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론

문학특강 (시)

아리박 2012. 2. 15. 15:19

문학 특강 (시)



물음표를 붙이거나 혹은 마침표를 찍거나
― 현실 대응의 몇 가지 방식에 관하여


이 성 우



{숨은 신}에서 루시앙 골드만은, 세상이 거짓과 부패에 빠져 있을 때 차마 현실에 굽히고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의 길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세상의 저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 진실을 추구하는 길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된 방향으로 현실을 변혁하는 길이다. 그러나 현실 변혁의 길이 좌절되는 경우 취할 수 있는 세 번째 길은, 진실의 관점에서는 세상을 거부하면서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삶의 방식이다. 골드만의 이 구분법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상당 부분 유효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골드만이 말했던 세 가지 삶의 방식은 실제로는 서로 겹쳐진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사회라는 거대 조직체 안에서 본질적으로 나약할 수밖에 없는 개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도외시한 채 초월이나 변혁의 길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도, 초월의 길이나 변혁의 노선과 철저히 단절된 채 살아간다는 것 역시 의식 있는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 길은 한 시대나 사회 또는 개인이 처한 정황과 지배적인 가치관에 따라 끊임없이 갈라지고 또 교차하는 것이리라. 나는 이 계절에 발표된 시편들을 읽으며, 시인들이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현실에 대응하는 몇 가지 방식들을 추출해 보았다. 물론 나는 여기서 시인들의 현실 대응 방식을 무리하게 유형화할 의도까지는 없다. 다만 현실에 물음표를 붙이며 문제를 제기하거나 느낌표 혹은 마침표를 찍으며 비판을 가하는 시인들의 생각의 뿌리를 더듬고, 그들의 작품이 지닌 남다름에 대해 말하려 한다.

1. 현실에 대해 물음표 붙이기 ― 여태천·임동윤·심재휘·박주택

문장의 끝에 또는 현실의 한 국면에 물음표를 붙이는 것은 사실 마음 편치 않은 일이다. 수사적 차원의 물음이라면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물음표에는 그에 상응하는 답을 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명쾌하게 대답하든 우물쭈물 얼버무리든 물음표는 일단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때로 방법적인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과연 나의 삶은 안녕한가, 그대의 삶은 또 어떠한가? 한 젊은 시인 역시 안부를 묻고 있다.

한 걸음 물러서서 저녁을 기다리는 그대의 집
아직도 캄캄한 창문은 내 그림의 배경이다.
11월의 거리에서 오들오들 떨며 안녕하시냐고,
그대의 안부를 묻는다.
그림 속의 그대도 그런가.
수직의 언덕길을 저녁의 햇살이 막 넘어설 때까지
헐거운 내 그림의 구도는 그대로다.
오후를 지나 무거워진 저녁의 나뭇잎들이
그림 속, 그대 등뒤로 맥없이 떨어진다.
붉은색이 푸른색보다 무거워 보인다고
처음 생각했던 것 같다.
쫓기듯 낙엽의 무게를 빨갛게 그려 넣으며
이건 연습이야, 라고 변명해본다.
― 여태천, [그대는 오늘도 안녕한가] 부분

짐짓 남의 안부를 묻는 이 시의 화자 자신은 정작 오들오들 떨고 있다. 그는 왜 떨고 있을까? 아직 11월이라는 시간적 배경에 비춰 보면 추위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이 시에서 시적 자아를 떨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헤쳐 가야 할 삶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다. 만일 때이른 추위를 느끼고 있다면 그 추위 역시 불안과 두려움 탓이다.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 그 불안과 두려움은 자신의 불확실한 삶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비롯한다. 이 시의 화자는 외부 세계와의 소통 공간인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비유하는 '창문'이 아직도 캄캄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에 드리워진 이 같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해 시적 자아는 스스로의 삶을 실제 상황이 아닌 '그림'이나 '연습'으로 치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푸른색 나뭇잎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마침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자신의 삶도 그렇게 분명한 과정을 밟았으면 좋겠다고 은연중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시적 자아는 그 소망의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안부 인사를 자신의 마음속 그대에게, 자신의 시를 읽어 줄 독자에게 자꾸 건넨다. 그대는 여전히 안녕하시냐고, 짐짓 시치미를 떼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물음표를 붙이는 것이다.
임동윤의 [먼지의 세월 5]는 아파트 주차장에 버려진 자동차를 매개로 삶의 본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작품이다. 나는 지금 제 위치를 찾고 있는가, 제 위치를 잃어버린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제 아이들 놀이터가 된 자동차
차창으로 아이들 신나게 넘나들고
전속력의 빛나던 질주도
한낱 고철덩어리로 누워 있을 뿐,
오, 제 위치를 잃은 자는 남루하구나

