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자연적인 언어와 인위적인 언어

아리박 2012. 2. 16. 06:42

자연적인 언어와 인위적인 언어 / 양현주


때 시의 언어가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즉 고전주의 문학이론에 의하면 시어(poetic diction)는 인위적, 미적인 것이며 따라서 비속한 일상어가 아니라, 일종의 아어(雅語)여야 한다는 주장이 강렬하게 일었었다.
이러한 고전주의적 주장에 대해 정면적으로 대립한 것이 낭만주의의 견해이다.
낭만주의의 주장은, 시어는 비속한 언어가 아니고 아어여야 한다는 고전주의 입장에 강한 비판을 가하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새로 제기된 낭만주의적 시어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 논의의 직접적인 단서가 된 것은 위리암 워즈워드(W.Wordsworth,1770-1850)와 사무엘 테일러 콜릿지(S.T.Coleridge,1772-1834)의 공동시집인 {서정민요집}(Lyrical Ballads, 1798)의 재판 서문이었다.
즉 워즈워드는 {서정민요집} 의 서문에서 시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시의 언어는 인습이 아니라는 것, 인간의 정서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말로든지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였다. 이러한 생각이 발전하여, 참된 시어는 자연적 언어요, 그릇된 시어는 인위적 언어라는 명제를 생산했다.
물론 시에는 적절한 어휘의 선정과 효과적인 배열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를 지시하는 조사법이라는 것이 있지만 시창작에서도 지나친 손질은 자연스러움을 훼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나친 손질이란 지나친 인공적 수식을 말하는 것이며, 그 인공적인 것은 자연스러움을 훼손하고 자연스러움의 훼손은 곧 감동의 훼손을 가져 올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내 가슴 속에 가늘한 내음 / 애끈히 떠도는 내음 / 저녁해 고요히 지는 제 / 머언 山 허리에 슬리는 보랏빛

오! 그 수심 뜬 보랏 빛 / 내가 일흔 마음의 그림자 / 한 이틀 정녈에 뚝뚝 떠러진 모란의 /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흰 봄 흐르는 마음 / 헛되히 차즈랴 허덕이는 날 / 뻘 우에 철석 갯물이 노이듯 / 일컥 니는 훗근한 내음

아! 훗근한 마음 내키다마는 / 서어한 가슴에 그늘이 도나니 / 수심뜨고 애끈하고 고요하기 / 山허리 슬니는 저녁 보랏 빛
- 김영랑 <가늘한 내음> 전문 -


김영랑은 1930년대에 이미 언어에 대한 미감이 어떤 것인가를 자각하고 그것을 실천한 시인이다. 그러나 위의 시를 주목하여 읽으면 그가 선택한 시어들이 평범하고 예사로운 것이 아니며 과도한 애정으로 수정한 시어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시에서 '가늘한', '애끈히', '슬리는', '일컥', '서어한', '수심뜨고' 등의 어휘와 이런 어휘들의 집합인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훗근한 마음 내키다마는', '서어한 가슴에 그늘이 도나니'등의 구절들은 독자로 하여금 주의력을 집중하여 해석하고 그 뉘앙스를 감지하는 데에 매달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김영랑의 다른 시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 아실 이],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사행시], [오매 단풍들겄네] 등을 읽을 때의 감동과 비교할 때 확연히 구별되며, 된다. 그것은 이 시들이 인공적인 언어가 아닌 자연적인 언어로 구사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전략-
수풀과 벌레는 자고 깨인 어린애
밤새어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방에 문을 달고 별을 향해 숨쉬지 않았느뇨
햇발이 처음 쏟아와
청명은 갑자기 으리으리한 관을 쓴다
그때에 토록하고 동백 한 알은 빠지나니
오! 그 빛남 그 고요함
간밤에 하늘을 쫓긴 별쌀의 흐름이 저러했다
-후략-
- 김영랑 <청명> 중에서-

'남았거든 나를 주라 /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이러한 표현에는 억지도 없고 꾸밈도 없다. <청명>의 언어들은 일상의 언어가 그대로 시의 언어로 채택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가 자연스러우면 정서의 전달에 애로가 없으며, 정서의 전달이 제대로 되면 감동력은 따라서 커지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자신이 발명해 내지 않는다. 시인은 언어의 창조자가 아니라 가장 적절한 언어를 발견하는 사람이요, 가장 적절하게 운용하는 사람인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밖에 있는 소재 가운데서 특수한 유연 관계를 발견해 내어서 시 가운데 언어를 통하여 이식한다.
언어는 공간과 시간의 변모와 요구에 부응하면서, 점진적으로 변천하는 역사성을 가진다. 그리고 언어의 역사성은 곧 시어 역시 변천한다는 말과 연결된다. 시어가 변천하는 것은 시간이 변하고 사회나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시적 소재가 달라진다는 외부적 이유도 있지만, 시인 스스로가 좀더 경이롭고 참신하며 감각적이고 생명력 있는 언어를 향해 끊임없는 시도와 탐색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시는 산문을 앞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렇다고 볼 때 시의 언어는 사람의 투박하고 절실한 정감을 토로하는 직정의 언어로서 인간의 생활에 밀착된 말이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며 선호도가 높은 시들은 대부분 생활에 밀착된 기초적 어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러한 경향의 시의 대표적인 예로 김소월의 시를 들 수 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서름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金素月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전문 -

