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산방(단양)

퇴계의 매화 사랑 두향 사랑

아리박 2009. 12. 1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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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를 혹애매(惑愛梅)토록 한 두향(杜香)의 비석

 

◈ 퇴계를 혹애매(惑愛梅)토록 한 두향의 비석.

 

 

 

德 田    張    俸   赫

 

 

퇴계(1501-1570 - 객관적 호칭으로 존칭을 생략함)는 매화를 끔찍이 애호(惑愛梅)하였다. 평생동안 매화에 관하여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심령의 혜안으로 매화의 특성을 투시하고, 담아한 필촉으로 매화의 신령스런 자태를 그려내어, 매화라는 단일소재로 여든 다섯 제목 (85題)에 118편의 시문을, 그것도 자필로, 자서하여 우리나라 문학사상 유례 없는 매화 시를 지을 만큼 매화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그래서 퇴계매화시첩(退溪梅花詩帖)을 남겼을 뿐 만 아니라, 나이 60세에 완공한 도산서원에도 매화 여러 주를 심어 저 유명한 도산매원(陶山梅園)을 이룩하였다. 퇴계가 매화에 관하여 특별히 애착을 느낀 시기는 40대 후반에 관기 두향으로 붙어 매화 한 그루를 선물로 받은 이후 붙어 임을 여러 정황에서 알 수가 있다.

 

 

만인의 호주머니 속을 드나드는, 신권 화폐 천 원의 앞면에는 퇴계의 초상과 함께 매화 꽃 20여 송이가 피어 있다. 우리가 매일같이 매화꽃을 손에 쥐고 생활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한 사람이 430여 년 전에 퇴계에게 분매 한 그루를 선사란 관기(官妓) 두향(杜香)이였다면 견강부회 일가?.

 

 

사람에게 인권이란 만인이 평등하다지만 각자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서로 다른 품위를 느끼듯이, 천하에 피어나는 일 만가지 꽃들도 어느 한 송이라도 모두가 아름답지만, 그 꽃의 피는 시기와, 모습과, 특성에서, 그 꽃에 대한 품계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은 매화를 특히 좋아하여 시문으로 찬양하여 왔고, 그림으로 아름답게 그리려고 애써 왔다.

 


1.  매화의 특성.

 

 

새 해가 되면 나무로서 가장 빨리 꽃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 매화다. 눈 속에 꽃이 피어도, 온화한 날씨인양, 그 차가움 속에서 향기를 발한다. 매화 향기는 아름답고 원만하여 어느 사람이고 싫어하지 않는다. 차가운 밤에 얼음이 얼어도 꽃의 모양은 오히려 싱싱하고 색상이 선명하다. 이토록 추위를 넘어서는 기골(氣骨)이 있어 북송의 이름난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6.12.19-1101.7.28])는 옥골빙혼(玉骨氷魂)이라 표현하였고, 주자지(周紫芝, 1082-?)의 죽파시화(竹坡詩話)에서 빙기옥골(氷肌玉骨 - 얼음 같은 살결과 옥 같은 뼈대)라 표현하였는가 하면, 조선 선조 때의 시인  權 필 (1569-1612)은 그의 특이한 시 형식으로 표현한 매화 시에서 그 가지를 빙골(氷骨- 얼음 뼈)에, 매화 꽃 닢을 옥시(玉 -옥 같은 뺨)이라 하였다.

 

 

 

 


매화 매(梅)라는 문자는 갑골문에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최초로 매화를 거론한 전적은 시경·소남의 표유매( 有梅-매실 따기)편에 나온다. 이 시에서는 열매만을 노래하였고, 꽃은 노래하지 않았다. 매화는  눈 속에 피어나서, 입하(立夏)가 지나야 열매가 익기 때문에 나무 열매 중에 가장 맛이 시다. 즉 동방 목(木)기운을 가장 많이 함유한, 온전한 산미(酸味)를 지닌 열매가 매실이다.

 

 

 


2. 단양 기생 두향(杜香).

