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스크랩] 한글의 탄생을 보는눈

아리박 2016. 12. 20. 10:33

       한글을 사랑하는 님들의 생각과 주장

 

 지난 9일이 한글날 이라고했다. 우리 한글 문자를 자기 모국어 표기문자로

사용하는 나라도 생겨나고 있소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문자로 평가 받는

우리 글 한글이 반포 제553돌 이라는데 하지만 한글을 사랑하는 님들의

 생각과 주장이 서로 좀 달라 보여서 이를 자료로 스크랩해 모여 본다.  

           

  (2009.10.9 한글날을 즈음하여 발표된 주장들 스크랩들)

1,「訓民正音」의 創制年代와 한글날­금년은 한글창제 553돌이 아니라 556돌이다­
­한글날도 절대로 10월 9일이 될 수 없다­

(1) 訓民正音의 創制年代에 대하여

3년전 10월 9일 「한글날」에 문화체육부의 기념행사에서는 물론, KBS 방송을 비롯하여 각 신문 방송에서 「한글 반포 550돌」기념이라고 보도하고, 한글을 어느 기관보다도 내세우고 있는 「한글학회」에서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제550돌 한글날 기념 국제 한국어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550돌 한글날 특집」의 《한글 새 소식》(제290호)을 발간하였으니, 금년 한글날은 553돌이라고 내세울 것이 틀림 없다.
무엇 때문에 자랑스러운 「한글」의 制定 年代를 「3년」이나 늦추어 국내외에 오도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世宗大王이 저승에서 통탄하고 계실 것이다.
우선 訓民正音(훈민정음)의 創制(창제)와 그에 관련된 記錄(기록)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世宗實錄》25년(1443) 12월조에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이달 「12월」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훈민정음이라 이른다)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 해 곧 世宗 26년(1444) 2월에는 集賢殿(집현전)의 崔恒·朴彭年·申叔舟 등이 한글로 중국의 韻書(운서)인 《韻會》를 번역하고, 또한 같은 해 2월에 集賢殿의 副提學(부제학)으로 있던 崔萬理가 한글의 창제 사용에 대하여 반대 상소문을 올리고, 世宗 27년(1445) 4월에는 125장이나 되는 장편의 《龍飛御天歌》를 한글과 한자를 사용하여 지었고, 世宗 28년(1446) 12월에 世宗은 吏曹(이조)에 명하여, 吏科 및 吏典에 필요한 인재를 뽑는 시험에 訓民正音을 아울러 쓰도록 한 사실들이 《世宗實錄》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訓民正音을 창제하여 3년간이나 구체적으로 널리 보급하여 쓴 뒤에, 새삼 頒布(반포)하였다는 것은 상식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더구나 의도적으로 朝鮮朝 건국의 偉大性과 合理性을 나타내고자 특별히 편찬한 建國頌의 《龍飛御天歌》를, 한글이 반포되기 전에 그 시험작으로 편찬하였다는 것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2) 한글의 創制와 頒布 연대를 誤認하여 온 까닭