다시 하교길의 아이들
우루루 몰려와 핸들을 돌린다
좌회전, 우회전, 직진, 부웅―제멋대로다
더러는 지붕 위로 올라가 쿵쿵대자
철판은 더욱 찌그러져 납작해진다

만신창이 된 몸 위로
무심히 꽃가루 떨어져 쌓이면
내 삶 또한 저렇게
껍질만 남아 떠도는 게 아닐까
― 임동윤, [먼지의 세월 5] 부분

자동차의 본질은 도로 위를 달리는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또 다른 쓸모를 창출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떳떳치 못한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 제 위치를 잃은 자는 남루하구나"라는 탄식은 절실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상실감과 현재의 삶에 대한 무력감이 스스로를 좌절시킨다. 더욱이 한번 제 위치를 잃은 자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기회마저 박탈당하기 십상이다. 자신의 삶이 "좌회전, 우회전, 직진, 부웅―제멋대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과연 어찌해야 하는가? 어느 누구도 쉽사리 답할 수 없을 것이다. IMF 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 급격히 증가한 중년의 실직자들과 젊은 미취업자들을 떠올린다면, 이 시에서의 탄식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시간을 허비하며 그야말로 '먼지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시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스는 잠그고 나왔을까 또
난로는 켜 둔 것이 아닐까 병이
더 깊어지면 말입니다
발로 비벼 끈 담뱃불이나 이별 같은 것들도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데요 그게 말입니다
달아오른 난로나 끓어 넘친 가스레인지
한동안 외로움에 지지직거리던 TV의 마음에도
요새는 안전장치가 있어서 제풀에 꺼지더라
이말입니다 새카맣게 타버리지는 않더란 말입니다
꼭 죽지 않을 만큼만 죽고 싶다가도
금방 멀쩡하더란 말입니다 신기하게도
다시 불이 붙더란 말입니다
세상 도처에 깔린 안전장치들
너무 안심이란 말입니다
― 심재휘, [환자들] 전문

