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뮤지컬 청산별곡

아리박 2012. 6. 3. 05:03

청산별곡

 

소백산 철쭉재에 올려진 뮤지컬 청산별곡.

우탁 선생의 단양 귀향 이야기다

 

단양지역 극단인 마당에서 연출한 작품인데 단양의 구경시장(단양의 전통시장)을 무대로 우탁 선생의 持斧上疏( 지부 상소란 상소 사실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 도끼로 내 목을 치라는 뜻으로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상소하는 것을 말함 )를 소재로 하였으며 청산 중에서 활인산수 고장 단양으로의 귀향과 잘 어울리는 각색으로 돋보인다

 

우탁(禹倬, 1262~1342)선생은

고려 말 정주학 수용 초기의 유학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진다. 시조 현()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천규(天珪)의 아들이다.

1278(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름하는 신사(神祠)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 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지부상소를 하였다.

곧 향리인 단양으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동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 (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정이(程頤)가 주석한 역경<정전 程傳>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만에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열전에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다. 또한 시조 2수와 몇 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으나, 1871(고종 8)에 훼철당했다가 1966년 복원되었다. 또 다른 서원인 구계서원(龜溪書院)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아래 탄로가(백발가)는 우탁선생이 단양으로 귀향하여 읊은 시조 세 수이다

 

 

한 손에 가시 쥐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 없다

잠시만 빌려다가 머리위에 불게 하여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늙지 말고 다시 젊어져 보려했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다 되었구나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 지은 듯하여라

 

 

출연진들도 지역 예술인들로 구성되었다는데 춤과 음악에 대단한 의욕과 열정을 보여 주었다

 

 

 

 

 

   우탁선생을 그린 청산별곡

 

  열연중인 출연자들

 

  춤과..

 

  단양 활인산수 고장으로 귀향..

 

   나루공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