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산방(단양)

퇴계의 매화사랑

아리박 2010. 6. 5. 16:32

 

 퇴계의 매화 사랑

퇴계 선생은 매화를 끔직 히도 사랑했다.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하여 부르면서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로 매화를 사랑하였던 퇴계는

생전에 우리 역사상 단 한권 밖에 없는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시집도 편집하였다. 그래서 매화를 노래한 詩가 1백수가 넘는다.

이렇게 놀랄 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매화의 선비적인 고고한 품성을 받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나이어린 관기 두향 때문이기도 하다.

 


퇴계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48세 때고 두향은 18세였다.

두향은 나이는 어리지만 시문(詩文)과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와 난초를 좋아하여 품성마저 아름답고 재기가 넘쳤으며 매화를 분에

심어서 기르는 재주도 있었다. 두향은 퇴계선생의 고매한 인품에 매료되어 흠모하며 사모의 정을 떨칠 수가 없었고, 처신이 고고하고 깨끗한

퇴계선생 역시  두향의 총명과 재능을 인정하여 서로 시와 음율을 논하고 산수를 거닐며 잠시나마 인생의 여유를 가지게 되지만.
부인 허 씨와 사별 한 후 또 후취 권 씨와 두째 아들까지 잇달아 잃게 되었던 퇴계선생의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와 같았던 두향이기에

차갑게만 대할 수 없었기로 날이 갈수록 은근하게 깊어지고만 사랑은 겨우 10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갑자기 퇴계선생이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듯 한 변고가 아닐 수 없었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

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선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며 두향의 치마폭에 붓을 들어 

死別己呑聲 生別常惻測(사별기탄성 생별상측측)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다." 라고 썻다.

 

두향이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재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年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퇴계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부화(富華)한 시중잡배와 어울리는것은 존경하고 사랑했던 어른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하여 지방관에게 간곡한 청을 올려 관기에서 빠져 나와 퇴계선생과 자주 갔던 남한강가 강선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퇴계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건네 준 수석(壽石) 2개와 매화분(梅花盆)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는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두향을 보듯 매화를 곁에 두고 애지중지했다. 先生이 병환이 깊어 행색이

몹씨 초췌하게 되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이기 민망 스럽다는 생각으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게 했다.

 

 

퇴계선생은 그 뒤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거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퇴계의 마지막 한 마디는.....

 

"매화에 물을 주거라."


이 한마디는 先生께서 매화 같은 두향을 잊지 않은 채 언제나 가슴 가득 담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퇴계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을 걸어서 안동을 찾았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드디어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이별 후 살아서 한 번도 만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가슴속 깊이 품고 사모하며 살았던 두 사람 이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선생에 대한 고절(高節)한 절개를 지켰다.

퇴계선생을 향한 두향의 사랑은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매화향기 만큼이나 그윽했지만 그 애절함에는 가슴이 시리고 저리지 않을 수 없다.
그윽 하면서도 간절한 사랑의 메시지로 두향이 퇴계 선생에게 건네주었던 매화는 퇴계선생 사후 도산서원

뜰에 심어져 자라다 오래전에 고사 하였지만 대를 잇고 이어 지금은 그 손자 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고 전해진다.

 


퇴계선생과 두향의 이야기가 기록된 공식자료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퇴계문중의 고증을 토대로한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을 통하여 처음으로 소개 되었다 한다. 조선후기 몇몇 명사들이 두향 묘를 참배하고 그 정경을

읊은 시가 남아 있기도 하고 퇴계선생의 제자였던 이산해가 스승의 연인 이였던 두향의 묘를 대대로 돌보도록

하여 근대에 까지 제사를 지냈다고도 전해진다. 두향의 무덤이 처음은 강선대 아래에 있었으나 충주땜 건설로

강선대가 수몰되자 퇴계선생 후손들의 주선으로 위로 이장되었다 하는데 지금은 지역 향토문화 연구회에서

매년 5월 단오에 “두향제”를 열며 잘 보존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