 

조선조 중종 년 간에 단양에는 이름난 기생 두향이 있었다. 다섯 살 되면서 그 아비를 잃고, 열 살 되던 해에 그 어미마저 사별하자 그녀의 빼어난 자태를 아까워한 한 퇴기(退妓)에 의하여 길러지면서 기적에 오르게 되었다. 몸매도 아름다웠거니와 거문고에 능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또한 난(蘭)과 분매(盆梅-화분에 매화를 기름) 솜씨가 있었다. 

 

 

그녀의 성명은 두향(杜香) 또는 두양(杜陽)이라고 알려져 오고 있으나 그녀의 성씨가 안(安)씨라고 전해 오기도 한다. 안씨라는 성씨에 대하여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으나, 매년 가을이면 안씨 문중 대표들이 10 여명씩 두향의 묘소를 참배하고 간다는 사실을 단양 군청 재난관리과 행정선을 운행하는 김병근(019-422-0480)선장의 증언에서 알 수 있다.

 

 

두향의 출생지는 단양군 단성면 두항(斗抗) 마을로, 이 마을은 두향의 묘소에서 강 건너 국도변에 있다. 옛 조선 시대만 하드래도 여성에게 이름이 뚜렷하게 없는 시대이었으므로 그 출생한 마을 이름을 따 부르면서 문자가 두향(杜香)으로 버뀌 였을 것이라 추정 해본다.

 

 

 

 

두향과 이름난 학자 퇴계와의 사연이 직접적으로 기록된 문서는 아직 발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퇴계의 제자이자 임진왜란 때에 영의정을 지낸 명신 이산해(李山海-한산이씨)의 가문에서 한일합병 이전까지 두향의 묘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왔다는 사실이다.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李之蕃)이 벼슬을 버리고 단양의 구담(龜潭)근처로 내려와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당시 단양군수로 재임 중이던 이 퇴계(진성이씨)는 가끔 그를 방문한 일이 있거니와 그의 아들인 이 산해는 스승의 애인인 두향의 무덤을 대대로 내려오면서 돌보며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는 것이 서로 본(本)이 다른 두 이씨 집안의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또한 퇴계의 10대 봉사손(奉祀孫)이었던 고계 이휘영(古溪 李彙寧)은 밀양부사, 동래부사를 지낸 사람으로, 조정의 도총부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에 서울에서 멀리 단양까지 두향의 무덤을 찾아갔던 기록이 <고계문집>에 나온다.  

 

 

그런가 하면 이휘영의 고손인 한문학자 이가원 교수가 중년에 두향의 묘소에 들렸다가 봉분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인근 마을 사람에게 부탁을 하여 베어 내도록 하였는데, 1974년에 소설가 정비석이 조선일보에 <명기열전>을 연재하면서 두향의 묘소를 십 수년을 두고 애타게 찾는다는 말을 듣고, 이가원 교수는 정비석 소설가에게 두향의 무덤 위치를 알려주면서 봉분에 소나무 그루터기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정비석은 그 잘라낸 소나무 그루터기로 두향의 묘소임을 확인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무덤 앞에 표석을 새워 달라고 호주머니 돈을 털어 주었다는 내용을 <명기열전> 두향편의 앞 부분에 서술하여 놓았다.

 

 


3. 두향의 묘비를 찾아서.

 

두향의 묘소는 단양팔경으로 널리 알려진 구담봉과 옥순봉을 끼고 펼쳐지는 충주호의 장회나루 물 건너에 있다. 장마가 오기 전에 묘비 답사를 하려면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데, 물고기의 산란기라 소형 배를 구하기 어려워하던 차, 다행히 동방문화진흥회 사무국에서 담양군청의 재난 관리과 소속 행정지도선 운행 팀과 교섭이 잘 되어 지난 5월 31에 무사히 현장 답사를 할 수 있었다.