가스불이나 난로불이 꺼졌는지 반복해서 확인하거나 지나간 이별을 돌아보며 미련을 갖는 것쯤이야 흔히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 질환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환자들'은 대개 이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색다른 상황을 설정해 우리들의 고정 관념을 전복시키고 있다. 이 시인이 먼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과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다양한 안전 장치들이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가스불이나 난로불이 끓어 넘치거나 혼자서 외롭게 텔레비전을 시청하다 깜빡 잠이 들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가스가 차단되고 텔레비전의 전원이 꺼지는 식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 안전 장치를 믿고 참으로 마음껏 안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물리적인 메커니즘으로서의 안전 장치의 속성이 은연중 인간들의 사고 구조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시적 자아는 그 스스로가 마치 안전 장치를 내장한 기계처럼 적당히 그리워하고 적당히 슬퍼하는 선에서 자신의 감정을 제어해 왔음을 깨닫는다. 이런 식이라면 가슴을 새카맣게 태우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은, 안전 장치가 고장난 비정상적인 행위로 치부될 뿐이다. 세상 도처에 안전 장치가 깔려 있어 이제는 누구도 제대로 불안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 말입니다'를 반복 사용한 것은, 이러한 정황에 설득력을 부여하면서 시의 리듬을 고르는 효과를 산출하고 있다. 시인이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당신도, 그 '불안 불감증' 환자는 아닌가?
박주택 시인은 [동대문 광인]에서 아예 '광인'을 시의 전면에 내세워 우리들 삶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시에서 광인의 행동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부사어는 '아랑곳없이', '천천히', '경건하게' 등이다. 이에 반해 정상인들의 행위를 수식하는 시어는 '미친 듯이'라는 부사구이다. 이러한 시어 사용에는 시인의 가치 판단 기준이 단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시인이 보기에 이 시대의 '광인'은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집착으로부터 '아랑곳없이'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또한 그 광인은 '미친 듯이' 질주해야 비로소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상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경건하게' 도로를 무단 횡단한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순간, 차들은 미친듯이 달려가야만 하는 제 본분을
잠시 잊어버린 채 성당에 들어선 것처럼 멈칫거리고
바퀴는 바퀴대로 둥글게 눈을 굴리며 의아해 한다
그리고, 호수 위의 고니처럼 그가 도로를 막 건너갔을 즈음
城門에서는 옛사람들이 뒷짐을 지고는
천천히,…… 햇볕 속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 박주택, [동대문 광인] 부분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은 자동차의 본분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 자동차를 만든 인간의 본분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빨리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고 또한 그보다 더 빠르게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든 것은, 오히려 더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닐까. 따라서 이 시에서 "제 본분을/ 잠시 잊어버린 채 성당에 들어선 것처럼 멈칫거리고/ 바퀴는 바퀴대로 둥글게 눈을 굴리며 의아해 한다"라는 구절은, 우리들이 잊고 지내 온 이러한 삶의 진정성에 대한 깨달음을 넌지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城門에서는 옛사람들이 뒷짐을 지고는/ 천천히,…… 햇볕 속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라는 가상의 장면을 그려낸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거로의 퇴행을 문제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시에서의 과거 상황 제시는, 퇴행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현실의 문제 상황을 드러내려는 방법적 측면이 더 우세한 것으로 판단된다.

2. 현실에 대해 느낌표 혹은 마침표 찍기 ― 김용범·오철환·김광규·황규관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을 강하게 비판 또는 부정하는 방식을 취한 작품들도 우리의 논의 대상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작품들의 어조를 문장 부호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느낌표 혹은 마침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김용범의 [쥐좆]은 제목부터 파격적이다. 부정적인 현실을 비판하는 데 아무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다. 이 작품은 전남 담양에 있는 소쇄원(瀟灑園)을 무대로 한다. 소쇄원은 1530년 소쇄 양산보(梁山甫)가 홍문관 대사헌으로 있을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와 더불어 이 곳으로 낙향하여 세운 일종의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화자의 말마따나 소쇄원은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요즘 세상에 그 자취가 묘연한 풍류와 은일의 정신을 되새기려는 사람들에겐 더욱 어울릴 공간이다. 그런데 그 소쇄원이 '쥐좆도 모르는'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고 화자는 신랄한 어조로 비판한다.

헌데 최근 아는 만큼 보인다는 어떤 사람 글 하나가 세인에게 그곳의 그윽한 비경을 널리 알리자 전국 각도에서 쥐좆도 모르는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여기저기 사진을 찍거나 대숲의 왕대나무에 제 이름을 새기지 않나 연락처를 남기고 언제 깨질지도 모르는 것들이 누구는 누구를 사랑한다 몇년 몇월 며칠. 아니면 여름방학 끝 무렵엔 한 달 내내 팽팽 놀던 자식새끼들의 방학 숙제를 대신 해주러 나타난 쥐좆도 모르는 여편네들이 아수라장을 만들고 있다.
― 김용범, [쥐좆] 부분

우리 문화 유산을 널리 알리는 일 자체를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 문제는 문화 유산을 널리 알리는 일 못지 않게 그것을 잘 보존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 두 측면은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 만일 어느 한쪽만의 욕심이 앞서는 경우 이 시에서 적나라하게 비판당한 사례들은 우리들 앞에 거듭 되풀이될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곳의 그윽함을 뽀록낸 놈과 쥐좆도 모르고 그곳을 찾아오는 놈들과 왕대나무나 흙담이나 정자 바닥에 제 이름을 남긴 놈들에게 양처사를 대신해서 준엄하게 감자를 먹이노라." 거의 대놓고 하는 '욕설'에 가까운 이 시의 어조가 오히려 통쾌하게까지 들리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실제 현실에 대한 이 시인의 날카로운 관찰력에서 비롯될 것이다. 특히 이 시에서 화자는 스스로를 '시정이나 관변에서 호구의 끼니를 구하던 잡새'로 규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풍자의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 점 역시 독자의 공감을 사는 데 한몫 거들고 있음은 물론이다.
오철환의 [別有天地 아파트] 역시 현실의 어처구니없는 부분을 들춰내 통쾌한 어조로 비판한 작품이다. 이 시는 화자의 어린 아들이 갑자기 이사를 가자고 조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화자와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28평 아파트를 '강아지 집'이라 놀릴 만큼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 아이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참으로 못된 세상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며 술잔을 기울인 것인가. 이 시의 화자는 이렇게 응대한다.