이 시에서 어렵거나 생소한 말은 단 한 마디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정성을 다해 자신의 속뜻을 내보이는 듯한 시이다. 봄가을, 밤마다, 예전, 몰랐어요, 이들은 모두 기층언어이며 성장의 초기 단계에 익힌 단어라는 사실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유아기에 습득한 기층언어일수록 함축과 함의는 풍요하고 강렬하다.
기층언어는 사람이 가장 소박한 본능의 상태에 있을 때, 교양과 인공적 수식과 위선의 옷을 벗고 싶을 때, 위기 상황을 만났을 때, 터져나오는 개인적 차원의 방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층언어가 민족적인 단위로 나타날 때는 그 민족을 결속하는 하나의 모티브로 작용할 수도 있다. 개개인이 의식치 못하는 사이 민족의 감정과 태도의 방향을 결정하는 잠재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외국의 거리에서 듣는 '아리랑' 민요가 애국심을 자극하기도 하고, 무심결에 터져 나오는 '에그머니나'하는 감탄사가 민족의식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한다. 타지에서 듣는 고향의 사투리가 친근감과 함께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도 같은 차원의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기층언어가 동시에 겨레의 생활과 밀착된 토착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교양체험의 축적과 함께 증가하는 후기 습득 언어가 토착어가 아니라는 사실은 후기 습득언어로 구성된 시의 호소력을 감퇴시키고 그 함축을 그만큼 불모화 시킨다고 할 수 있다. 생활과 유리되고 또 우리들의 잃어버린 낙원과의 거리가 그만큼 현격하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가 함축에 무겁게 의존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시 언어가 탕진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양체험의 축적에 따라서 증폭하는 후기 습득 어휘 체계를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처지에 있다.

유종호는 이상과 같이 지적하면서 후기 습득 언어로 많은 시를 발표한 시인의 예로 김광섭씨를 들었다. 김광섭씨의 시로서 호소력이 큰 작품들은 그의 후기 시들이며 그 후기란 바로 김광섭씨가 실어증으로 고생하던 시기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실어증은 시인으로 하여금 가장 원초적이며 기본적인 언어만을 남기고 모두 망각하게 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유종호가 지적한 것처럼 김광섭의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 <황혼이 울고 있다>, <山>등은 교육받은 언어로 시를 쓰려고 했던 초기의 실패를 극복한 후, 즉 실어증 이후의 시들인 것에 주목하게 된다.


비애의 언어를 쫓아내고
신념의 중세를 쫓아내고
시대의 고뇌를 쫓아낸 뒤

나의 체중이 경기구가 되어 난다.
나의 미래가 경쾌하게 상승한다.
그 다음엔 관모같이 나는 하늘지경에 가서 운다.
- 김광섭 <공막(空寞)> 전문 -

이 시에 보이는 '비애', '언어', '신념', '중세', '체중', '경기구','미래', '상승', '관모'등 대부분의 어휘들이 어릴 적에 익힌 기층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후기의 교육과 체험으로 습득한 언어이며, 더구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어휘들이어서 호소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것들이다. 삶을 바라보는 순진한 시선, 때로는 단조롭고 때로는 공포를 주며 또 때로는 불가사의한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우주의 섭리,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와 순환을 우리는 기층언어로써 풍요롭게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기층언어만으로 삶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정서를 충분히 호소할 수 있다. 즐겨 애송되는 시들이 모두 모국어의 기처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해도 될 것이다.
한국의 시는 자연 속의 인간세계에서 차츰 도시문명 속으로 판도를 넓혀 왔으며 그러한 도시문명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좀더 문명적인 후기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새로 기항한 도시와 문명도 시인이 안주하기에는 적당한 곳이 못되어서 다시 고향 같은 자연으로 돌아가 인간의 내면적인 생명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현대시에서는 비어와 속어가 대담하게 사용되고 있다.

시만 쓰면 다냐
살림이 기우는데
시만 쓰면 다냐
공자 말씀에 토나 달고 앉아서
술잔에 코를 박고 졸기나 하고
남들이 술값 낼 때
구두끈만 매면 다냐
나라가 꼬이면
말이 어지럽고
말이 헷갈리면
넋도 달아나느니
네 넋은 늬집 개가 물어가서
거렁뱅이 맨발로 떠도느냐
헷갈리지 마라,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한국어가 아니다.
- 정희성 <넋두리> 전문 -

비천함이나 세속성으로 친다면 그 정도가 별로 심한 편이 아니다. 아무런 저항도 제약도 받지 않은 자연적인 언어로 된 시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읽는 데에도 부담이 없다. 이는 긍정적인 눈으로 볼 때 詩語의 영역이 확대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앞으로 무한정 확대된다면 그만큼 부작용도 증가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인이 그의 작품 속에서 어떤 언어를 선택하여 사용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요, 시인이 선택한 언어가 그의 시정신을 어떻게 가다듬고 응결시키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