 어떻게 쓰면 좋겠냐는 한 원생의 질문에, 오늘의 내 시를 예로 드셨다. 그렇게 쓰면 되는 거라고.

이 시를 우리시에 발표했다. 다음 달 ‘지난호에 내가 읽은 한 편의 시’코너에 신현락 시인이 리뷰작으로 다루어 주었다. 많은 시인들로부터, 특히 여류시인들로부터 나의 작은 용기가 격려와 칭찬을 받았다. 물론 나는 이 시가 잘 쓴 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적으로 부족하고 어설픈 점이 너무도 많음을 잘 알고 있다.

“이영혜의 시 「아까시 꽃 피면」은 비극적인 상항을 말하면서도 간결하고 아름답다. 이 간결하고도 아름다움을 환기하는 힘은 비유에서 나온다…….시인의 상상은 나와 나로부터 지워진 아이들이나 그럴 수밖에 없었을 현실의 경계와 대립을 아까시 향과 꽃의 이미지를 통해 무화시킨다. 이 시의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인 ‘흰 젖을 몽글몽글 게워내’게 하는 것은 나에게서 지워져 나를 원망하고 있을 아이들이나 그 아이들을 지우고 참회에 젖어 있을 나에 대한 사랑과 비극적 정황에서도 이 세계를 행복하게 보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비유는 단순히 잘 꾸며진 수사 이상의 것임을 이 시를 통해 확인하는 기쁨을 가지는 것이다……. (신현락 시인의 「아까시 꽃 피면」을 읽고 중에서)”

처음엔 무척 서운했지만, 곧 안이했던 내 시작 태도를 호되게 짚어준 C시인이 진정으로 고마웠다. 그 후로 아직까지도 그의 시와 시작 태도를 내 시가 닮아야 할 성실한 표본으로 삼고 있으며, 진심 어린 고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는 그를 시인으로서 존경하고 있음이다.

나에게 시 쓰기는 많은 부분, 결핍과 상처 덧내기이며 또한 치유이다. 나는 시를 통하여 내 상처를 붙잡고 아직 아물지 않은 그 생살을 들여다본다. 때로는 그 살 틈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상처를 덧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상처를 어루만지며 아픔을 치유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한 편의 시를 낳을 수만 있다면, 아픔과 괴로움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맞서서 반갑게 받아들이리라. 시는 결핍과 상처의 고통 속에 피어나는 한 떨기 영혼의 꽃이 아니겠는가?
좋은 시와 좋은 시평 /유종호

시의 조건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물음에서 적정성 있고 활용 가능한 반듯한 대답이 나오기는 매우 어렵다. 좋은 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일반론이 있다면 좋은 시가 제가끔 독자적인 방식으로 좋은 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김소월의 「초혼」,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정지용의 「향수」,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는 각기 1920년대에 나온 우리 시의 수작들이다. 그러나 이 시편들의 공통분모를 찾아서 정의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또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오장환의 「The Last Train」, 이용악의 「풀벌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김광균의 「와사등」, 서정주의 「자화상」,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 등은 1930년대에 발표된 수작 시편들이다. 역시 공통분모를 찾아내어 일람표를 작성하는 일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같은 사정은 한 시인의 작품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20세기 한국시인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시인은 김소월일 것이다. 보통 독자들이 막연히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통념에 가장 들어맞는 시편을 다수 보여준 시인이 김소월이다. 아마도 김소월을 통해 보통 독자들이 시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게 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김소월의 경우 가령 「진달래꽃」 「가는 길」 「산유화」「엄마야 누나야」 「팔베개 노래」 「삭주 구성」 사이의 공통점도 사실은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가 리듬에 대해서 매우 민감했으며 시편의 음률성에 많은 배려를 했다고 하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하다. 또 그의 이러한 성향이 우리 구비 전통에 대한 청각적 충실에서 유해하다는 것을 지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산유화」가 어째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보다 좋은 시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란 겉보기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동시대 우리 시를 두고도 그러한데 거기에다 동서고금의 무수한 시를 두고 좋은 시를 정의하는 것은 더욱이나 어렵다. 그리고 이럴 경우 제기되는 막연한 일반론은 실제 작품에 적용할 때 별 실효성이 없다. 지속적인 작품 향수를 통해서 좋은 시에 대한 인지 감각을 기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은 시평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시의 좋은 점을 인지하고 독자들에게도 그러한 인지 감각을 길러주는 종류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우리가 분명한 리트머스 종이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한 리트머스 종이를 마련하려는 기도가 있다면 그 자체가 벌써 수상쩍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구체적인 사례를 상정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좋은 시평에 대한 음화적(陰畵的)인 접근이 혹시 좋은 시평에 대한 정의의 근사치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좋지 못한 시평의 성질을 열거함으로써 좋은 시평의 이상형을 역구성(逆構成)해볼 수 있겠다는 뜻이다. 가령 시작품과 무관한 평자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상을 늘어놓는 글이 있다면 그 글은 결코 좋은 시평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특정 작품의 텍스트에서 벗어나서 시인의 개인적 삽화나 전기적 사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면 그 역시 좋은 시평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작품에 대한 부대상황의 설명으로 비평을 대체하는 경향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것은 독자들의 시인에 대한 호사적(好事的) 호기심을 충족시켜 흥미 있게 읽힌다는 사정도 가세하여 만연하는 경향이 있다. 시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시 자체의 이해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심성향을 가지고 있다.

