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스크랩] 시인의 요절과 마지막 시 1

아리박 2009. 11. 12. 01:46

[기획] 시인의 요절과 마지막 시 1

 

계간 시인세계
박정만 /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 김영석 시인

박정만 시인
박정만은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이기도 했지만 학교로 따지면 그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내리 같은 학교를 다닌 3년 후배다. 대학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모습에서 순하디순한 토끼를 연상했다. 갈색의 크고 투명한 눈이 그랬고, 숫된 시골아이가 낯선 곳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 어쩐지 쑥스럽고 어색하여 괜히 씩―하고 웃는, 그런 웃음을 버릇처럼 곧잘 보이는 양이 또한 그랬다.

죽을 때까지도 그의 그런 숫보기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예컨대 무슨 문단의 행사에 다녀오거나 글 쓰는 친구들을 만나고 왔을 때, 그는 “광대뼈를 흔들면서 사교계를 좀 누볐지.”라고 익살스럽게 과장된 한 마디를 날리면서 예의 그 씩―하는 웃음을 짓곤 했다. 내 요량으로는 그 말의 속뜻이 ‘낯짝 두껍게 젠 체하면서 세상 나들이하느라 참 혼났네.’쯤으로 들렸다. 그만큼 그는 세상살이를 아주 낯설어 했고 자신의 삶이 영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져 몹시 주체스러워 했다.

그는 애초부터 이 세상에 잘 적응이 안 되는 피를 가지고 태어난 떠돌이였다. 그래서 그는 아주 생래적으로  죽음을 꿈꾸었던 듯하다. 엄청난 양의 그의 시편들 어디에나 떠돌이의 슬픔과 죽음의 푸르스름한 이내가 감돌고 있다. 그의 시와 삶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되는 다음의 초기 시 몇 구절을 보라.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가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 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는
마을마다 떠다니는 슬픈 귀동냥.       

'잠자는 돌' 1, 2연

한 마장의 하늘을 떠도는
떠돌이의 피를 가지고
자네, 민들레 꽃씨 같은 얼굴을 하고
어디로 어디로 흘러가는가.
(중략)
나무 그늘 돌 위에
고단하게 쓰러진 저녁 어스름.
쓸어도 쓸어도 쌓이고 쌓이는
그 수정水晶의 푸른 어스름.           
                
'풍장 2' 1, 3연

박정만 시비는 그의 고향 전북 정읍의 내장사 입구 호수공원에 세워졌다.



'잠자는 돌'은 내가 알기로 고등학교 시절의 작품인데 등단 후에 개작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보듯이 그는 벌써 이때부터 죽음을 꿈꾸고 있다. 그는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굳세게 어둠을 짚어가야 하는 어금니는 처음부터 뿌리가 없어 슬픈 귀동냥으로 마을마다 떠다니고 있다.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다니는 떠돌이의 삶과 그런 삶이 종내 그릴 수밖에 없는 죽음의 슬픔이 「풍장 2」에도 아주 잘 드러나 있다. 돌 위에 쌓이고 쌓이는 수정의 푸른 어스름은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떠돌이의 가슴에 늘 이내처럼 감돌고 있는 슬픔과 한이리라.

박정만이 지닌 그 토끼 같은 순진성과 죽음을 향한 떠돌이의 피가 때로 묘한 광기와 열정을 만든다는 것을 안 것은 그를 안 지 한참 뒤의 일이다. 기억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때가 박정희의 3선 개헌으로 세상이 좀 어수선할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고인이 된 조태일 형과 함께 관철동 어느 구석집에서 우연히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조태일 형은 나와 정만이의 대학 선배니까 오랜만에 나누는 세 선후배간의 허물없는 자리였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술기가 꽤 올랐을 때였다. 시에 대한 각자의 평소 생각들을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태일 형과 박정만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들어 보니 조태일 형은 박정만의 시가 개인적인 서정에만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적인 충고를 하고 있었고, 정만이는 조태일 형의 시가 시적 감성과 언어감각이 결여된 채 지나치게 목적의식에만 기대고 있다고 맞받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만이의 말투와 태도는 평소의 그것이 아니고 생판 딴 사람 같은 열기와 격정을 띠고 있었다.

두 사람의 논쟁 아닌 논쟁이 점점 술기와 더불어 거칠어지는 듯싶더니 드디어 정만이의 무슨 말 끝에 조태일 형이 정만이의 뺨을 후려치게 되었다. 그러자 묘하게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던 정만이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냅다 술잔을 들어 조태일 형의 면상에 패대기를 치는 것이 아닌가. 형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형은 그 우람한 체격의 치수에 딱 맞게 말없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피를 그저 쓰윽 한 번 훔치고 나서 거푸 소주 몇 잔을 들이켜더니, “나 먼저 나간다. 다음에 보자.”하는 말을 남기고는 나갔다.