아직도 세종 28년(1446)에 訓民正音을 반포한 것으로 誤認하여 온 이유는, 《世宗實錄》28년(1446) 9월조에 “是月 訓民正音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이 달 곧 세종 28년(1446) 9월에 訓民正音을 완성하여 반포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誤釋하게 된 발단은 崔鉉培 선생의 《한글갈》에 “是月 訓民正音成”에 대하여 “‘實錄’의  記法에 日字의 不明確한 事件은 그달 끝에 [是月]이라 記錄하는 것이요, 또 상고한 바에 依하면, 當年의 九月이 적은 달이었으므로, 上記 [訓民正音] 頒布의 記事는 陰 九月 二十九日임이 밝아졌다.”(p.55)라 하였고, 그 뒤 李熙昇 선생의 《國語學槪說》에도 “‘世宗實錄 25年 癸亥 十二月條에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 한 記事에 依하면, ‘訓民正音’이 頒布된 해 卽 世宗 28年 丙寅(단기 3779;서기 1446)보다 3年 前에 새 文字가 이미 完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와 같이 한편으로는 漢字의 釋을 우리 글로 飜譯하여 보고, 다른 편으로는 純粹한 우리 노래를 이 새 글로 創作하여 보아, 이만하면 하는 自信을 얻은 後(28年 丙寅)에 國內에 正式으로 公布한 것이라 생각된다.”(p.32)라고 한 것을 보면, 뒤에 와서 ‘한글 전용’과 ‘國漢文 혼용’으로 대립되었던 崔鉉培 선생이나 李熙昇 선생이 모두 “是月 訓民正音成”을 잘못 해석하여 세종 25년에 제정하고, 28년에 반포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 뒤 국어사전에까지 ‘훈민정음’에 대하여 “조선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으로 세종 25년(1443)에 만들어,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우리 나라 글자”(한글학회 : 《우리말큰사전》)라고 할 만큼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世宗實錄》28년(1446) 9월조의 “是月 訓民正音成”의 ‘訓民正音’은 문자의 명칭이 아니라, ‘訓民正音’이란 책의 명칭인 것이다.
이것이 ‘訓民正音’이란 책의 명칭인 것은, 1940년 安東에서 《訓民正音》이란 책이 처음 발견되어 판명된 것이다.
현재 國寶 제70호로 지정되어 澗松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는 《訓民正音》 원본의 鄭麟趾 序文에도 이 책의 원고 완성 시기를 ‘正統十一年 九月 上澣’으로 명기하여 놓았다. ‘正統十一年’은 곧 世宗 28年(1446)이다.
그러므로 《世宗實錄》28년 9월조의 “是月 訓民正音成”은 새로 만든 文字를 스스로 익힐 수 있도록 해설서 곧 참고서로서 《訓民正音》을 편찬하여 그 원고를 완성하였다는 뜻이다.
前人들의 誤釋에 대하여 金敏洙 교수가 이미 《국어국문학》제14집에 “세종 28년 9월 상순은 ‘訓民正音’이란 책 자체의 완성 시기다. 따라서 10월 9일은 ‘訓民正音 解例 완성 기념일’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한글 반포 기념일’은 되지 못한다. 세종 25년 12월은 한글의 창제뿐만 아니라, 반포한 시기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金 교수는 “따라서 12월 30일은 양력으로 따진 서기 1444년 1월 28일을 근거로 하여, 1월 28일이 ‘한글 창제 기념일’이요, ‘한글 반포 기념일’이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금년은 한글 반포 552돌이 된다.
이 역시 잘못이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 마지막에 날짜도 밝히지 않고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 한 것은 訓民正音이 12월 마지막날 곧 30일에 창제 완성되었음이 아니라, 훈민정음의 창제 작업은 당시 은밀히 진행되었으므로 史官들이 분명한 창제 완성 일자를 모르기 때문에, 부득이 12월 마지막 부분에 기록하여 놓은 것인데, 이것을 기준하여 陽曆으로 환산해서 한글 창제 반포를 ‘1444년 1월 28일’로 하자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주장이다. 또한 金 교수는 무엇에 근거하여 1월 28일을 주장하였는지는 몰라도, 陰 12월 3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월 19일이 된다.
北韓에서도 한글의 창제에 대하여, “세종실록에는 25년 12월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고 하였다. 25년 12월은 음력이다. 이것을 양력으로 계산하면 26년(1444) 1월인 것이다.”(최정후 :《조선어학개론》, 평양, 1983)와 같이 1444년 1월로 밝히고 있으나, 金敏洙 교수와 같은 생각에서 잘못 환산한 것이다.
그러나 北韓에서도 “세종실록에는 28년 9월에 훈민정음이 성하였다고 씌여 있다. 이 성하였다는 것은 《훈민정음》의 책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최정후 : 《조선어학개론》)라고 밝힌 바와 같이 세종 28년 9월에 반포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訓民正音》(解例本)의 鄭麟趾 序文에 “癸亥 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라 기록되어 있는데, [癸亥年]은 곧 世宗 25年(1443)이고, ‘冬’은 12월만이 아니라, 실록의 기록을 보면 ‘冬十月’, ‘春正月] 등과 같이 명기하였으니, ‘冬’은 곧 ‘10月, 11月, 12月’의 3개월내를 가리킨 것이다.
또한 《세종실록》28년 9월조에 “癸亥 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 以示之, 名曰訓民正音.”이라 하여, 이미 癸亥年 곧 세종 25년 9월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간단히 例義까지 들어 보였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그 결과를 알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세종 28년 12월에 다시 반포했다는 것은 옳지 않다.
實錄 또는 ‘訓民正音’의 관계 문헌 어디에도 ‘頒布’라는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지금처럼 신문·방송에 보도할 수 있는 체제도 아닌데, 창제하여 3년이나 실험을 한 뒤, 백성들에게 반포하였다고 오인하여 온 것은,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前人들의 誤釋에 기인한 추측일 뿐이다.


