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여류 예술가
1. 금원김씨(錦園金氏)
1817(순조 17)∼? 조선 말기의 여류시인. 호는 금원(錦園).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이다.
원주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병을 자주 앓아 몸이 허약하므로 그의 부모가 글을 배우도록 했는데, 글을 뛰어나게 잘해서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
평생 남자로 태어나지 못하였음을 한하면서 1830년(순조 30)3월 14세 때 남자로 변장하고 단신 금강산을 유람하여 견문을 넓혀 시문을 짓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돌아와서 시랑이며 규당(奎堂)학사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1843년(헌종 9)27세로 문명을 떨쳐서 세상에서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고 칭호하였다. 1845년에는 김덕희와 함께 서도와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1847년에 돌아와 서울 용산에 있는 김덕희의 별장인 삼호정에 살면서 같은 처지의 벗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규합하여 시문을 지으면서 시단을 형성하였다. 이때의 동인들이 김운초(金雲楚)·경산(瓊山)·박죽서(朴竹西)·경춘(瓊春) 등이었다.
1850년에는 〈호동서락기 湖東西洛記〉를 탈고하고 1851년(철종 2)에 《죽서시집》 발문을 썼다.
일찍부터 충청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 일대, 즉 호동서락(湖東西洛) 등의 명승지를 주유 관람하고, 또 내·외금강산과 단양일대를 두루 편력하면서 시문을 써서 시 〈호락홍조 湖洛鴻爪〉 등이 수록된 시집 《호동서락기》를 남겼다.
2. 매창(梅窓)
1573(선조 6)∼1610(광해군 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癸娘·桂娘)이라고도 하였다.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인데,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한 것으로,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
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편 있으며, 《가곡원류》 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닐제 울며 $잡01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하며, 계생의 죽음을 전해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을 덧붙였다.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추사 秋思〉·〈춘원 春怨〉·〈견회 遣懷〉·〈증취객 贈醉客〉·〈부안회고 扶安懷古〉·〈자한 自恨〉 등이 유명하며, 가무·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부안의 묘에 비석이 전하며, 1974년 그 고장 서림공원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3. 삼의당김씨(三宜堂金氏)
1769(영조 45)∼? 조선 후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김해(金海). 당호는 삼의당(三宜堂).
전라남도 남원 누봉방(樓鳳坊)에서 태어나 같은해 같은날 출생이며 같은 마을에 살던 담락당(湛樂堂) 하립(河$립01)과 혼인하였다. 이들 부부는 나이도 같거니와 가문이나 글재주가 서로 비슷하여 주위에서 천정배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중년에 선영(先塋)을 수호하기 위하여 진안 마령면(馬靈面) 방화리(訪花里)로 이주하여 거기에서 시문을 쓰면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문집에 기록된 것처럼 남편 하립이 그 부인이 거처하는 집의 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히 붙이고 뜰에는 꽃을 심어 ‘삼의당’이라 불렸다 한다. 그의 평생소원은 남편이 등과하는 것이어서 산사에서 독서하고, 서울로 관광하는 일을 철저히 권장하였다.
가세가 궁핍하였기 때문에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머리털을 자르기도 하고 비녀를 팔기까지 하였으나 남편은 결국 등과하지 못하였다. 그는 평생을 두고 남편에게 권학하는 글을 많이 썼으며, 가장 규범적이요 교훈이 되는 글을 많이 썼다.
죽은 해는 알 수 없으나 6월 20일에 죽었다고 하며, 묘는 진안 백운면 덕현리에 그 남편과 함께 쌍봉장으로 하였다. 진안 마이산(馬耳山) 탑영지(塔影池)에는 시비 〈담락당하립삼의당김씨부부시비〉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 《삼의당고》 2권이 1930년에 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시 99편과 19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4. 신사임당(申師任堂)
1) 출생과 성장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2) 출가후의 생활
19세에 덕수이씨 (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지금의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3) 자질과 재능
사임당이 지향한 최고의 여성상은 태임으로 그녀를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4) 그림재능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글씨재능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뒤 최씨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6) 예술적 환경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명석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7) 후손과 작품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로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 ·〈산수도 山水圖〉 ·〈초충도 草蟲圖〉 ·〈노안도 蘆雁圖〉 ·〈연로도 蓮鷺圖〉 ·〈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5. 옥봉이씨(玉峰李氏)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옥봉.
군수를 지낸 이봉지(李逢之)의 서녀이다. 신분이 미천한 때문에 조원(趙瑗)의 소실이 되었다.
15세에 출가하여 40세 전에 임진왜란을 만나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옛 관습으로 보면 급제하기 전에 부실(副室)을 두는 예는 극히 드물었는데, 조원도 급제 후에 옥봉을 맞아들였다면, 계년(#계30年)이 15세이므로 죽은 나이는 대략 35세 안팎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원이 문과에 급제한 것이 1572년(선조 5)이고, 임진왜란은 이보다 20년 후인 1592년에 일어났다. 옥봉이 남긴 시는 모두 32편으로, 1704년(숙종 30)에 조원의 현손인 정만(正萬)의 손에 의하여 《가림세고 嘉林世稿》의 끝에 부록으로 편입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게 되었다.