 

 

 

 

 

이날의 답사에는 담양경찰서 주강종 정장, 담양군청 김천수 행정지도선 운행팀장, 김병근 행정지도선 선장이 왕복 도수에 애써 주었다. 충주호의 만 수위는 145 m 인데, 답사하던 날의 수위는 여름 장마와 홍수를 대비하여 만 수위에서 약 30 여 m 수위가 줄어 있었다. 그러한 관계로 두향의 묘소 편에 접안 시설이 없는 상태에서 내리고 타는데 어렵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선장의 능숙한 운행 솜씨로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였다.

 

 

드디어 두향의 묘소 앞에 다 달았다. 주강종 정장은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하듯 준비해간 검은콩 막걸리에 오징어포를 묘 앞의 상석에 진설 해 놓고 은연중에 묵념할 것을 부탁하는 눈치이다. 다 같이 묵념을 마치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니 전후좌우가 절경이오 명승이다. 우로는 구담봉이 위용을 자랑하듯 하수(下水)를 막아주고, 좌로는 풍광이 수려하여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강선대(降仙臺)의 옛 바위가 충주호 물 가운데로 길게 내밀어 맑은 햇살에 반짝이는 물 위로 특유한 모습이다. 묘소 앞으로는 강 건너에 제비 봉의 형상은 제비가 날개를 펴고 물을 건너오려는 모습인양 좌우로 균형이 잡혀 있고, 뒤로는 말목 산 능선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묘소 앞에는 아직 다 시들지 않은 꽃바구니가 놓여 있는데,  늘어뜨린 두 가닥의 리본에는 <제 21회 두향제.> <단성향토문화연구회>라고 단정하게 쓰여있다. 듣자하니 불과 10여 일전에 이곳 장회나루 광장에서 제 21회 두향제가 성황리에 열렸다고 한다. 그래서 두향의 묘소는 이 근년에 이르러 단성향토문화연구회에 의하여 잘 유지 보존 되어가고 있다.

 

 

묘소 앞에는 두기의 비석이 서있다. 묘소의 오른편에 서있는 비석은 <杜香之墓>라는 네 글자가 사람의 무릅보다 조금 높은 크기의 검은 대리석이다. 뒤쪽을 살펴보니 甲子(1984) 十月이라 쓰여 있다. 이 甲子 十月에 두향의 묘소를 강선대 아래에서 200 여 m 떨어진 이곳으로 이장한 시기이다. 이 때에 묘소 이장을 주관한 사람은 당시의 장회리 우태욱 이장이었다.

 


 두향의 묘소는 본래에 강선대(降仙臺) 아래로 3-40m 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이 시작되면서 물에 잠길 것을 염려하여 인근 마을 유지들과 퇴계 후손 집안에서 의견을 모아, 강선대로부터 좌측으로 200 여m,  위로 40 여 m 의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묘소의 왼편에도 또 한기의  비석이 서 있는데 戊寅(1998)년 4월에 단성향토문화연구회에서 주관하여 새운 비석이다. 비문은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여 현대문으로 쓰였으며, 두향에 관하여 알려진 일상적인 내용이 적혀 있다.

 

 

 

3. 외로운 넋을 기리는 두향제(杜香祭).

 

 

장회나루 에서 물 건너 두향의 묘소를 다녀오고 보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두향제 행사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궁금하여 이를 주관하는 단성향토문화연구회  회장에게 만나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때가 때인 만큼, 농촌에서는 일년 중 가장 바쁜 시기인지라, 사과의 어린 열매 적과(摘果)에 바쁘다는 말을 듣고, 두향의 묘소에는 동행을 못하였으나, 점심때에 잠깐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두향제의 모습.

 

두향제는 1987년 5월 부터 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올해는 제 21회 두향제를 치렀다.  장소는 두향의 묘소가 건너다 보이는 장회나루 주차장에서 열린다고 한다. 두향제를 지내기 위하여 매년 년 초부터 추진위원회가 구성이 되는데 단성향토문화연구회에서 주관하고 단양문화원과 단양군청에서 협찬이 있다.

 

 

두향제가 열리는 매년 5월이면 주최측에서 퇴계의 후손 문중에, 두향제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하는 청첩장을 보내고 있는데  매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어 고맙게 생각한다는 단성향토문화연구회 서찬석(011-462-9556)회장의 말이다.