(3) ‘한글날’도 10월 9일이 아니다

과거에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한 경위를 《한글학회 50년사》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 연구회’에서 1926년 11월 4일(음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였다. 그 이유는 《세종실록》28년 9월조에 “是月 訓民正音成”에 근거하여 9월 끝날을 택하여 29일로 정하였다는 것이다.
② 1928년에 ‘가갸날’을 ‘한글날’로 명칭을 고치고, 1932년부터는 양력으로 바꾸어 10월 29일로 ‘한글날’을 정하였다.
③ 1934년에는 2년 전에 양력으로 환산한 기준이 ‘율리우스曆’에 의거함이 맞지 않다 하여, ‘그레고리오曆’에 의하여 10월 29일을 10월 28일로 고쳤다.
④ 1940년 7월에 安東에서 《訓民正音》 원본이 발견되었는데, 그 책 끝에 “正統十一年 九月 上澣“이란 기록에 의하여, 光復後 곧 1945년에 ‘九月 上澣’의 ‘上澣’을 끝날인 10일로 잡고,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로 ‘한글날’을 확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崔鉉培 선생은 “正統十一年은 世宗 二十八年 丙寅에 該當하고, 上澣은 곧 上旬인 즉, 九月 十日로써 그 頒布日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이를 陽曆으로 換算하면, 十月 九日이 되니, 이 날로써 한글날을 삼을 것이다. 朝鮮語學會에서는 十月 九日로써 한글날로 改定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이 最後的 決定이 될 것이다.”(《한글갈》. p.56)라고 한 바와 같이 잘못 밝혀 놓았다.
訓民正音의 반포 연도에 대해서는 그 근거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이미 앞에서 고증하였으니 부언할 필요가 없고, 날짜를 陽曆으로 환산하는 과정에서도 크게 잘못되었음을 밝힌다.
1446년 음력 9월 29일을 《兩千年中西曆對照表》에 의하여 양력으로 환산하여 보니, 10월 29일도 10월 28일도 아니고, ‘10월 19일’이다.
그러므로 과거 1932년부터 10월 29일로, 1934년부터는 10월 28일로 고쳐, 1945년 전까지 20여 년간을 전연 잘못 환산된 날로 ‘한글날’을 기념하여 온 것이다.
또한 1945년부터는 ‘10월 9일’로 ‘한글날’을 기념하고 있는데, 비록 《訓民正音》이라는 책의 원고가 完成된 날이라 하여도, 世宗 28년(丙寅, 1446) 9월 上澣, 곧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양력으로 ‘10월 9일’이 아니라, 분명히 ‘9월 30일’이 된다.
이 問題에 대하여 天文曆算學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朴星來 교수(韓國科學史學會長)도 韓國語文硏究會에서 주최한 「世宗大王 誕辰 600周年 紀念 學術大會」에서 “…따라서 世宗 28년 9월은 「訓民正音」이란 책의 완성 시기를 가리킨 것이지, 한글이 완성된 때가 아니다. 이 날짜를 〈한글날〉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世宗 28년 9월 10일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날을 陽曆 10월 9일로 換算하여 그 날을 〈한글날〉로 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그 날이 오늘 우리가 쓰는 陽曆으로는 10월 9일이 되지만, 당시 실제로 사용되던 西洋의 陽曆으로는 엉뚱한 날짜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아직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陽曆-「그레고리오曆」-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陽曆-율리우스曆-으로 換算하면 그 날은 1446년 9월 30일(金曜日)이 된다.”(世宗의 科學과 天文, 1997. 5. 13. p.5)라고 하여 筆者와 동일한 결과를 제시하였다.
「그레고리오曆」에 대하여 설명한 동아출판사에서 발행한 《동아세계대백과사전》에 “…1582년에 새 역법의 공포를 선언하였다. 이것이 현행의 그레고리오曆이다. 이 해에 10일을 생략하고, 윤년은 원칙적으로 4년에 한 번,…”(p.330)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여기서 「이 해에 10일은 생략」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1446년 陰 9월 10일」당시에는 쓰지도 않은 현행「그레고리오曆」으로 환산했다는 데에서 큰 오류가 발생하였다.
《兩千年中西曆對照表》에서도 1582년 10월은 「1, 2, 3, 4 ∼ 15, 16 … 31」로서 「5일」부터 「14일」까지 「10일」을 생략하여 놓았다.
그러므로 「1400년대」의 역사적인 사실의 날짜를 현행 「그레고리오曆」으로 환산하였을 때 원칙적으로 「10일」의 차이가 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당시에 陰曆 날짜에 해당하는 陽曆이 없었다면 환산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으나, 그 당시에도 분명히 陰曆 며칠은 陽曆 며칠로 확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實錄에는 干支로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10일」의 차이를 무시하고 날짜만 소급하여 환산하면 干支가 맞지 않게 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부언할 것은 ‘上澣’은 1일부터 10일까지를 일컫는데, 그 중간을 택하지 않고 마지막날인 10일을 택한 것도 합리성이 없다.
이것을 명확히 고증하기 위하여 《兩千年中西曆對照表》에 의하여, 1446년 陰 9월 10일의 干支를 찾아보니 ‘乙亥’일인데, 《世宗實錄》에도 이 해 陰曆 9월 10일이 ‘乙亥’일로 완전히 일치되었다.
한글학회에서는 무엇에 근거하여 어떻게 환산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주먹구구식으로 그 해의 음력 9월이 작은 달로 29일이라는 것만 알고, 9월 10일에 29를 더하여 ‘양력 10월 9일’을 찾아낸 것 같다.
그러므로 1945년부터 금년까지 50여 년을 ‘10월 9일’로 한글 반포일이라고 매년 기념하여 왔는데, 실로 이 날은 한글 반포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뿐만 아니라, 《訓民正音》이란 책의 원고가 완성된 날도 아니니,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기념하여 온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北韓에서는 ‘訓民正音’창제 기념일에 대하여 “세종 25년 12월(음력)은 1444년 1월이 기본으로 되므로 그 달의 중간인 1월 15일을 잡아서 우리 글을 만든 기념일로 삼는다.”(류렬,《조선말력사》, 사회과학출판사, 1994. 7. 25. p. 485)라고 하였으니, 그 부정확성은 南韓과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南北韓이 모두 「訓民正音」창제일을 제대로 고증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날을 기념하고 있음은 오늘날 「한글」을 세계에 자랑스러이 선양 보급하고 있는 우리 한민족으로서 「한글」을 배우고 연구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참으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한 개인의 생일을 잘 몰라 적당히 좋은 날짜를 잡아서 생일을 정할 수도 있지만, 한글 창제 기념일은 주먹구구식으로 환산한 까닭에 지금까지 엉뚱한 날을 ‘한글날’로 기념하여 왔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며, 문화민족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정확한 한글 創制의 年代와 ‘한글날’은?