옥봉의 시는 거의 대부분 이별을 주제로 읊은 시들이다. 이 가운데 〈규정 閨情〉, 그리고 남편에게 보낸 〈증운강 贈雲江〉 등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재치와 기교가 섬광처럼 교직(交織)되어 있다.
허균(許筠)은 《학산초담 鶴山樵談》에서 그녀의 시가 매우 밝고 강건하여 자못 부인의 화장기 나는 말이 아니라 하였고, 《성수시화 惺#수04詩話》에서도 그녀의 시는 맑고 건장하여 화장기가 없다고 하여, 시경이 여성답지 않고 높음을 극구 칭찬하였다.
또, 신흠(申欽)은 “근래 규수의 작품 중 승지 조원의 첩 이씨가 제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홍만종(洪萬宗)도 《시평보유 詩評補遺》에서 〈춘일즉사시 春日卽事詩〉가 만당의 조격(調格)이 있다고 칭찬하였고, 《소화시평 小華詩評》에서는 “(사람들이)조원의 첩 옥봉이씨를 조선제일의 여류시인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으로 이미 당대에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6. 운초(雲楚)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 중기의 기생·여류시인. 성은 김씨(金氏). 본명은 부용(芙蓉). 운초는 호.
성천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성장, 성천의 명기로서 가무와 시문에 뛰어났다. 김이양(金履陽)의 인정을 받아 종유하다가 1831년(순조 31)에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김이양의 소실이 되었다. 그뒤 시와 거문고로 여생을 보냈다. 우아한 천품과 재예를 지니고 있어 당시 명사들과 교유, 수창(酬唱)하였고, 특히 김이양과 동거하면서 그와 수창한 많은 시를 남겼다.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으로서 같은 동인인 경산(瓊山)과 많은 시를 주고받았다.
문학적인 자부심이 대단하여 자신은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였다고 한다. 발랄하고 다채로운 작품을 지어 남자를 무색하게 한다는 평을 들었다.
작품집인 《운초집》에 실려 있는 시는 규수문학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억가형 憶家兄〉·〈오강루소집 五江樓小集〉·〈대황강노인 待黃岡老人〉 등이 있고, 시문집으로는 《운초당시고》(일명 芙蓉集)이 있다
7. 윤지당임씨(允摯堂任氏)
1721(경종 1)∼1793(정조 17). 조선 후기의 여류성리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윤지당(允摯堂). 함흥판관 적(適)의 딸이며, 성주(聖周)의 여동생이다. 남편은 신광유(申光裕)이다.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성주로부터 《효경》·《열녀전》·《소학》·사서 등을 배웠고, 여러 형제들과 함께 경전·사서(史書) 등을 강론하였는데, 식견이 탁월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교양과 부덕을 쌓아 한치도 범절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일생 동안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공을 쌓아 나태하거나 방심한 일이 없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가사를 맡아,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진력하고 밤이 깊어서는 소리를 낮추어 책을 읽어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진취를 알지 못하였으나 몰래 쌓은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당시의 대학자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죽은 뒤 유고 40여편이 수습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경전연구와 성리설에 관한 논설 및 선유(先儒)에 대한 인물논평들이다.
그 중에서 〈이기심성설 理氣心性說〉·〈인심도심사단칠정설 人心道心四端七情說〉·〈예악설 禮樂說〉·〈극기복례위인설 克己復禮爲仁說〉·〈오도일관설 吾道一貫說〉 등의 논문은 조선 후기 관념철학에 대한 높은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며, 《대학》 7조와 《중용》 27조에 대한 경의(經義) 2편과 〈논안자소락 論顔子所樂〉·〈안자호학찬 顔子好學贊〉·〈심잠 心箴)·〈인잠 忍箴〉·〈시습잠 時習箴〉등도 경전에 대한 조예를 보여준다.
또, 예양(豫讓)·안자(顔子)·자로(子路)·가의(賈誼)·이릉(李陵)·사마 광(司馬光)·왕안석(王安石)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예리한 논평을 남겼다. 유고는 1796년(정조 20) 동생 정주(靖周)와 시동생 신광우(申光祐)에 의하여 《윤지당유고》 1책으로 편집, 부록과 함께 간행되었다.
8. 의유당(意幽堂)
1727(영조 3)∼1823(순조 23). 조선 후기의 여류문인.
남편이 함흥판관으로 부임할 때 같이 가서 함흥부근의 명승고적을 탐승하여 기록한 기행·전기·번역 등을 합한 문집 《의유당관북유람일기 意幽堂關北遊覽日記》(약칭 의유당일기)의 작자로, 우리 문학사에서 수필문학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한 탁월한 여류문인으로 주목된다.
