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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치악산 영원사 얽힌 이야기

아리박 2021. 1. 21. 17:19

원주 치악산 영원사 얽힌 이야기

 

원주의 여자 금원과 인목왕후 이야기

 

원주 치악산 영원사

 

이 글은 치악산 영원사에 갔다가 영원사 명칭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서 알아 보았더니 이런 자료를 알게 되었다

원주를 떠난 여자 금원과 원주로 간 여자 인목대비 글를 쓰신 박종인 선생님께 감사 드린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94) 원주를 떠난 여자 금원과 원주로 간 여자 인목대비

"비록 세상을 다 보았으되, 나는 그저 여자였으니…"

세상의 절반은 여자라 했다. 갈 길 아직 멀지만 남녀 평등사회가 오기까지, 그녀들의 삶은 지난하였다. 그 지난한 삶을 발과 눈으로 느껴보려고 강원도 원주로 가본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두 여자의 옛 삶을 한번 느껴본다. 한 여자는 금원(錦園)이라 하고 한 여자는 인목왕후라 한다.

금원 이야기

원주 계집아이 금원이 어느 날 생각한다. '내 나이 열넷. 내년이면 나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지. 이름 모를 남자 것이 되고 나면, 보고 싶은 세상 죽을 때까지 볼 수 없으리.' 하여 그녀가 탈출을 감행한다. 아비를 조르고 어미를 졸라서 남장(男裝)을 하고서 정처 없이 떠난다. 태어나 처음 본 바다 앞에서 그녀가 이리 읊는다.

바다를 보다(觀海·관해)

모든 물 동쪽으로 흘러드니

깊고 넓어 아득히 끝이 없구나

이제 알았네, 하늘과 땅 아무리 커도

내 한 가슴에 다 담을 수 있다는 걸

百川東匯盡(백천동회진)

深廣渺無窮(심광묘무궁)

方知天地大(방지천지대)

容得一胸中(용득일흉중)

놀랍지 않은가. 열네 살 먹은 계집아이가 한다는 말이 그 광대무변한 천지 사방을 한가슴에 다 담을 수 있겠다니. 금원이 길을 떠난 때는 서기 1830년이요,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이름은 금원이다. 남정네도 쉬이 길을 떠나기 힘든 시절 금원은 충청도 땅(湖)과 금강산과 관동팔경(東), 북쪽 관서지방(西)과 한양(洛)을 두루 여행하였다. 훗날 그녀가 머리에 비녀를 꽂고 쪽을 찌고 써내려간 젊은 날 여행기가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였다.

1830년, 열네 살 아이의 여행

'호동서락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관동 봉래산 사람으로 스스로 호를 금원이라 칭했다. 조용히 내 인생을 생각해보니 사람으로 태어나 행복이요 문명국에 태어남이 행복이다. 여자로 태어난 것은 불행이다.' 성리학이 득세한 조선을, 여자로 살아내기가 얼마나 복잡한지 그녀는 알았다. 또 있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규방 깊숙이 앉는 게 옳은가? 세상에 이름 남기기 단념하고 분수대로 사는 게 옳은 일인가?'

하여 금원은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계례(筓禮)를 한 해 앞두고 일생일대의 여행길을 떠났다. 부모도 남장을 조건으로 당돌한 도전을 허가했다. 충청도와 금강산 자락, 한양을 둘러보고 세상 넓음을 알고 깜짝깜짝 놀랐다. 장사치들이 출몰하는 포구도 보았고 바위 위에 놀고 있는 물개들도 보았다. 모두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바다를 대면하고는 이리 말한다. '인생이 덧없음을, 그리고 몹시 가련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바다에서 덧없음을 읽었다 하고 천하를 자기 것으로 하겠다고 이야기하는 십대 여자아이의 여행. 기이하지 않은가. 그렇게 고향 땅 원주를 떠나 관동과 호서 땅 충청도와 한양 땅 두루두루 살피고선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 '다 보았으니 여기서 그침이 옳을 것이다. 본분으로 돌아가 여자 일에 종사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여 마침내 남장을 벗어버리고 예전으로 돌아오니 아직 나는 쪽 찌지 아니한 여자이다(遂脫去男服 依舊是未筓女子也).' 또 놀랍지 않은가. 천하를 집어삼킬 호탕한 그녀가 모든 걸 포기하고 여자로 돌아가겠다니.

열네 살짜리 여행기는 바로 거기에서 끝난다. 그리고 여행기에서, 그녀는 시간을 훌쩍 넘어 1845년 의주 부윤 김덕희의 소실로 등장한다.

기생 금앵(錦鶯)

1830년과 1845년 사이 금원에 대한 기록은 남정네들이 쓴 글에 나온다. 김이양이라는 문신이 이렇게 쓴다. '최근 관동에 다녀온 사람이 하는 말이, 산 중에는 금강을 물 중에는 동해를 사람으로는 금앵을 보았다고 한다.' 이리 덧붙인다. '나이가 어리지만 성취함이 높아 요즘 기녀들과 다르다.' '원주 기생으로 금앵이 있는데 스스로 호를 금원이라 한다. 재주와 용모와 노래와 시가 이름이 높았다.'(홍한주, '해옹시고초') 역대 기생 역사를 다룬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이능화, 1927)'에도 금원을 기생으로 언급하고 있다. 양반가 소실로 재등장하기까지 내력을 금원 본인이 숨긴 것은 그녀가 기생으로 업을 삼았음을 부끄러워했음이 아니었을까. 금원이 기생 금앵과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녀를 첩으로 삼은 김덕희는 추사 김정희의 육촌형제다. 훗날 김정희가 그녀의 글을 보고 이렇게 쓴다. '어찌 이처럼 기이한 글이 있단 말인가. 비단 같은 작은 마음 속에 거대한 바다와 높은 산을 감추고 있으니 내가 곧장 부끄러워 죽고만 싶다.'(김정희, '완당전집')