앞에서 고증한 바를 간추려서 결론을 내리면, 지금까지 세종 25년(1443)에 한글을 창제하고, 세종 28년(1446)에 반포하였다고 오인하여 온 것을 즉시 시정하여, 역사 기록 어디에도 없는 ‘頒布’라는 말을 쓰지 말고, ‘創制’라는 말로 통일하여, ‘訓民正音’ 곧 ‘한글’의 創制는 世宗 25년(癸亥), 檀紀로는 3776년, 公元(西紀)으로는 1443년으로 확정하여야 한다.
이 기회에 北韓과도 협의하여 현재 북한에서 한글의 창제 연도를 1444년으로 정하고 있는 것도 1443년으로 수정하도록 하여, 조속히 南北韓이 한글 창제 연대를 통일하여, 다른 나라에서도 정확한 한글 창제 연대를 알도록 해야 한다.
‘한글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기념하여 온 반포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10월 9일’은 더 지속해서 기념할 의미가 없는 날이므로 우선 폐기해야 한다.
그 다음 ‘한글날’을 정함에 있어서는 訓民正音의 창제에 대한 기록으로서 《世宗實錄》25년 12월조의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와 《訓民正音》 원본의 鄭麟趾 서문에 “癸亥 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라고 기록된 것에 의거하여 날자를 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관인들의 객관적이고도 합리성 있는 의견을 들어 다시는 異論이 발생되지 않도록 명확히 결정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案이 나올 수 있으나, 참고로 ‘癸亥 冬’의 중간을 취하여 陰 11월 15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2월 6일’이 되니 이 날을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 동안 일개 학회의 오류로 인하여 ‘한글의 창제 연대’와 ‘한글날’을 크게 잘못 기념하여 온 것을 소상히 밝히고, 조속히 올바로 시정하여 줄 것을 건의하는 바이다