종래에는 의유당의 정체를 김반(金盤)의 딸이며 순조 때 함흥판관을 지낸 이희찬(李羲贊)의 부인 연안김씨(延安金氏, 1765∼1792)로 추정하였으나, 《의유당일기》 속의 〈동명일기 東溟日記〉와 〈낙민루 樂民樓〉에 나오는 연대와 이희찬의 함흥판관 부임연대가 다르고, 연안김씨의 생존연대가 이희찬의 부임연대와 서로 모순된다는 점(즉, 부임 당시 연안김씨는 이미 사망하였다.)을 들어 부정되고, 최근에 신대손(申大孫)의 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로 고증되었다.
의령남씨는 〈동명일기〉에 나오는 연대에 함흥판관으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갔으며, 당호를 의유당이라 하였고, 한문과 국문에 능하여 《의유당유고 意幽堂遺稿》라는 문집을 남긴 여류문인이다.
남편 신대손의 누이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친정숙부인 홍인한(洪麟漢)에게 출가하였으므로 혜경궁 홍씨의 숙모에게는 친정올케가 되며, 형부인 김시묵(金時默)이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친정아버지이므로 왕후의 이모가 되는 명문거족출신이다. 자연의 풍경을 묘사함에 있어서 지적이며 섬세하고 진지한 표현과, 참신하고도 열정적인 어휘구사력, 자유분방한 의기가 돋보인다.
특히, 46세 되던 1772년(영조 48)에 지은 대표작 〈동명일기〉는 일출·월출 장면의 절묘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국문 수필문학의 높은 수준을 보였다.
50세 이후의 노후의 저작인 한시·한문·행장·한글·행록 등은 죽은 뒤 《의유당유고》로 출간되었다.
9. 정일당강씨(靜一堂姜氏)
1772(영조48)∼1832(순조 32). 조선 후기의 여류문인.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정일당(靜一堂). 제천 출신.
아버지는 재수(在洙)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서응(瑞應)의 딸이다. 윤광연(尹光演)의 부인이다. 9남매를 낳았으나 모두 잃고, 양자를 두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20세에 출가한 뒤 집이 가난하여 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남편을 도와 함께 공부하였다. 경서에 두루 통하여 성리학의 심오한 원리를 깨달았고, 그것을 통한 정신 수양과 실천을 위해 평생을 노력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당시에 문명(文名)이 높았다. 시는 대개 학문 또는 수신(修身)에 관한 내용이 많다. 또, 글씨에 능하여 홍의영(洪儀泳)· 권복인(權復仁)· 황운조(黃運祚) 등의 필법을 이어받았으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사람들이 그의 남편에게 글을 청하면 대신 지어주는 일이 많았다. 이직보(李直輔)가 그의 시 한수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는데, 이 소문을 듣고 저술을 일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저서로는 《정일당유고》 1책이 있다. 1989년 성남시 중원구에 사당이 세워졌다.
10. 죽서박씨(竹西朴氏)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죽서(竹西). 박종언(朴宗彦)의 서녀이며, 서기보(徐箕輔)의 소실이다. 대략 1817∼1851년에 생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와 고시문(古詩文)을 탐독하였고, 소식(蘇軾)·한유(韓愈)를 숭모하였다.
10세에 이미 뛰어난 시를 지어 천재성을 발휘하였는데, 시문은 매우 서정적이며 대개 임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여심과 기다리다 지친 규원(閨怨)을 나타내는 내용이다.
미모가 뛰어나고 침선에도 능하였다 하며, 동시대의 여류시인인 금원(錦園)과는 같은 원주사람으로 시문을 주고 받으며 깊이 교유하였다. 병약하여 30세 전후에 죽었다.
저서로는 《죽서시집》 1책이 있다.
11. 진채선(陳彩仙)
1847(헌종 13)∼?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에서 출생하였다.
신재효(申在孝)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 풍류·가곡(歌曲)과 무용에 능하였고, 여성이면서도 웅장한 판소리 성음(聲音)을 내고 기량도 대단하였다 한다.
20대에 경복궁 낙성연에서 판소리를 불러 좌중을 감탄하게 하였다. 이때 신재효가 지은 〈성조가 成造歌〉를 불렀다는 설도 있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서울에 잠깐 머무르는 동안 신재효는 〈도리화가 桃李花歌〉라는 노래를 지었다 한다. 이 노래는 가사체로 지금 전하고 있다. 신재효가 죽은 뒤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춘향가〉와 〈심청가〉를 잘 하였고, 특히 〈춘향가〉 중 기생점고(妓生點考)하는 대목을 잘 불렀다 한다.
그가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린 뒤, 허금파(許錦坡)·강소춘(姜笑春) 등 여류 명창이 나왔고, 오늘날 여자 명창들을 더 많이 배출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12. 강소춘(姜小春)
생몰년 미상. 고종·순종 때 활약한 여류 판소리 명창. 일명 소춘(笑春). 대구출신.