짱구야! 재물복은 다 텄다
못난 애비니 다음부터는 그래라
우리집은 아파트가 열 채에다
궁궐 같은 전원 주택도 있고
충청도 땅이 모두 우리 꺼라고
― 오철환, [別有天地 아파트] 부분

충청도 땅이 다 자기 것이란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는 이 시의 화자가 어떤 의미에서 충청도 땅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좁은 땅덩이에 이리저리 자를 들이대며 금을 긋고, 네 것 내 것을 따지는 일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통쾌하지 않은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버지는 결코 '못난 애비'는 아니리라. 그에게는 집의 평수나 소득의 액수만으로는 크기를 잴 수 없는 또 다른 기준의 행복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거듭 생각한다. 이 세상을 덜 각玟構?만드는 하나의 방법은, 각자 서로 다른 행복의 기준을 가지는 일이라고. 또한, 그 기준을 서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두 돌이 가까워 오자 아기는
말을 시작한다
엄마
아빠
물…
강아지는 뭉뭉이
고양이는 야우니
그 다음에는
시여…
싫다는 말이다

벌써
싫으냐
― 김광규, [싫어] 전문

이 작품의 표면에서 먼저 읽히는 것은, 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에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주는 화자의 섬세함이다. '뭉뭉이'나 '야우니' 같은 말은 어쩌면 사회적인 약속으로서의 언어 이전에 자연 발생적으로 존재하는 언어의 한 형태를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아마도 그런 자생적인 언어 대신 '강아지'나 '고양이'라고 정해진 대로 발음해야 말이 통하는 사회야말로 이 시의 어린아이가 "시여"라고 부정하는 대상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화자는 "벌써/ 싫으냐"고 응대한다. 화자의 이 말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부사어 '벌써'이다. '벌써'는 일차적으로 외부 세계에 대해 부정의 뜻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어린아이에 대한 가벼운 놀람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벌써'라는 부사어가 뒤에 이어지는 '싫다'라는 말을 기정 사실화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시의 화자가 이 세상의 삶에 대해 '싫다'고 할 만큼의 부정적 태도를 지녀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린아이의 말 배우기를 앞세운 이 짤막한 시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부정성과 함께 그에 대한 시적 자아의 냉소적인 태도를 함께 확인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의 태도는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의 단계를 지나서 현실을 부정하는 수준에 가깝다. 그는 물음표나 느낌표 대신 현실 부정의 마침표를 찍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침표가 현실에 대한 부정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작품에서 마침표는 하나의 마지막인 동시에 또 하나의 시작으로 묘사된다.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또 울었을까
소멸이 아니라
소멸마저 태우는 마침표 하나
비문도 미문도
결국 한 번은 찍어야 할 마지막이 있는 것,
다음 문장은 그 뜨거운 심연부터다
아무리 비루한 삶에게도
마침표 하나,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 황규관, [마침표 하나] 부분

마침표는 물론 마지막 순간에 찍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침표가 반드시 체념이나 소멸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시에서 말하는 마침표는 차라리 당당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막연한 기대와 몽상 끝에 주저앉거나 우는 대신 떳떳하게 마침표 하나를 찍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을 기약하라고 이 시의 화자는 말한다. 현재의 삶이 비루하다면 마침표 하나를 당당히 찍고 그것을 새로운 희망으로 전이시키자는 것이다.

3. 마침표 뒤에도 남는 것 ― 이승하·박종국

사람의 일생 또한 그 육신이 마침표를 찍었다고 해서 의미가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육신이 살아 있을 때는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지만, 육신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타인들이 그의 삶을 말하기 때문이다.