 

2,한글날의 유래와 변천

조남호(국립국어연구원), 새국어소식 제3호, 1998.10 . 9.



매년 10월 9일이면 한글날 기념식을 거행한다. 그러면 한글날은 언제부터 경축하기 시작하였을까?

한글 반포 8회갑을 기념
한글날 기념식을 처음으로 거행한 것은 1926년이다. 이 해는 1446년 한글이 반포된 이후 8회갑(480돌)이 되는 해였다. 기념식은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와 신민사의 공동 주최로 식도원(食道園)이라는 요리집에서 거행하였는데 수백 명이 참석하여 당시로서는 성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26년에 기념식을 거행한 날은 10월 9일이 아니라 11월 4일이었다. 이 날이 음력으로 9월 29일이었기 때문이다. 음력 9월에 『훈민정음』을 책자로 완성했다는 실록의 기록에 근거하여 9월 29일을 반포한 날로 보고 기념식을 거행한 것이다.
기념식을 거행하는 중에 이 날을 부를 명칭이 있어야 하겠다는 의논이 나왔고 ‘가갸날’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에 한글을 배울 때 ‘가갸거겨’ 하면서 배웠기 때문에 ‘가갸날’이라고 한 것이다. 당시는 아직 ‘한글’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지기 전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신문 지상 등에서는 ‘가갸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차차 ‘한글날’로 부르게 되면서 ‘한글날’로 굳어지었다.
양력으로 날짜 환산
이처럼 음력 9월 29일에 기념식을 거행했기 때문에 매년 기념식을 거행하는 날이 바뀌었다. 1931년에 들어 와서 모든 생활이 양력을 중심으로 삼는 데 비해 한글날은 음력으로 지내는 것이 불편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1446년 음력 9월 29일이 양력으로는 어느 날에 해당하는가를 계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나온 날이 10월 29일이다.
양력으로 지내기 시작한 해는 1931~1932년 무렵이었다.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이희승과 이극로의 기록에 따르면 1932년부터 양력으로 지냈다고 하는데, 양력 계산 방법은 이미 1931년에 신문 기사로 소개되었고 또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내기로 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그런데 한글날의 양력 계산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져, 전문가와 전문 기관에 문의한 결과 양력 계산은 맞지만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는 게 좋겠다는 일치된 의견이 나왔다. 율리우스력에 따르면 10월 29일이지만, 양력은 1582년 이후 그레고리력으로 바뀌었으므로 양력 계산을 그레고리력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날짜가 10월 28일이다. 그래서 1934년부터는 10월 28일에 한글날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극로의 기록에 따르면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는 기념식을 거행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기념식을 주관할 사람들이 모두 감옥에 잡혀갔다.
1945년부터 10월 9일에 거행
10월 9일에 공개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하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인 1945년부터이다. 한글날이 10월 9일로 된 것은 1940년 7월에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에 나오는 기록에 의한다. 이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에 9월 상한(上澣)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기록에 따라 9월 상한, 즉 상순(上旬)에 반포된 것으로 보고 9월 상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다시 계산한 것이다. 공휴일로 지정된 것도 이 무렵인데,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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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한글날의 발자취
작성자: 한글학회   등록일: 2004-07-27 10:05:51 

"한글날"은 훈민정음의 반포를 기념하는 날, 우리 글자 한글을 기리기 위하여 법으로 정한 날이다. 한글날을 제정한 때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고 있던 1926년이다. 조선어 연구회(지금의 한글 학회)가 1926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 처음으로 '가갸날'이라 이름해서 기념하기 시작했다.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한 것은 한글이 반포된 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글은 조선 세종 28년 '음력 9월 상한'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표되었다. 기록에 따라 9월 상순의 끝 날인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서기 1446년 10월 9일'을 기리게 되었다.