두 사람이 그 뒤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는 듯이 여전히 잘 지낸 것은 물론이다. 박정만의 그 토끼같이 순한 심성 속에는 이와 같이 그 자신의 시에 대한 주장과 고집이 오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광주사태를 겪고 난 5공초 암울하던 때, 정만은 청진동 근방의 모 출판사 편집장 일을 맡고 있었다. 봄볕이 더없이 화사한 어느날 오후. 나는 최명희(아, 그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와 그 출판사 부근의 조용한 술집에서 정만이를 불러냈다.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그랬듯이, 글러먹은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몹시 침울하고 다소간 체념적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곧잘 그렇듯이 이야기는 회고조로 변했고 취기가 오르면서는 다시 글러먹은 문학과 글러먹지 않은 문학으로 화제를 바꾸어 목청을 돋우기 시작했다.
 
희미한 기억들을 모아보면, 박정만은 요약컨대 시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연면한 정서를 표현해야 하며, 그 표현은 마땅히 우리말의 가락과 뜻이 미묘하게 결합된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우리말에 대한 시적 감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글러먹은 시에 대해 개탄했던 것 같다. 이에 최명희도 동의하면서, 우리의 것을 우리 세대에 복원하고 세련시키지 않으면 우리 문학은 큰 줄기를 하나 잃어버릴 것이 틀림없다며 대략 전통주의적 입장을 이야기했고, 나는 이들의 말을 다소 예스럽게 표현하여 조선주의 또는 조선혼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동의했던 것 같다.

한참 이야기가 도도할 무렵 열려진 뒷문을 내다보니 보자기만한 뜨락에 새로 돋은 여린 풀잎들 위로 화사한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이가 늘어나면서 이제는 많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나는 그런 봄볕의 정경을 보면 슬프다 못해 그만 처참해지고 만다. “처참하구나, 처참해.” 무심코 뱉은 내 말에 정만이 눈치를 챘는지, “형, 저 봄볕이 우리들 먹으라고 하늘에서 뿌리는 청산가리요, 청산가리.
 
저 청산가리 소주에 타서 마시고 우리도 그만 청산가리나 됩시다.” 하고 말을 받았다. 이어 우리는 “자, 청산가리 한 잔.” “청산가리 곱빼기로 또 한 잔.” 하고 외치면서 거푸 잔을 들었고, 정만이는 드디어 물기 어린 눈을 번들거리며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의 18번을 달뜬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봄날에는 꽃 안개 아름다운 꿈속에서 처음 그대를 만났네……” 그런데 낌새가 이상하여 옆을 보니 술은 입술에 대는 둥 마는 둥하던 최명희가 흰 무명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누이처럼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생각하니 정만이는 제 식으로 잘 직조된 조선말의 영롱한 시들을 썼고, 최명희도 또한 제 식으로 조선혼을 소설에 수놓지 않았는가 싶다.

그러고 얼마 안 있어, 잘 알려진 대로 박정만은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악명 높은 서빙고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나왔다. 그때 모래내에 있던 그의 전셋집을 찾아갔는데 예의 그 어색하게 씩―하고 웃는 모습은 이미 예전과는 달리 아주 메마르고 하얗게 풀이 죽어 있었다. 골병 든 삭신의 어혈을 푸느라고 무슨 한약을 막걸리에 달여먹고 있노라 했다. “갇혀 있던 방 철창 너머에 소학교가 있는데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햇살처럼 들려와요. 그때 현실과 꿈이 한가지라는 생각이 듭디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의 뿌리 없는 떠돌이의 삶은, 그의 시 구절처럼 쓸어도 쓸어도 쌓이는 수정의 푸른 어스름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아주 때를 만나 작파한 듯 잠자는 돌을 향하여 막 굴러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혼, 그리고 어느덧 양식이 된 술.