여류 판소리 명창의 효시인 진채선(陳彩仙)과 허금파(許錦波)이후에 명창으로서 이름을 떨치었다. 그의 소리는 5명창 이전의 고제의 소리였다고 한다. 미인명창으로 성음이 아름다웠고, 〈춘향가〉와 〈흥부가〉를 잘하였는데, 특히 애원성으로 〈춘향가〉 중 ‘망부사(望夫詞)’를 잘 불렀다 한다.
고종 말기에 원각사(圓覺社) 및 협률사(協律社)의 창극공연에 참가하였고, 협률사의 지방공연에도 참가하여 이름을 떨치었다. 창극 〈춘향전〉과 〈심청전〉에서 춘향역과 심청역을 잘하였다고 한다.
취입한 음반에는 〈남도선인단가 南道船人短歌〉,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 등 8매가 있다.
13.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릉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봉20)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일부를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으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14. 홍원주(洪原周)
1791(정조 15)∼? 조선 순조·헌종 때의 여류시인. 본관은 풍산(豊山). 당호는 유한당(幽閑堂).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인모(仁模)와 여류시인인 어머니 영수합 서씨(令壽閤徐氏)의 3남 2녀 가운데 맏딸이며, 심의석(沈宜奭)의 부인이다. 석주(奭周)와 길주(吉周)의 누이동생이며, 숙선옹주(淑善翁主)와 혼인한 영명위(永明尉)인 현주(顯周)의 누나로, 형제 모두가 당대의 선비요 문장가들이었다.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에 출가하여서는 양자 심성택(沈誠澤)을 기르면서 현모양처로도 모범이 되고 시문을 잘 지어서 명성이 더욱 높았다.
그의 시는 정서적이고, 청신하면서 구구절절이 형제의 우애와 규방의 부덕과 규범 등을 읊고 있다.
묘는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에 남편과 합장되어 있다. 죽은 뒤에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유한집》이 있다.
15. 홍장(紅粧)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강릉 기생. 시조작가로서 그녀가 지은 시조 1수가 전한다.
박신(朴信)이 강원도안렴사로 갔을 때 그녀를 사랑하여 아주 깊이 정이 들었는데,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갈 때 강릉부윤으로 있던 조운흘이 “홍장은 이미 죽었다.”고 하고, 그녀를 마치 신선처럼 꾸민 뒤 박신을 한송정(寒松亭)으로 유인하여 놀려주었다는 일화가 《동인시화》에 전하고 있다.
조선 효종 때의 신후담(愼後聃)이 홍장과 박신의 이와같은 애정고사를 소설화하여 〈홍장전〉을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김태준(金台俊)의 《조선소설사》에서도 그의 〈속열선전 續列仙傳〉 등 여러 소설작품들과 함께 거론된 바 있다.
그녀가 지은 시조는 한송정(寒松亭) 달밝은 밤에 오락가락하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가고 오지 않는 왕손(王孫)을 그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교주 해동가요 校注海東歌謠》 등에 전한다.
16. 홍천기(洪天起)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여성화가.
조선시대 유일의 여성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으로 종7품 화사(畵史)를 지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용12齋叢話》에 의하면, 절세미인이었으며, 최저(崔渚)·안귀생(安貴生)의 무리와 함께 산수화에 이름이 있었으나 화격이 높지 못한 용품(庸品: 낮은 품계)이었다 한다. 현존하는 작품은 없다.
17. 황진이(黃眞伊)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의 명기(名妓).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출신. 확실한 생존연대는 미상이나, 중종 때 사람이며 비교적 단명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사료는 없으며, 간접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기생이 된 동기에 대하여도 15세경 이웃 총각이 혼자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당시(唐詩)를 정공(精工)하였다고 한다.
그러한만큼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박연폭포(朴淵瀑布)·서경덕·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가 지은 한시에는 〈박연 朴淵〉·〈영반월 詠半月〉·〈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여소양곡 與蘇陽谷〉 등이 전하고 있으며, 시조 작품으로는 6수가 전한다. 이 중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언제 신이없어〉·〈산은 옛산이로되〉·〈어져 내일이여〉의 5수는 진본(珍本)《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청산은 내뜻이요〉는 황진이의 작품이라 하고 있으나 《근화악부 槿花樂府》와 《대동풍아 大東風雅》의 두 가집에만 전하며, 작가도 《근화악부》에는 무명씨로 되어 있고, 《대동풍아》에서만 황진이로 되어 있다. 그리고 두 가집에 전하는 내용이 완전 일치하지도 않으니, 특히 초장은 《근화악부》에서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다.”라 되어 있는데, 《대동풍아》에서는 “청산은 내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고 바뀌어 그 맛이 훨씬 달라졌다. 《대동풍아》는 1908년에 편집된 책이요 작가의 표기도 정확성이 별로 없는 가집이라는 점에서 그 기록이 의문시되고 있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고, 또한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작품은 5,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 세련된 언어구사로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1817(순조 17)∼? 조선 말기의 여류시인. 호는 금원(錦園).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이다.