 


두향제가 치루어 지는 날에는, 추진위원들이 먼저 모여 물 건너 두향의 묘소에 찾아가 헌화하고 묘제를 지낸 다음, 건너와서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행사는 하루종일 진행되는데, 살풀이 굿, 살풀이 춤, 풍물패 놀이, 설 장고와 무용, 바라춤, 사물놀이, 퇴계 암각문 탁본 전시, 단양문학회 주최 시 짓기 대회, 단양 미술가협회 주최 붓글씨 쓰기 대회, 농악놀이, 시상과 뒷 풀이 등으로 이어지게 되면, 하루해가 모자란다고 한다.

 

 

퇴계는 일찍이 구담봉의 장관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놓았다. 두향제가 거행되는 장소인 장회나루에서 구담봉은 지척의 거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관계로 매 번마다 이 시를 적어 놓고 두향제를 지낸다. 위 사진의 배후 오른 편에 적힌 시문이 바로 이 시이다. 

 

 

碧水丹山界(벽수단산계)-  푸른 물은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데,
淸風明月樓(청풍명월루)-  청풍에는 명월루가 있다 하네, 
仙人不可待(선인불가대)-  만나려던 신선은 기다려 주지 않아,
怊悵獨歸舟(초창독귀주)-  실망속에 외로이 배만 타고 돌아오네.

 

 

왼편에 적힌 시문은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 1720(숙종 46)∼1783(정조 7). )의 작품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孤墳臨官道(고분임관도) - 외로운 무덤 하나 국도변에 있는데,
頹沙暎紅 (퇴사영홍악) - 거치른 모래 밭엔 꽃도 볽게 피었네.
杜香名盡時(두향명진시) - 두향의 이름이 사라질 때면,
仙臺石應落(선대석응낙) - 강선대 바윗돌도 사라지리라.

 

 

이광려는 양명학에 뛰어난 학자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실용적인 학문에 전념하여 중국의 ‘농정전서’를 통해 고구마를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백성의 먹고 살수 있는 작물이라 여겨 보급시킬 뜻을 세워 조정에 상소를 올린 학자였다. 그 얼마 후에 조선통신사 조엄에 의하여 고구마종자가 일본에서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퇴계의 사후 150여 년이 되어, 월암이 두향의 묘소를 찾아간 이유는 그처럼 퇴계와 두향의 사랑이 시공을 초월한 로멘스 였기 때문이었을까.

 

 

이 외에도 두향의 무덤에 관한 시는 퇴계 이후 숙종년간에 단양군수를 역임한 수촌(水村) 임방(任 )이 쓴 시가 있는데, 그의 문집 수촌집(水村集)에 수록되어 있다.

 

 

4. 퇴계를 매료시킨 한 그루의 분매(盆梅).

 

 

두향의 어미는 죽기 전에 화분 속에 매화 한 그루를 잘 길러 냈는데, 매년마다 그 분매에서 꽃이 피고 있었다. 두향은 그 어미가 죽자 기적에 오를 때까지 고이 잘 길러 냈다. 그래서 평소에도 매화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듣자하니 단양의 제 15대 군수로 퇴계 이황이 부임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두향은 퇴계라는 신임 군수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여 수소문하여 보았다. 일찍이 퇴계는 조정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뜰에 핀 매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은 적이 있었다.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 뜰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 눈꽃 피니,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  -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보며,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 기러기 슬피 울 제 생각마다 산란하네.

 

 

이 시는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하기 6년 전인 무인(1542)년에 지은 매화 시 첫 작품이다. 그러나 퇴계의 <매화시첩>에 담겨있는 118편의 다른 매화 시는 그 저작 연대를 살펴본다면 여러 정황으로 보아 두향을 만난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두향은 퇴계가 매화를 두고 읊은 시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꼼꼼이 살펴보았다. 매화를 두고 읊은 시이기는 하나 나라의 어지러움을 개탄하는 우국지정이 어린 시임을 느꼈다. 비록 조정의 벼슬자리에 앉아 있으나, 바다같이 넓은 세상일이 좁은 연못 속에 뒤 엉겨 있는 듯, 어지럽고 산란함을 매화나무에 빗대어 읊은 시가 두고두고 음미할 만 하였다. 두향은 어느 사이 퇴계의 매화 시를 외우고 있었다. 