세상이 그러하였다. 고향이 원주이되, 원주에는 금원을 알리는 그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금원은 서울로 가서 시회(詩會)를 이끌며 살다 죽었으나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고 어디에 묻혔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인목왕후 이야기

1602년 서울 반송동에 살던 이조좌랑 김제남의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었다. 선조는 쉰 살이었고 그녀는 열여덟 살이었다. 반송동은 지금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근처다. 이듬해 명나라 황제가 이를 윤허하는 칙서를 보냈다.

그녀에게도, 연안 김씨 문중에도 경사였다. 한 나라의 국모, 한 나라 최고 권력자의 아내로 더 누릴 바 없는 최고의 행복을 누릴 그녀였다. 4년 뒤 아들까지 낳았다. 1608년 지아비 선조가 죽었다. 세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인목왕후는 대비로 승격됐다. 혹독한 불행이 시작됐다. 5년 뒤 날벼락이 떨어졌다. 번듯하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광해군을 놔두고,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반역이 발각된 것이다. 그 가운데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있었다.

누명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때려죽여야 한다"는 관료들에게 광해군은 "도저히 그리할 수 없다"며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렸다. 인목대비의 오빠 김래, 두 동생 규와 선은 곤장을 맞고 죽었다. 일곱 살짜리 아들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폐됐다가 이듬해 절절 끓는 온돌방에 갇혀 쪄 죽었다. 광해군에게 "상감도 선왕의 아드님이고 대군도 아들이니 정을 생각해서라도 차마 해치겠는가"라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계축일기)

1618년 광해군은 인목대비 본인까지 폐비시키고 김제남 시신을 끄집어내 부관참시를 해버렸다. 관을 부수고 시신을 토막 냈다는 뜻이다. 1602년 그날, 왕비로 간택되는 경사만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피바람이 연안 김씨 문중에 몰아쳤다. 그 피바람 속에 인목대비는 창덕궁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쫓겨나고 신분도 후궁인 서궁(西宮)으로 격하됐다. 버려진 궁궐에서 서궁은 벌레 똥이 묻은 나물로 끼니를 때웠다. 암울한 시간이 흘렀다. 1623년 3월 13일 세상이 바뀌었다.

인조반정과 인목대비의 복수

서인 세력이 인조를 옹립하고 광해군을 내쫓았다. 반정의 그날, 덕수궁을 찾아온 인조에게 인목대비가 이리 말했다. "역괴의 죄를 아시오? 내 덕이 박하여 모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으로써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국가가 거의 망하게 되었었는데 사군의 효를 힘입어 위로는 종사를 안정시키고 아래로는 원한을 씻게 되었으니 그 감격스러움이 이 어찌 끝이 있겠소."

그러고는 신하들에게 이리 말한다. "광해군 부자는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다. 참아온 지 오랜 터라 내가 친히 그들 목을 잘라 죽은 혼령들에게 제사하고 싶다(願親斫渠父子之頭 以祭亡靈).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린 것이다. 쾌히 원수를 갚고 싶다."(인조실록 인조 1년 3월 13일)

신속하였고, 과감하였다. 인목대비는 곧바로 아비 김제남의 신원을 복원시켰다. 죽은 혼령들에게 제사하겠다는 원도 풀게 되었다. 부관참시됐던 시신을 사돈 달성 서씨 서경주가 목숨을 걸고 수습해 몰래 묻어둔 게 아닌가. 경기도 양주에 묻혔던 김제남은 딸의 엄명으로 지관이 골라낸 땅 원주 안창리로 이장됐다. 고려 태조 왕건이 혁명을 꿈꿨던 건등산이 바라보이는 산기슭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김제남 묘소에는 지금도 풍수가들이 와글와글 몰려와 땅을 살핀다.

기적이 하나 더 일어났다. 오라버니 김래의 아들 천석과 군석, 동생 규의 아들 홍석 또한 살아 있던 것이다. 천석과 군석은 어머니 초계 정씨가 "우리 아들들은 다 죽었다"고 속이고 원주 친정집으로 보내 화를 면했다. 외가 다락에 숨어 있던 두 아이는 치악산 영원사에서 동자승으로 살았다. 두 살이던 홍석 또한 자기 외가로 피난 갔다가 외할머니 치마폭에 숨어서 화를 면했다. 그 아이들이 인조반정과 함께 모두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나이 열여덟에 왕에게 시집가 아비는 부관참시에 아들은 쪄 죽고 형제는 맞아 죽고 자기 자신도 유폐당했던, 인목대비를 안식케 해준 땅, 바로 원주였다.

그 원주에서 태어난 여자 금원이 이리 말한다. '스쳐 지나가면 눈 깜짝할 사이 한바탕 꿈이니 진실로 글로 전하지 않으면 누가 지금의 금원을 알겠는가(往事過境卽瞥然一夢耳苟無文以傳之則孰有知今日之錦園者乎).' 문득 보니, 금원도 인목대비도 우리는 이름을 모르고 있지 않는가. 그 어디를 찾아보아도 그녀들을 찾을 수 없었다.

[출처] [박종인의 땅의 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