원주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병을 자주 앓아 몸이 허약하므로 그의 부모가 글을 배우도록 했는데, 글을 뛰어나게 잘해서 경사(經史)에 능통했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
평생 남자로 태어나지 못하였음을 한하면서 1830년(순조 30)3월 14세 때 남자로 변장하고 단신 금강산을 유람하여 견문을 넓혀 시문을 짓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돌아와서 시랑이며 규당(奎堂)학사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1843년(헌종 9)27세로 문명을 떨쳐서 세상에서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고 칭호하였다. 1845년에는 김덕희와 함께 서도와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1847년에 돌아와 서울 용산에 있는 김덕희의 별장인 삼호정에 살면서 같은 처지의 벗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규합하여 시문을 지으면서 시단을 형성하였다. 이때의 동인들이 김운초(金雲楚)·경산(瓊山)·박죽서(朴竹西)·경춘(瓊春) 등이었다.
1850년에는 〈호동서락기 湖東西洛記〉를 탈고하고 1851년(철종 2)에 《죽서시집》 발문을 썼다.
일찍부터 충청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 일대, 즉 호동서락(湖東西洛) 등의 명승지를 주유 관람하고, 또 내·외금강산과 단양일대를 두루 편력하면서 시문을 써서 시 〈호락홍조 湖洛鴻爪〉 등이 수록된 시집 《호동서락기》를 남겼다.
2. 매창(梅窓)
1573(선조 6)∼1610(광해군 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癸娘·桂娘)이라고도 하였다.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인데,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한 것으로,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
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편 있으며, 《가곡원류》 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닐제 울며 $잡01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하며, 계생의 죽음을 전해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을 덧붙였다.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추사 秋思〉·〈춘원 春怨〉·〈견회 遣懷〉·〈증취객 贈醉客〉·〈부안회고 扶安懷古〉·〈자한 自恨〉 등이 유명하며, 가무·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부안의 묘에 비석이 전하며, 1974년 그 고장 서림공원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3. 삼의당김씨(三宜堂金氏)
1769(영조 45)∼? 조선 후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김해(金海). 당호는 삼의당(三宜堂).
전라남도 남원 누봉방(樓鳳坊)에서 태어나 같은해 같은날 출생이며 같은 마을에 살던 담락당(湛樂堂) 하립(河$립01)과 혼인하였다. 이들 부부는 나이도 같거니와 가문이나 글재주가 서로 비슷하여 주위에서 천정배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중년에 선영(先塋)을 수호하기 위하여 진안 마령면(馬靈面) 방화리(訪花里)로 이주하여 거기에서 시문을 쓰면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문집에 기록된 것처럼 남편 하립이 그 부인이 거처하는 집의 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히 붙이고 뜰에는 꽃을 심어 ‘삼의당’이라 불렸다 한다. 그의 평생소원은 남편이 등과하는 것이어서 산사에서 독서하고, 서울로 관광하는 일을 철저히 권장하였다.
가세가 궁핍하였기 때문에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머리털을 자르기도 하고 비녀를 팔기까지 하였으나 남편은 결국 등과하지 못하였다. 그는 평생을 두고 남편에게 권학하는 글을 많이 썼으며, 가장 규범적이요 교훈이 되는 글을 많이 썼다.
죽은 해는 알 수 없으나 6월 20일에 죽었다고 하며, 묘는 진안 백운면 덕현리에 그 남편과 함께 쌍봉장으로 하였다. 진안 마이산(馬耳山) 탑영지(塔影池)에는 시비 〈담락당하립삼의당김씨부부시비〉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 《삼의당고》 2권이 1930년에 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시 99편과 19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4. 신사임당(申師任堂)
1) 출생과 성장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2) 출가후의 생활
19세에 덕수이씨 (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지금의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3) 자질과 재능
사임당이 지향한 최고의 여성상은 태임으로 그녀를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4) 그림재능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글씨재능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뒤 최씨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6) 예술적 환경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명석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7) 후손과 작품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로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 ·〈산수도 山水圖〉 ·〈초충도 草蟲圖〉 ·〈노안도 蘆雁圖〉 ·〈연로도 蓮鷺圖〉 ·〈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5. 옥봉이씨(玉峰李氏)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옥봉.
군수를 지낸 이봉지(李逢之)의 서녀이다. 신분이 미천한 때문에 조원(趙瑗)의 소실이 되었다.
15세에 출가하여 40세 전에 임진왜란을 만나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옛 관습으로 보면 급제하기 전에 부실(副室)을 두는 예는 극히 드물었는데, 조원도 급제 후에 옥봉을 맞아들였다면, 계년(#계30年)이 15세이므로 죽은 나이는 대략 35세 안팎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원이 문과에 급제한 것이 1572년(선조 5)이고, 임진왜란은 이보다 20년 후인 1592년에 일어났다. 옥봉이 남긴 시는 모두 32편으로, 1704년(숙종 30)에 조원의 현손인 정만(正萬)의 손에 의하여 《가림세고 嘉林世稿》의 끝에 부록으로 편입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게 되었다.