 

 

퇴계 이황은 48세 되던 무신 년 정월에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그 실은 청송 군수로 외직에 나가기를 원했으나, 단양군수의 직분을 제수 받게 되였다.

관기로서 두향은 신임 군수 퇴계 이황을 가까이 모시게 되였다. 두향은 사별하던 어미로부터 물려받아 그동안 애지중지 기르던 분매를 퇴계의 처소에  옮겨 놓았다. 때마침 퇴계가 단양으로 부임하던 시기는 이른봄이라 화분 속의 매화도 곱게 피어 은은한 향기를 내 뿜고 있었다. 처소에 든 퇴계는 환하게 피어난 매화를 보고 반기는 듯 하였으나, 이내 곧 매화 분을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 줄 것을 명하였다.

 

 

 

 

두향은 매화분에 관한 자초지종을 아뢰고, 6년 전의 퇴계가 읊은 매화 시를 외우면서, 매화는 고상하고 아담하여 속기(俗氣)가 없고, 추운 때에 더욱 아름다우며, 호젓한 향기가 뛰어나고, 격조가 높으며, 운치가 남다르며, 뼈대는 말랐지만 정신이 맑고, 찬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면서도, 곧은 마음을 고치지 않기 때문에 이 매화꽃과 함께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 단양 고을을 잘 다스려 줄 것을 아뢰었다.

 

 

퇴계가 두향의 말을 듣고 생각을 해보니, 두향의 속마음이 진실 된 듯 한데, 고을 백성을 다스리려 내려온 스스로가 백성으로부터 재물이나, 금전을 뇌물로 받는 것은 자기 스스로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나무 한 그루 처소에 가져온 것을 참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두향은 매화 한 그루를 또 구했는데 그 꽃 빛이 희다 못해 푸른빛이 나는 진귀한 매화였다. 그 청매를 퇴계에게 드리니 "나무야 못 받을 것 없지." 하고 그 나무를 아전으로 하여금 동헌 앞에 심도록 하고 즐겼다.

 

 

이 때에 퇴계는 첫 부인과 재취부인마저 사별하고, 아들도 이미 한 명이 유명을 달리한 때라, 인생의 깊은 고뇌와 함께 심신은 많이 쇠약하여 있었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시화(詩話)와 음률을 논하고, 산수를 거닐며 인생을 즐기기도 하였다.

 

 

5. 금보가를 짓다.

 

 

두향은 거문고에도 능해서, 잘 타는 솜씨로서, 가끔 퇴계의 피곤한 심신을 위로하였다.  퇴계는 단양 고을을 다스리면서 몇 가지의 문학 작품을 남겼다. 그 한 가지가 금보가(琴譜歌)로 거문고의 모형과 유래, 음조의 특성에 관하여, 천지 운행의 이치와 음양과 오행의 원리를 응용하여 장장 128행의 긴 시문을 남겼다.  하도수 55와 낙서수 45, 그리고 천체를 운행하는 28수(宿)를 합한 수로서 도합 128행의 시문이다.  퇴게의 일생동안 거문고를 가까이 한 시기는 단양에서 두향의 거문고 연주를 감상할 시기로 본다. 문장의 내용에 단산(丹山)이 거명되고, 단산은 단양의 예전 이름이다. 그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상략 -
옥 도끼로 찍어내어 三尺에 재단 하니, 上中下體 한 法이 天地人 三才로다.
內虛外實하야 陰陽을 배합하니, 三陽은 위에 있고 二陰은 아래 있다.
背部의 둥글기는 이 아니 天圓이며, 腹部의 모나기는 이 아니 地方인가.
上天에 남는 것은 天不足 西北이오, 下地에 남은 것은 地不滿 東南이라.
중략 -

 

 


靑絲로 끝을 이어 느리어 받힌 樣은,  丹山 碧梧枝에 鳳의 꼬리 깃이로다. - 하략.