발생적으로 보아 서정시는 노래에서 나왔다. 노랫말에서 나온 시가 언제나 최초의 형태나 성질을 고수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격 변화나 형태 개변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근본적인 성격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미 서정시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일 터이다. 우리는 변화 속에서도 유지되는 지속성과 동일성을 인지하게 된다. 서정시에서 음률성이나 리듬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장르적인 특성을 유지해주는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와 뜻의 조화로운 균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소리가 따라주지 않는 뜻은 산문으로 근접해 가고 뜻이 따라주지 않는 소리는 울림과 무게를 갖지 못한다. 서정시의 이상을 이렇게 소리와 뜻의 조화로운 균형에서 찾는다면 소리 쪽을 도외시하고 뜻에만 매달리는 접근 태도는 매우 편향적인 접근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언 위주로 시에 접근해 가는 것은 시에 대한 일면적 파악으로 끝날 공산이 커지게 마련이다. 시를 산문처럼 대하는 셈이다. 전언 위주의 접근법으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나는 시평은 따라서 좋은 비평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말이 뜻의 비중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20세기의 한국 시사(詩史)는 번역시나 번역 시형이 주류로 부상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1920년대의 김소월, 한용운에서 세기말의 젊은 시인들에 이르는 시를 일괄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번역 시형 이란 공통성이다. 시조도 아니고 가사(歌辭)와도 다른 20세기 한국시가 형태상으로 「두시언해」와 가장 닮아 있다는 것도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번역시를 대할 때 우리는 원시(原詩)의 소리가 실종된 뜻과 마주치게 된다. 소리를 사상(捨象)하거나 괄호 속에 집어넣고 뜻 위주로 접근하니까 자연 전언에 대한 배타적 관심이 부지중에 강조된다. 소리는 도외시하고 "나는 천 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뜻에 열중하고 그러한 버릇이 확대 재생산되어 오로지 뜻과 전언에 치중하는 시인이나 시평을 목도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성향이 시평의 이상향은 못 될 것이다.

훌륭한 시인들은 대개 고유의 독자적인 언어 구사를 실천하게 마련이다. 스타일은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미숙한 시인들은 파생적(派生的)인 언어 구사에 익숙해 있는 경우가 많다. 편향된 접근법은 독자적인 언어 구사나 파생적인 언어 구사에 대해서 대체로 함구한다. 따라서 규격화된 상투적인 말씨나 표출에 대해서도 함구하기가 십상이다. 선행 시편과의 관계에 대해 함구하고 문학행위가 결국은 문학적인 대차(貸借)관계의 연쇄임을 소홀히 하는 것도 문제이다.

시의 언어는 일탈의 언어요 통념 거부의 언어이기 때문에 문법적 교란과 통사법적 위반이 특징인 시도 많다. 사회의 거부는 시에서 문법과 통사법의 거부로 흔히 표현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시의 가독성은 떨어지게 마련이며 그러기 때문에 반복적인 읽기가 불가피해진다. 이 점에 시의 매력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독성이 떨어지는 불가해한 시를 일률적으로 숭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슨 소리인지 분명치 않은 것에 아무런 회의를 표명하지 않고 난해한 부분의 해명과 해석 없이 변죽만 울리는 시평이 의외로 많다. 좋은 시평에서 가장 떨어져 있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위에서 부정적으로 거론한 국면이 반듯하게 역전되어 있는 시평이 좋은 시평의 이상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좋은 시가 그렇듯이 좋은 시평도 저마다 독자적인 방식으로 씌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이상형은 없기 때문이다.

출처, 간이역에이는시노을
출처 : 너에게 편지를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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