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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 아리랑에 얽힌 전설.
강원도 정선군 북면 여량리에 위치해 있으며,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의 대표적인 발상지중의 한곳으로서 예부터 강과 산이 수려하고 평창군 도암면에서 발원되어 흐르고 있는 구절쪽의 송천과 삼척군 하장면에서 발원하여 흐르고 있는 임계쪽의 골지천이 합류되어 "어우러진다" 하여 아우라지라 불리우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적인 배경에서 송천을 양수, 골지천을 음수라 칭하여 여름 장마때 양수가 많으면 대홍수가 예상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옛말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이곳은 남한간 1천리길 물길따라 목재를 운반하던 유명한 뗏목 시작지점으로 각지에서 모여든 뗏꾼들의 아라리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특히, 뗏목과 행상을 위하여 객지로 떠난 님을 애닯게 기다리는 마음과 장마로 인하여 강물을 사이에 두고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애절한 남녀의 한스러운 마음을 적어 읊은 것이 지금의 정선아리랑 가사로 널리 불리워지고 있으며 이러한 지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강건너에 아우라지비와 처녀상과 정자(여송정)를 건립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전하고 있다.
아우라지 강을 사이에 두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유천리 총각이 사랑을 했다. 그들은 남몰래 만나 싸리골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이는 뱃사공 지서방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하필이면 그들이 싸리골에서 만나기로 약조한 날 밤 배도 뜰 수 없을 만큼 억수장마가 들었다. 두 처녀 총각은 강을 사이에 두고 애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이 사정을 아는 지서방도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장마가 그렇게도 오래갔던지 아니면 다른 사연이 있었던지, 끝내 둘은 맺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초성 좋은 지서방은 뱃일을 하면서 그들의 사연을 노래했던 것이다.
지금도 정선에는 20여 리 떨어진 여랑리의 아우라지 강에 가면 비록 삿대 없는 배이지만 쇠줄을 당겨 건너는 배가 있다. 또한 강 기정선아리랑비문 슭에는 바람에 날리는 치마자락을 여미고 강물을 그윽히 바라보는 '아우라지 처녀'의 동상이 서 있기도 하다 아우라지에 얽힌 아리랑의 대표적인 가사가 다음과 같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 사시장철 임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 밀양 아리랑에 얽힌 전설.
조선조 명종 때, 밀양에 사는 부사에게 '아랑'이라는 예쁜 딸이 있었다고 한다. '아랑'은 얼굴만큼 마음씨도 고울뿐 아니라 글과 바느질 솜씨가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흠모를 받았다. 그런데 어느날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는 통인이 아랑의 고운 모습을 본 후. 그만 그녀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랑의 유모에게 뇌물을 주고 아랑을 꾀어내게 되었다.
보름달이 뜬 어느날밤, 통인은 영남루에서 달 구경을 하던 아랑에게 나타나 그동안 혼자 연모해 온 것을 아랑에게 고백하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 달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아랑은 냉정하게 통인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렇게 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한 통인은 사모하던 마음이 그만 증오로 변하여, 갖고 있던 비수로 아랑을 찔러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후 밀양에는 부임하는 신임부사들마다 죽음을 당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밀양 부사로 오는 것을 꺼려했다.
이때 서울 남산골에 사는 한 대담한 선비가 자원하여 밀양 부사로 부임했다. 정말 소문대로 부임한 첫날 밤에 여자의 혼령이 나타났다. 그는 "도대체 무슨 곡절이 있길래 이렇게 부사가 오기만 하면 나타나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랑은 통인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이 선비에게 호소했다.
부사는 처녀 귀신과 약속한 대로 통인을 잡아 처단하고 처녀의 묘까지 만들어 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밀양 주민들은 아랑각을 지어 그 처녀의 정절을 기리고 소원을 기원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밀양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 진도 아리랑에 얽힌 전설.
진도의 한 당골에 세습 박수가 되는 것을 비관한 총각이 있었다. 총각은 사랑하는 처녀와 혼약을 남긴 채 진도에서 도망쳐 버린다. 진도를 도망친 총각은 상민이었지만 덩치 좋고 훤칠하게 생긴 탓에 양반집에서 머슴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주인집에는 예쁜 처녀가 있었다. 이 처녀는 집안에서 남정네를 못 보다 머슴의 사내다움을 보고 그만 반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을 나누었고, 그런 사랑놀음은 이내 부모들에게 들통이 나서 야단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총각은 다시 쫓겨나게 되었고 여기에 처녀도 보따리를 쌌다. 둘은 문경고개를 넘어 다시 진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와보니 옛날의 처녀는 턱을 고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들은 양가집 며느리를 맞게 되었다고 야단이었다. 이 통에 기다렸던 처녀는 눈물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노래가 <진도 아리랑>이라고 했다.
구전되어 오던 진도아리랑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우리나라 대금의 명수인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 출신 박종기(1879~1953)선생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신청에서 박종기 선생을 비롯하여 박진권, 박동준, 채중인, 양홍도 등이 함께 모여 아리랑을 작사 작곡하였고 박종기 선생이 진도 아리랑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문화재 수석전문위원을 지낸 본군 출신 남계 박진주, 인간문화재 박병천, 민속에 조예가 있는 구춘홍의 말이다. 이와 같은 진도아리랑은 밀양아리랑이나 정선아리랑 보다 독특한 가락이있고 가사내용이 님에 대한 내용이며 묘한 흥취가 있어서 다른 아리랑보다 우월하게 평가된다. 진도아리랑의 장단은 세마치 장단이며 선율은 시나위형으로 중머리 장단에 불리어진다. 특히 진도아리랑은 가사보다는 그 여음의 묘미가 특색이 있다.
우리 선인들의 얼이 깊이 깃들어 있는 진도 아리랑 타령은 그 가락과 멋과 묘한 흥취가 타 아리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점이 있다.
남도 소리가 대부분 그렇듯이 진도아리랑은 가락이 구성지고 장엄해서 소리하는데 힘이 든다. 태양이 서산에 지는 것이나 '님'이 이별을 하고 떠나는 것은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부득이 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세상 일이란 뜻대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 원산 아리랑에 얽힌 전설.
보통은 <어랑 타령>이라고도 하는 이 <원산 아리랑>엔 그리 깊은 사연은 없다. 다만 신 문물이 들어오기시작하던 때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얘기가 있을 뿐이다. 때는 1905년, 함경도 안변 어촌에 어랑이란 처녀가 있었다. 이 처녀는 근동에서 예쁘고 똑똑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런데 어랑은 몇 년 전에 뱃일하다 죽은 아버지가 남긴 빚이 많아 늘 어머니와 함께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돈 받아내기가 힘들겠다고 생각한 강선주(고리대금 업자)는 아무아무 날까지 빚을 못 갚으면 어랑이를 첩으로 삼겠다는 마지막 통고를 해온다. 이 소식에 두 모녀는 한숨만 쉬고 있었다. 해낼 돈을 없고 그러자니 악명 높은 강선주의 품으로 갈 수도 없고...
날은 점점 다가왔다.
강선주가 통고한 날을 이틀 앞둔 어느날 고산을 헐고 생긴 신고산역이 개통되면서 서울의 고무공장에서 여직공을 모집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어랑은 작은 돈이라도 마련해서 보내겠다고 어머니와 약속하고 서울로 가기로 한다.
신고산 역에서 어머니는 눈물로 어랑을 떠나보냇던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 가르치지도 못해 결국 공장에 딸을 팔아야 하는 신세를 한탄하면서 부른 노래로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