여기까지의 내용은 거문고에 관하여 총체적으로 느낀 바를 음양의 원리와 천지운행의 이치로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이후의 문장 내용은 현(絃)과 음(音)관계를 오행에 배속한 원리에 따라 서술하여 놓은 내용이다. 오음을 오행에 배속하여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자.

 

 

상략 -
大絃은 濃濃하여 老龍의 울음이요, 小絃은 冷冷하여 仙鶴의 소리로다.
宮商角緻羽는 五音으로 벌여 있고, 水火木金土는 四時를 맡아있다.
第一은 象角하니 木音의 春聲이라, 東風 百花節에 杜鵑의 소리로다.
第二는 象緻하니 火音의 夏聲이라, 남산 松柏枝에 孔雀의 소리로다.
第三은 象商하니 金音의 秋聲이라, 西風 白帝城의 외기러기 소리로다.
第四는 象羽하니 水音의 冬聲이라, 北水 長江의 여흘 우는 소리로다.
第五는 象宮하니 土音의 雄聲이라, 春秋 戰國時에 地動하는 소리로다. - 하략 -

 

 

거문고가 비록 고구려의 왕산악에 의하여 제작 되였으나, 그 실은 중국의 엤날 칠현금을 바탕으로 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임을 퇴계는 간과하고 있었다.

 

 

 

6. 두향의 기지로 단양팔경 명명이 완성되다.

 

 

퇴계는 단양에 부임하면서 가뭄에 농작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어렵게 복도소(復道沼) 저수지를 막는 데에 힘썼다. 복도소가 완공되자 퇴계는 근처의 바위에 복도별업(復道別業)이라는 네 글자를 새기도록 하였다. 이 바위는 충북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이 저수지는 오늘의 단양읍 하방리 단양 천 변에 뚜렸한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단양의 경치 좋은 내용을 한가지 어휘로 묶어 부를 것을 생각하였다. 그것이 오늘날에 불려오는 "단양팔경"이다.  단양 팔경이란 도담삼봉, 석문,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구담봉, 옥순봉 등이다. 퇴계는 이 경치 좋은 여덟 곳을 단양팔경으로 명명하려 하였으나, 두향이 그 내용을 듣고 보니, 그 중에 옥순봉은 그 당시 단양 땅이 아니라 청풍 땅이었다. 두향이 출생한 곳이 바로 옥순봉 근처라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내용은 잘 알고 있었다. 가까이 모시고 있는 퇴계가 하고자 하는 일에 두향은 기지를 발휘하였다.

 

 

(사진-퇴계의 암각문 - 復道別業)

 

 

퇴계에게 옥순봉의 관할 소속을 아뢰면서,  퇴계로 하여금 청풍 군수를 찾아가 타협을 보면 해결이 잘 될 것이라 하였다.  당시의 청풍 군수는 후일에 영의정이 된 아계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 이였다. 퇴계는 두향의 말에 따라 청풍 군수 이지번을 찾아가 상의한 결과 옥순봉이 청풍군 관할에서 단양군 관할로 바뀌게 되었다. 그 길로 퇴계는 옥순봉 아래에 단구동문(丹邱洞門)이란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이니, 단양의 석공들이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깊게 새기니 오늘까지 그 암각 문이 전해온다.  이렇게 되어 두향의 기지로 단양팔경의 명명이 완성을 보게 되었다.

 

 

7. 애달픈 이별.