●1926년 음력 9월 29일(11월 4일) '가갸날' 선포(한글 반포 8회갑=480돌).
●1928년 '가갸날'을 '한글날'로 이름을 고침.
●1931년 음력으로 기념해 오던 '한글날'을 양력 10월 29일로 정하여 기념함.
●1934년 음·양력의 환산 방법을 그레고리오력으로 고쳐 10월 28일로 정하여 기념함.
●1940년 "훈민정음" 원본의 발견으로 정통 11년 9월 상한이란 한글 반포의 날이 대강 밝혀졌으나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기념식을 갖지 못함.
●1945년 훈민정음 원본에 따라 1446년 10월 9일이 한글 반포의 날임을 확정함.
●1946년 한글 반포 500돌을 맞이하여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함.
●1981년 '한글날' 기념식이 정부(서울시) 주관으로 바뀜(535돌).
●1982년 '한글날' 기념식을 서울시에서 문화공보부 주관으로 함.
●1991년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함.

▶ '가갸날' 선포: 조선어 연구회(지금의 한글 학회)는, 일제의 억압에 짓눌려 위축되어 있던 겨레얼을 되살리고 북돋우기 위하여, 한글(훈민정음) 반포의 날을 기념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왕조 실록》권113 세종 28년(병인) 9월 조의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是月訓民正音成)."란 기록을 근거로 삼아 서기 1926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 곧 한글을 편 지 8회갑(480년)을 맞이하여, 한글 반포 8회갑의 잔치를 베풀고, 이 날을 '가갸날'로 선포하였다.
▶ '한글날'로 이름을 바꿈: 1928년에는 '가갸날'의 이름을 '한글날'로 고치고, 계속 음력 9월 29일에 기념식을 올렸다.
▶ '한글날'을 양력으로 고쳐 잡음: 1931년에 이르러 우리의 문화 생활이 모두 양력으로 표준하므로 이에 맞춰, 수학 전문가에게 양력(율리우스력) 환산을 의뢰한 바 10월 29일로 되었다. 그 해부터 이 날을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식을 가졌다.
▶ 그레고리오력으로 고쳐 정함: 1934년에 이르러 음-양력 환산 방법에 의문이 생김에 따라, 관련 전문가와 전문 기관에 위촉하여 의견을 모은 바 '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은, '서기 1446년 10월 28일'로 일치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 쓰는 양력(서력 1582년에 개정된 그레고리오력)으로 환산한 이 날로 '한글날'을 고쳐서 기념하게 되었다.
▶《훈민정음》원본의 발견: 1940년 7월에《훈민정음》원본이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끝에 "정통 11년 9월 상한(正統十一年九月上澣)"이란 글이 있어서, 한글 반포의 날이 대강 밝혀졌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져서, 모든 것이 통제되고, 집회를 엄금하는 때이라, 한글날 기념도 하지 못하였다.
▶ 10월 9일로 확정된 한글날: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한글 학회는 새 살림을 차리고, 한글 반포 날인 '정통 11년 9월 상한'을, 상순의 끝 날(상한)인 9월 10일로 잡고, 양력으로 환산한 결과, '서기 1446년 10월 9일'이 되므로, 이 날을 한글날로 확정하였다.
▶ 공휴일로 된 한글날: 1946년 한글 반포 500돌을 맞이하여, 정부에서는 뜻깊은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내외 귀빈과 각계 유지 2만여 명이 덕수궁에 모이어, 기념식을 가졌다.
▶ 기념식이 정부 주관으로: 이제까지 한글 학회와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가 주관해 오던 기념식을 1981년, 535돌 한글날부터는 서울시가 주관하였고, 그 다음 해(1982)부터는 문화공보부(지금은 문화관광부) 주관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공휴일에서 제외된 한글날: 그런데, 1990년 총무처(지금은 행정자치부)에서 법정 공휴일 축소 문제와 관련하여, 한글날도 공휴일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1990년 8월 24일 국무회의에서 한글날을 (국군의 날과 함께) 공휴일에서 제외시키는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의결, 통과시켰다. 이로써 1991년부터 '한글날'은 단순한 기념일로 축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국경일로 제정, 그 위상을 높여야 할 한글날: 그 동안 끌어내려졌던 한글날을 추켜 올려 국경일로 제정하여 온 나라의 잔칫날, 온 누리의 잔칫날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한글 학회를 비롯하여 관련 단체들에서는 국민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기 위해 1999년 7월 9일에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공청회를 여는 등 지금까지 갖가지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글이 세게 5 대 언어가 되다.


