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젖줄이라고 일컬어지는 한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세종실록지리지> <택리지>를 비롯한 옛 문헌들에는 "오대산 우통수"라고 기록돼 있지만 실측 결과 강원 태백시 창죽동 검용소가 우통수보다 더 길어 지금은 검용소를 한강의 발원지로 보고 있다. 하루 2천여 톤가량의 수원(水源)이 석회암반을 뚫고 나온다는 검용소는 전설에 의하면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이라고 한다.
흐르는 시냇물이 모이고 모여 삼척시 하장면에 있는 광동댐에 이르고, 임계면 낙천리를 지난다. 골지천변에 세워진 구미정은 조선 숙종 때 이조참의를 지냈던 이치가 기사사화(己巳士禍)를 피하기 위해 봉산리에 은거하면서 세웠다. 정자를 중심으로 주위 경치가 아홉 가지 특색이 있다고 하는데, 기암절벽 위에 세워져 그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노일마을과 봉정리를 지난 강물이 유장하게 흘러서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아우라지에 이르는데, 이곳은 정선아리랑의 시원지(始原地)다. 정선아라리가 처음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인 5백여 년 전부터였다고 한다. 고려왕조를 섬기던 선비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을 다짐하면서 깊은 산골인 정선 두문동에 은신하다가 지금의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 (居七賢洞)으로 옮겨 살았다. 그들이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본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구슬프게 살아가는 모습을 한시(漢詩)로 지어 읊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정선 떼 한 바닥이면 황소도 샀던 옛 시절
강물은 구슬픈 아우라지 노랫소리를 안고 정선을 지나 동강 입구인 광하리에 이른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강, 서쪽은 서강, 혹은 숫캉 암캉이라고 부르는데 동강에는 제1경이라는 어라연을 비롯한 열두 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자리하고 있다.
정선군수나 영월군수 월급이 20원일 때 정선에서 떼 한 바닥 타고 가서 그것을 주인한테 넘기면 단번에 30원을 받았다. 보통 떼꾼들이 정선에서 서울을 한 번 다녀오면 그 돈으로 큰 황소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떼돈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떼꾼들의 노랫소리가 사라진 동강을 지나면 비운의 임금 단종에 얽힌 이야기가 서리고 서린 고장 영월에 이른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라는 시조를 읊조리며 흘러간 영월읍 하송리에서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이 된다.
영월을 지난 강물은 단양을 지나며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 1894년 봄에 서울에서 이곳까지 배를 타고 답사를 왔던 사람이 영국 왕실의 지리학자인 버드 비숍 여사였다. 그가 남한강의 선박을 조사한 결과 하루 평균 75척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며, 전 구간에 걸쳐 다리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가 운영하는 무료 여객선 47척이 왕래하고 있다.
단양팔경 중의 한 곳인 도담삼봉을 지난 물길은 충주호, 장호나루에 이른다. 조선 중기 문장가인 김일손이 "열 걸음을 걷는 동안에 아홉 번을 뒤돌아볼 만큼 아름다운 곳"이라고 격찬했던 청풍 일대가 충주댐에 수몰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충주댐을 지나면 탄금대에 이르고 바로 아래 부근에서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을 만난다. 신라 문성왕 때에 나라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중앙탑을 지나면 남한강변에 목계나루가 있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신경림 시인의 절창 "목계나루"로 남아 있는 목계는 조선 후기에 마포 다음가는 한강의 주요 포구였다.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 하면 짧으면 사흘, 길면 닷새나 이레씩 섰던 목계장터는 1920년대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수송 기능이 완전히 끊어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에 나룻배도 사라진 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남한강의 여러 물굽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가 신륵사(神勒寺) 부근일 것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르는데 주변의 풍경이 하도 수려해 예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 초기 학자였던 김수온은 <신륵사기>에서 "여주는 국도의 상류지역에 있다"고 썼다. 여기서 국도는 한강의 뱃길을 말한다. 신작로나 철길이 뚫리기 전까지는 경상도의 새재를 넘어온 물산이나 강원도, 충청도에서 생산된 물산들이 한강 뱃길을 타고 서울에 닿았으므로 한강의 뱃길을 <나라의 길>로 부른 것이었다.
정선 아우라지에서 띄운 뗏목이 물이 많은 장마철이면 서울까지 사흘이면 도착했다는데 1974년 팔당댐이 생기고 이어 1985년에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나라의 길>이라고 일컬어지던 뱃길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팔당대교 아래 미사리 부근에서 한강의 마지막 여울을 볼 수가 있다. 강의 생명은 여울이고, 여울이 많을수록 강은 건강하다.
한강유역은 삼국시대의 각축장이었다. 삼국의 흥망성쇠가 연결돼 있었다. 한강유역이 사람과 물자를 대주는 중요한 구실을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개성에서 서울로 도읍을 옮긴 뒤로 더욱 중요성이 더해졌다.
조선왕조 오백 년 사직을 지켜보았던 서울을 흐르는 한강에 얼마나 많은 나루가 있었던가. 광나루, 송파나루, 한강진나루, 동재기나루, 마포나루, 양화나루 등 수없이 많은 나루들을 통해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다리와 남과 북에 개설된 강변도로를 통해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기우 속 희미해진 충주댐, 조강나루 흔적도
서울 부근을 흐르는 한강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섬이다. 3백60만 평쯤 되던 잠실섬, 40만 평쯤 되던 부리섬, 옥수동 부근에 있었던 저자도, 밤섬, 선유도 등이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사라지거나 겨우 그 흔적만 남기고 있다. "모기가 오줌만 싸도 넘친다", "매미가 하품만 해도 넘친다"고 걱정했던 잠실 섬사람들의 홍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행주산성을 지난 한강은 임진강을 받아들인 뒤 애기봉 쪽을 향해 흐른다. 애기봉은 일명 쑥갓머리산으로 높이 1백43미터다. 평안감사와 사랑을 나누었던 애기의 슬픈 사연이 서려 있는 애기봉 아래에 한강의 큰 나루였던 조강포가 있었다.
조강나루는 통진에서 개성으로 건너던 큰 나루였다. 조강나루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개성이나 한양으로 세미(稅米)를 싣고 가기 위해 만조시간을 기다리는 사공들이 모이는 큰 포구였다. 그러나 1953년 휴전협정에 의해 조강포는 잠정 폐지됐고 현재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 기름진 들판이 되고 말았다.
경기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건너편에 있는 유도 부근에서 한강은 강으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바다로 들어간다.
강에 기대어 사는 이들이여, 유장한 강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라. 걷다 보면 강물이 그대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나 아프다"고.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오염된 강물이 머물지 않고 흐르면서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것을 바라보라. 강을 따라 걸으며 강이 사람과 하나라는 것을 느껴보라.
글·신정일(문화사학자, 우리땅걷기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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