 

 

퇴계가 단양 군수로 부임한지 10개월만에 단양 땅을 떠나야만 할 일이 생겼다. 그 해 10월에 퇴계의 친형인 대헌공이 직속상관인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형과 아우가 직속상하관계로 있으면 나라 일에 공평을 기 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세인들로부터 오해를 받게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퇴계는 그 날로 사표를 제출했다, 청렴 결백한 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그의 성품을 알아차린 조정에서는 그를 충청도가 아닌 경상도 풍기 군수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되어 퇴계와 두향은 애달픈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때 퇴계는 풍기 군수로 옮겨가면서 두향 으로부터 받은 청매 한 그루도 함께 가져가서 도산에 심었다.

 

 

한편 퇴계가 떠난 후 두향은 부유함과 호사스러움을 앞 새우는 시중잡배들과 어울리는 것이 단 10개월 동안이나마 모시던 그 어른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고 아예 기적에서 물러 날 것을 결심하고 새로 부임한 사또에게 그 사연을 말하고 허락을 요청하였다. 신임 사또의 허락을 받아 기적에서 면천되어 물러난 두향은  오로지 퇴계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을 혼자서 거닐기도 하고,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아갔다.

 

 

두향의 마음이야 오매불망 퇴계를 잊을 수 없었으며,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으나, 퇴계의 처지를 생각하면 참아 그렇지를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간접적으로 인편을 보내 문안을 여쭙곤 하였다.

 

 

헤어진지 어언 4년이 되는 봄날에 문안 여쭈러 보낸 인편에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두향에게 보내주었다.   

 

 

黃卷中間對聖賢(황군중간대성현) -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속식) -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햑요금탄절현) -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퇴계는 이 시문 끝에 壬子 正月 二日 立春이라 쓴 것으로 보아 그의 나이 52세(1552)되는 해의 작품이다. 이 시문의 끝 구절에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라"는 분명히 두향의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두향은 이 시 한편을 받고 평생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노래로 불렀다.

 

 

그 후 20 여 년이 흘렀다. 1570년 어느 겨울날 퇴계는 방안의 매분을 가리키며 "매형(梅兄)에게 물 잘 주라"는 말을 남기고 임종하였다. 퇴계의 임종 소식을 들은 두향은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진하였다.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퇴계와 함께 노닐던 강가 강선대 아래에 묻어달라 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무덤과 묘비는 지금도 충주 뎀 물 건너 강선대 근처에 있다.

 

(사진 - 퇴계의 친필 매화 시)  

 

 

8. 우리의 스승 퇴계.

 

 

한서(漢書)라는 역사에 경사이우(經師易遇), 인사난봉(人師難逢)이란 말이 있다. "글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쉬워도, 사람 만드는 인격이 높은 어진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지식을 팔며 정신 교육에는 미흡한 스승은 만나기 쉬워도, 인간의 바른 길을 인도해 주는 참된 스승은 드물다는 말이다. 한서의 이러한 기록 이후에 후세 사람들은 참된 스승에 대한 표현을 경사이구(經師易求), 인사난득(人師難得). 또는 경사이면(經師易面), 인사난심(人師難尋), 또는 인사난조(人師難遭)라는 말을 써온다. 우리의 역사에서 퇴계만 한 인간 스승도 드물다.

 

 

퇴계는 일생동안 70여 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와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왔다. 한국에 퇴계가 있음은 중국에 주자가 있는 것과 같이 미완성의 주자학을 크게 발전시켜 놓은 동방의 주부자로 칭송을 받아 올만큼 뛰어난 학자이다. 문하에 대학자요, 대 정치가이며, 대  경륜가인 동량지재를 318명이나 배출해냈다.

 

 

퇴계의 학문적 성숙 시기는 단양군수를 지낸 40대 후반부터이다. 단양 기생 두향에게서 매화를 끔찍하게 아끼는 마음이 생긴 듯, 평생동안 매화 시  85題 118首를 자필로 써 남겨 <퇴계매화시첩>을 남겼다. 오늘의 세상이라면 두향과 같은 절개를 지키는 여인네가 있을까. 그런 내용이라면 아마도 어리석은 질문인 듯 싶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내용을 보거나, 현충일의 보도 내용을 보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청상(靑孀)에 홀로되어 흰머리가 되도록 절개를 지키는 우리 민족 특성의 여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