이 글은 파리 한인신문 "한위클리"에 실린 글입니다.  

한글이 세계 5대 언어가 된다는 내용으로 민족적 자긍심이 충만해지는 내용입니다. 역시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현재 지구상 언어는 6912종류가 있지만, 언어학자 데이비드 해리슨에 따르면 기존 언어 중 90%2050년까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그러면 살아남을 언어와 어떤 언어가 새로 주도적 언어가 될지 궁금해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100년 후 살아남을 10대 주요 언어로는 6개 유엔 공용어(영어 아랍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중국어 프랑스어) 외에 독일어 일본어 히브리어 그리고 한국어가 될 것이다.

게다가 사용 인구 면에서 한국어는 2050년까지 5대 언어에 속할 전망 이다.한국어의 부상을 네 가지 측면에서 예측해 본다.

  

우선, 언어의 힘은 해당 국민의 생존력이 중요한 요소다.

한국 독일 일본 그리고 이스라엘의 공통점 중 하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쟁과 같은 시련에서 살아남은 국가들이다.

  

독일과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패했음에도 여타 승전국들보다도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이스라엘은 4차에 걸친 중동전과 수많은 국지전에서 아랍세계와 대결을 벌여 버텨온 국가다.  

한국은 20세기에 일제 식민통치를 겪었고, 한국전쟁에서 패망하지 않고 살아남아 냉전의 최전방이라는 일촉즉발의 안보 상황에서도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다.한국은 20세기에 일제 식민통치를 겪었고, 한국전쟁에서 패망하지 않고 살아남아 냉전의 최전방이라는 일촉즉발의 안보 상황에서도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다.

  

이런 생존력은 근면한 국민성을 갖게 만들었고, 근면정신은 생산성 향상에 기여했다. 언어의 힘은 해당 국민의 창의성에 바탕을 둔다국민이 창의적이어야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 경제력에서 앞서가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의성이 바탕이 되어야 국제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을 지속할 수 있다. 

일 자동차산업, 본 소재산업, 스라엘 정밀산업 그리고 한국 전자산업은 모두 세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들 국가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다.또 언어는 문화적으로 친근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 즉 외국어로서 주도적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가 매력적이어야 한다할리우드 영화와 미국 팝음악의 인기가 영어를 친근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듯이 한류(韓流)라 칭하는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인기도를 보면 증명된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아시아와 중동을 넘어 북미에까지 수출되고 있고,K팝이라 불리는 국제화한 대중가요는 유럽에서도 붐을 일으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글의 강점은 최첨단 단순성 (cutting-edge simplicity)에 있다.한글은 문자 자체가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어서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 쉬운 언어라는 뜻이다  

미국 언어학자 로버트 램지는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세계에 없다. 세계의 알파벳" 이라고 했고, 미국 여류작가 펄 벅은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 라고 격찬했다이런 강점 덕분에 문자를 갖고 있지 않은 민족들의 언어를 표기하는 수단으로 한글이 쓰이고 있다. 로 네팔 소수민족인 체팡족과 태국 라후족이 그들 고유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 된다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용 인구에 있어서 한국어는 2050년 안에 중국어 스페인어 영어 그리고 아랍어에 이어 5위에 속하는 언어가 될 것이다.

  

즉 한국어는 향후 40년 내에 사용자 수에 있어서 독일어와 일본어는 물론 유엔 공용어인 프랑스어와 러시아어까지 추월한다는 뜻이다.최첨단 단순성을 강점으로 한 한국어는 세계인들로 하여금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호감을 이끌어 냄으로써 매력적인 외국어로 떠오르고 있다.세종대왕이 창제한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으로서 한글은 반포된 지 600년 만에 세계 5대 언어로 자리매김할 날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출처 : 들샘이 흐르는 곳(Wilderness Fountain)
글쓴이 : 들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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