옥봉의 시는 거의 대부분 이별을 주제로 읊은 시들이다. 이 가운데 〈규정 閨情〉, 그리고 남편에게 보낸 〈증운강 贈雲江〉 등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재치와 기교가 섬광처럼 교직(交織)되어 있다.
허균(許筠)은 《학산초담 鶴山樵談》에서 그녀의 시가 매우 밝고 강건하여 자못 부인의 화장기 나는 말이 아니라 하였고, 《성수시화 惺#수04詩話》에서도 그녀의 시는 맑고 건장하여 화장기가 없다고 하여, 시경이 여성답지 않고 높음을 극구 칭찬하였다.
또, 신흠(申欽)은 “근래 규수의 작품 중 승지 조원의 첩 이씨가 제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홍만종(洪萬宗)도 《시평보유 詩評補遺》에서 〈춘일즉사시 春日卽事詩〉가 만당의 조격(調格)이 있다고 칭찬하였고, 《소화시평 小華詩評》에서는 “(사람들이)조원의 첩 옥봉이씨를 조선제일의 여류시인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으로 이미 당대에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6. 운초(雲楚)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 중기의 기생·여류시인. 성은 김씨(金氏). 본명은 부용(芙蓉). 운초는 호.
성천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성장, 성천의 명기로서 가무와 시문에 뛰어났다. 김이양(金履陽)의 인정을 받아 종유하다가 1831년(순조 31)에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김이양의 소실이 되었다. 그뒤 시와 거문고로 여생을 보냈다. 우아한 천품과 재예를 지니고 있어 당시 명사들과 교유, 수창(酬唱)하였고, 특히 김이양과 동거하면서 그와 수창한 많은 시를 남겼다.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으로서 같은 동인인 경산(瓊山)과 많은 시를 주고받았다.
문학적인 자부심이 대단하여 자신은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였다고 한다. 발랄하고 다채로운 작품을 지어 남자를 무색하게 한다는 평을 들었다.
작품집인 《운초집》에 실려 있는 시는 규수문학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억가형 憶家兄〉·〈오강루소집 五江樓小集〉·〈대황강노인 待黃岡老人〉 등이 있고, 시문집으로는 《운초당시고》(일명 芙蓉集)이 있다
7. 윤지당임씨(允摯堂任氏)
1721(경종 1)∼1793(정조 17). 조선 후기의 여류성리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윤지당(允摯堂). 함흥판관 적(適)의 딸이며, 성주(聖周)의 여동생이다. 남편은 신광유(申光裕)이다.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성주로부터 《효경》·《열녀전》·《소학》·사서 등을 배웠고, 여러 형제들과 함께 경전·사서(史書) 등을 강론하였는데, 식견이 탁월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교양과 부덕을 쌓아 한치도 범절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일생 동안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공을 쌓아 나태하거나 방심한 일이 없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가사를 맡아,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진력하고 밤이 깊어서는 소리를 낮추어 책을 읽어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진취를 알지 못하였으나 몰래 쌓은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당시의 대학자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죽은 뒤 유고 40여편이 수습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경전연구와 성리설에 관한 논설 및 선유(先儒)에 대한 인물논평들이다.
그 중에서 〈이기심성설 理氣心性說〉·〈인심도심사단칠정설 人心道心四端七情說〉·〈예악설 禮樂說〉·〈극기복례위인설 克己復禮爲仁說〉·〈오도일관설 吾道一貫說〉 등의 논문은 조선 후기 관념철학에 대한 높은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며, 《대학》 7조와 《중용》 27조에 대한 경의(經義) 2편과 〈논안자소락 論顔子所樂〉·〈안자호학찬 顔子好學贊〉·〈심잠 心箴)·〈인잠 忍箴〉·〈시습잠 時習箴〉등도 경전에 대한 조예를 보여준다.
또, 예양(豫讓)·안자(顔子)·자로(子路)·가의(賈誼)·이릉(李陵)·사마 광(司馬光)·왕안석(王安石)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예리한 논평을 남겼다. 유고는 1796년(정조 20) 동생 정주(靖周)와 시동생 신광우(申光祐)에 의하여 《윤지당유고》 1책으로 편집, 부록과 함께 간행되었다.
8. 의유당(意幽堂)
1727(영조 3)∼1823(순조 23). 조선 후기의 여류문인.
남편이 함흥판관으로 부임할 때 같이 가서 함흥부근의 명승고적을 탐승하여 기록한 기행·전기·번역 등을 합한 문집 《의유당관북유람일기 意幽堂關北遊覽日記》(약칭 의유당일기)의 작자로, 우리 문학사에서 수필문학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한 탁월한 여류문인으로 주목된다.