내 어릴 때 밤마다 파고들어
만지며 잠들었던 할머니의 젖가슴
쪼글쪼글 볼품없이 쪼그라졌는데
치매의 몸에도 봄기운 도시는지
옷고름 풀어헤치고 양지쪽에 앉아
젖가슴 꺼내놓고 나를 부르시네
개나리 진달래 꽃길로 나서며

[중략]

고개를 끄덕이며 창부타령 한 가락
나비처럼 나풀나풀 우리 할머니
가슴 다 내놓고 저승길 걸어가시네.
― 이승하, [할머니의 젖가슴] 부분

이 시를 통해 그 존재 의미를 부여받는 것은 이 시를 쓴 시인이 아니다. 이 시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것은 '할머니의 젖가슴'이다. 죽음의 경계를 넘어 할머니의 젖가슴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존재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는 볼품없이 쪼그라졌을망정 할머니의 젖가슴은 이타적인 것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손자에게는 평안함을 주고, 그것은 할머니가 일생을 마감하면서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는 훈장 같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에 대응하는 몇 가지 삶의 방식 가운데서도 가장 윗길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이타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가슴 다 내놓고 저승길 걸어가시네" 하는 마지막 부분이 특히 감동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 때문이다.
이 시에서는 또한 종결어미 '-네'의 반복 사용으로 인한 시적 효과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문법적으로 종결어미 '-네'는 문장의 끝에서 감탄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 시에서 종결어미 '-네'는 제삼자적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히 공감이나 어떤 행위에의 동참을 유도하는 효과를 산출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이 시의 도입부에서 "팔순 넘긴 할머니 양지쪽에 앉아/ 젖가슴 꺼내 또 만지고 계시네"라고 말하면 그것은 은연중 독자들에게 할머니의 젖가슴을 함께 바라보자는 조심스런 청유의 뜻을 나타낸다. 또 마지막 부분에서 "나비처럼 나풀나풀 우리 할머니/ 가슴 다 내놓고 저승길 걸어가시네" 할 때도 종결어미 '-네'는, 작품 속의 할머니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마지막 길을 함께 배웅해 주었으면 하는 화자의 바람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이것은 감탄의 뜻을 지닌 종결어미 '-네'가 시 작품에서 반복적?운율을 통해 새로이 청유적인 의미를 산출한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운율 효과는 이 시에서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는 '할머니의 젖가슴'에 대한 여운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박종국 시인의 [늦가을, 다랭이 논] 역시 할머니들의 이타적인 삶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참된 삶의 방식에 대해 성찰한 작품이다.

그루터기만 남은 갈라터진 논바닥
먹이 찾아 날아든 참새들,
부리질 하는 들판은
내어줄 것 없어 안쓰럽다

오늘 아침 신문은 한 생애
도라지 쪼개고 콩나물 팔아서
몇 억 학교재단에 맡긴
할머니의 까뭇까뭇한 머리칼로 눈부시다

늦가을 들판 매운 바람에
나는 쩌억쩍 갈라진다
― 박종국, [늦가을, 다랭이 논] 부분

'내줄 것 없어 안쓰럽다'라는 구절이야말로 할머니의 이타적인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다. 그 할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줌으로써 이제는 그루터기만 남은 논바닥 같은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 할머니의 삶을 초라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내놓은 또 다른 할머니의 이야기를 도입함으로써 이타적인 삶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기본적으로 모성애에 바탕을 둔 할머니들의 이타적 삶이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될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할머니의 머리칼을 희끗희끗하다고 표현하는 대신 까뭇까뭇하다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묘사한 이 시인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작품의 끝부분에서 화자는 스스로를 심히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그 부끄러움의 어름에서 서성거릴 뿐이다.
결국 물음표를 붙이거나 또는 느낌표나 마침표를 찍더라도 그 문장의 의미는 문맥 속에 살아 있고, 그 삶의 가치는 뒷사람들의 기억 속에 간직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현실에 대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섣부른 문장 부호를 남발하고, 또 어찌 어설픈 논리를 앞세워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타적인 차원으로 스스로의 삶을 끌어올리지는 못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