종래에는 의유당의 정체를 김반(金盤)의 딸이며 순조 때 함흥판관을 지낸 이희찬(李羲贊)의 부인 연안김씨(延安金氏, 1765∼1792)로 추정하였으나, 《의유당일기》 속의 〈동명일기 東溟日記〉와 〈낙민루 樂民樓〉에 나오는 연대와 이희찬의 함흥판관 부임연대가 다르고, 연안김씨의 생존연대가 이희찬의 부임연대와 서로 모순된다는 점(즉, 부임 당시 연안김씨는 이미 사망하였다.)을 들어 부정되고, 최근에 신대손(申大孫)의 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로 고증되었다.
의령남씨는 〈동명일기〉에 나오는 연대에 함흥판관으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갔으며, 당호를 의유당이라 하였고, 한문과 국문에 능하여 《의유당유고 意幽堂遺稿》라는 문집을 남긴 여류문인이다.
남편 신대손의 누이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친정숙부인 홍인한(洪麟漢)에게 출가하였으므로 혜경궁 홍씨의 숙모에게는 친정올케가 되며, 형부인 김시묵(金時默)이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친정아버지이므로 왕후의 이모가 되는 명문거족출신이다. 자연의 풍경을 묘사함에 있어서 지적이며 섬세하고 진지한 표현과, 참신하고도 열정적인 어휘구사력, 자유분방한 의기가 돋보인다.
특히, 46세 되던 1772년(영조 48)에 지은 대표작 〈동명일기〉는 일출·월출 장면의 절묘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국문 수필문학의 높은 수준을 보였다.
50세 이후의 노후의 저작인 한시·한문·행장·한글·행록 등은 죽은 뒤 《의유당유고》로 출간되었다.
9. 정일당강씨(靜一堂姜氏)
1772(영조48)∼1832(순조 32). 조선 후기의 여류문인.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정일당(靜一堂). 제천 출신.
아버지는 재수(在洙)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서응(瑞應)의 딸이다. 윤광연(尹光演)의 부인이다. 9남매를 낳았으나 모두 잃고, 양자를 두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20세에 출가한 뒤 집이 가난하여 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남편을 도와 함께 공부하였다. 경서에 두루 통하여 성리학의 심오한 원리를 깨달았고, 그것을 통한 정신 수양과 실천을 위해 평생을 노력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당시에 문명(文名)이 높았다. 시는 대개 학문 또는 수신(修身)에 관한 내용이 많다. 또, 글씨에 능하여 홍의영(洪儀泳)· 권복인(權復仁)· 황운조(黃運祚) 등의 필법을 이어받았으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사람들이 그의 남편에게 글을 청하면 대신 지어주는 일이 많았다. 이직보(李直輔)가 그의 시 한수를 보고 매우 칭찬하였는데, 이 소문을 듣고 저술을 일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저서로는 《정일당유고》 1책이 있다. 1989년 성남시 중원구에 사당이 세워졌다.
10. 죽서박씨(竹西朴氏)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죽서(竹西). 박종언(朴宗彦)의 서녀이며, 서기보(徐箕輔)의 소실이다. 대략 1817∼1851년에 생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워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와 고시문(古詩文)을 탐독하였고, 소식(蘇軾)·한유(韓愈)를 숭모하였다.
10세에 이미 뛰어난 시를 지어 천재성을 발휘하였는데, 시문은 매우 서정적이며 대개 임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여심과 기다리다 지친 규원(閨怨)을 나타내는 내용이다.
미모가 뛰어나고 침선에도 능하였다 하며, 동시대의 여류시인인 금원(錦園)과는 같은 원주사람으로 시문을 주고 받으며 깊이 교유하였다. 병약하여 30세 전후에 죽었다.
저서로는 《죽서시집》 1책이 있다.
11. 진채선(陳彩仙)
1847(헌종 13)∼?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에서 출생하였다.
신재효(申在孝)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 풍류·가곡(歌曲)과 무용에 능하였고, 여성이면서도 웅장한 판소리 성음(聲音)을 내고 기량도 대단하였다 한다.
20대에 경복궁 낙성연에서 판소리를 불러 좌중을 감탄하게 하였다. 이때 신재효가 지은 〈성조가 成造歌〉를 불렀다는 설도 있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서울에 잠깐 머무르는 동안 신재효는 〈도리화가 桃李花歌〉라는 노래를 지었다 한다. 이 노래는 가사체로 지금 전하고 있다. 신재효가 죽은 뒤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춘향가〉와 〈심청가〉를 잘 하였고, 특히 〈춘향가〉 중 기생점고(妓生點考)하는 대목을 잘 불렀다 한다.
그가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린 뒤, 허금파(許錦坡)·강소춘(姜笑春) 등 여류 명창이 나왔고, 오늘날 여자 명창들을 더 많이 배출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12. 강소춘(姜小春)
생몰년 미상. 고종·순종 때 활약한 여류 판소리 명창. 일명 소춘(笑春). 대구출신.
여류 판소리 명창의 효시인 진채선(陳彩仙)과 허금파(許錦波)이후에 명창으로서 이름을 떨치었다. 그의 소리는 5명창 이전의 고제의 소리였다고 한다. 미인명창으로 성음이 아름다웠고, 〈춘향가〉와 〈흥부가〉를 잘하였는데, 특히 애원성으로 〈춘향가〉 중 ‘망부사(望夫詞)’를 잘 불렀다 한다.
고종 말기에 원각사(圓覺社) 및 협률사(協律社)의 창극공연에 참가하였고, 협률사의 지방공연에도 참가하여 이름을 떨치었다. 창극 〈춘향전〉과 〈심청전〉에서 춘향역과 심청역을 잘하였다고 한다.
취입한 음반에는 〈남도선인단가 南道船人短歌〉,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 등 8매가 있다.
13.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릉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봉20)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일부를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으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14. 홍원주(洪原周)
1791(정조 15)∼? 조선 순조·헌종 때의 여류시인. 본관은 풍산(豊山). 당호는 유한당(幽閑堂).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인모(仁模)와 여류시인인 어머니 영수합 서씨(令壽閤徐氏)의 3남 2녀 가운데 맏딸이며, 심의석(沈宜奭)의 부인이다. 석주(奭周)와 길주(吉周)의 누이동생이며, 숙선옹주(淑善翁主)와 혼인한 영명위(永明尉)인 현주(顯周)의 누나로, 형제 모두가 당대의 선비요 문장가들이었다.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에 출가하여서는 양자 심성택(沈誠澤)을 기르면서 현모양처로도 모범이 되고 시문을 잘 지어서 명성이 더욱 높았다.
그의 시는 정서적이고, 청신하면서 구구절절이 형제의 우애와 규방의 부덕과 규범 등을 읊고 있다.
묘는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에 남편과 합장되어 있다. 죽은 뒤에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유한집》이 있다.
15. 홍장(紅粧)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강릉 기생. 시조작가로서 그녀가 지은 시조 1수가 전한다.
박신(朴信)이 강원도안렴사로 갔을 때 그녀를 사랑하여 아주 깊이 정이 들었는데,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갈 때 강릉부윤으로 있던 조운흘이 “홍장은 이미 죽었다.”고 하고, 그녀를 마치 신선처럼 꾸민 뒤 박신을 한송정(寒松亭)으로 유인하여 놀려주었다는 일화가 《동인시화》에 전하고 있다.
조선 효종 때의 신후담(愼後聃)이 홍장과 박신의 이와같은 애정고사를 소설화하여 〈홍장전〉을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김태준(金台俊)의 《조선소설사》에서도 그의 〈속열선전 續列仙傳〉 등 여러 소설작품들과 함께 거론된 바 있다.
그녀가 지은 시조는 한송정(寒松亭) 달밝은 밤에 오락가락하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가고 오지 않는 왕손(王孫)을 그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교주 해동가요 校注海東歌謠》 등에 전한다.
16. 홍천기(洪天起)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여성화가.
조선시대 유일의 여성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으로 종7품 화사(畵史)를 지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용12齋叢話》에 의하면, 절세미인이었으며, 최저(崔渚)·안귀생(安貴生)의 무리와 함께 산수화에 이름이 있었으나 화격이 높지 못한 용품(庸品: 낮은 품계)이었다 한다. 현존하는 작품은 없다.
17. 황진이(黃眞伊)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의 명기(名妓).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출신. 확실한 생존연대는 미상이나, 중종 때 사람이며 비교적 단명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사료는 없으며, 간접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기생이 된 동기에 대하여도 15세경 이웃 총각이 혼자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당시(唐詩)를 정공(精工)하였다고 한다.
그러한만큼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박연폭포(朴淵瀑布)·서경덕·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가 지은 한시에는 〈박연 朴淵〉·〈영반월 詠半月〉·〈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여소양곡 與蘇陽谷〉 등이 전하고 있으며, 시조 작품으로는 6수가 전한다. 이 중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언제 신이없어〉·〈산은 옛산이로되〉·〈어져 내일이여〉의 5수는 진본(珍本)《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청산은 내뜻이요〉는 황진이의 작품이라 하고 있으나 《근화악부 槿花樂府》와 《대동풍아 大東風雅》의 두 가집에만 전하며, 작가도 《근화악부》에는 무명씨로 되어 있고, 《대동풍아》에서만 황진이로 되어 있다. 그리고 두 가집에 전하는 내용이 완전 일치하지도 않으니, 특히 초장은 《근화악부》에서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다.”라 되어 있는데, 《대동풍아》에서는 “청산은 내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고 바뀌어 그 맛이 훨씬 달라졌다. 《대동풍아》는 1908년에 편집된 책이요 작가의 표기도 정확성이 별로 없는 가집이라는 점에서 그 기록이 의문시되고 있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고, 또한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작품은 5,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 세련된 언어구사로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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