내리막길을 굴러가는 사람의 절박함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그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는 삽화 하나. 그가 골병 든 심신을 달래면서 술을 마시다가 탈진하면 더러 링거나 영양제 주사를 맞곤 했는데, 그때 주사를 놓아주던 처녀 간호사 염모 씨와 서로 정이 들어 상계동에서 동거 비슷한 생활을 할 때였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그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형, 빨리 좀 집으로 오세요. 빨리요, 큰일 났어요.” 쫓기듯 이 말을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지만 필시 그의 말투로 보아 무슨 큰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라 짐작하고, 상황판단과 응변에 있어 누구보다 믿음직한 이윤기를 급히 불러내어 같이 달려갔다. 방안에서는 여러 사람의 거칠고 험악한 목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들어 보니 염씨의 집안 사람들 몇이 염씨를 강제로 끌고 가려는 것이었고, 정만이는 막무가내로 그걸 가로막고 있는 중이었다. 말리고 자실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자식이 셋이나 딸린 중년의 이혼 남자에게 어느 부모가 토달지 않고 아직 처녀인 딸을 고분고분 내놓겠는가. 결국 중과부적으로 염씨는 끌려 나갔고, 우리는 정만이를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길길이 뛰는 정만이를 우리도 더는 어쩔 수 없어 놓아주었더니 그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맨발로 댓걸음에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큰길을 맨발로 내달려 가더니 염씨를 잡고 죽어라 매달렸다. 그러나 힘으로 어찌 당하겠는가. 뜯어 말리는 힘에 의해 길 복판에 나둥그라지며 그는 좀 어떻게 해달라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사정하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눈빛은 내리막길로 굴러가는 자의 마지막 안간힘, 이승의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안타까이 잡아보려는 본능적인 절박한 몸짓,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 뒤 그는 염씨와 상계동의 작은 교회에서 열 명도 채 안 되는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기원정사라는 암자가 있는 변두리 야산 기슭에 보금자리를 튼다. 그러나 이미 가속도가 붙은 뿌리 없는 떠돌이의 숙명적인 내리막길을 그 부인 혼자의 힘으로는 처음부터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거의 곡기를 끊고 술로 버티며 때때로 미친 듯이 시를 써 갈기던 그는 벌써 저승과 교신을 하고 있었다. 끝내 그 부인도 떠나고 그는 홀로 남아 오로지 시와 술에 한사코 매달렸다.

“형, 시를 들려주는 목소리가 밤낮이고 끊임없이 들려요. 어떤 때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죽어라고 그걸 받아 적어야만 해요. 그걸 받아 적지 않으면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아요.”
이것이 그 무렵 그가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시를 끊임없이 써야 했고, 그 시 쓰는 행위는 또한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잉걸불을 부채질하며 사위게 했다. 거기에다 그의 양식은 오직 술밖에 없었다. 그가 죽기 전 한 달도 채 되지 못하는 사이에 써낸 수백 편의 시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가 죽기 바로 전, 봉천동 어느 초라한 개인 병원에 잠시 입원하고 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시를 들려주던 그 목소리들이 좀 뜸해졌어요. 내가 더 이상 쓸데없어 이제 다들 가버렸나 봐요. 이런 게 평화가 아닌가 싶네요.” 그의 말소리가 거의 바람소리가 다 되었다고 느끼면서, 잠자는 돌 위에 쌓이는 그 수정의 푸른 어스름이 벌써 짙은 어둠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나는 그때 보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그의 딸로부터 전해 듣고 달려가, 그가 없는 빈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여기저기 노트쪽에 써 갈긴 짤막한 시들을 무슨 유골 조각 줍듯 가려서 훗날 그의 시 전집 속에 함께 담았다. 그때 수습한 마지막 그의 시, 그것이 “나는 사라진다 /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종시」 전문) 라는 것이다. 삶 자체가 천형인 그런 사람이 있다. 시 아니고는 아무 데도 마음을 부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박정만이었다.

김영석  1945년 전북 부안 출생.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썩지 않는 슬픔' '나는 거기에 없었다', 논저에 '도의 시학' 외 10여 권이 있음. 
 

 

 


 
김남주 / 김남주는 ‘대지의 시인’이었다 
- 김준태 시인
 
·시인의 사명은 귀향歸鄕이다.   - 프리드리히  횔덜린
·시인은 그 민족과 함께 울고 웃지 않으면 안 된다.  - 가르시아 로르까
·흙(혹은 대지)에서 발바닥을 뗀 문학은 힘이 없다. 아무리 힘센 거인이라도 땅에서 발이 떨어졌을 땐 힘없이 넘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문학도 그렇다.  - 김남주
·김남주는 요절시인이 아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있는 시인이다. 행여 시간을 놓칠세라 황급하게 고향의 논밭으로 돌아간 ‘한국의 마지막 농촌시인’이다.  -김준태

 

김남주 시인

오랜만에 고향 해남을 찾아간다. 광주에서 삼백 리 길, 서울에서 천 리 길인 한반도의 ‘땅끝’ 마을 해남. 지금이야 두 시간이면 족히 닿을 수 있지만 60년대 그 시절만 하더라도 광주에서 버스로 5시간이나 걸리기도 했던 해남 가는 길. 그러나 나는 천 리면 어떠랴 만 리 길이면 또 어떠랴 하면서 고향 가는 날은 온통 들뜬 심정이다.

일찍이 서산대사께서 “내가 열반에 들거든 내 유품들을 저 해남 대흥사(대둔사)에 모셔라. 해남 땅은 삼재(三災 : 물·불·바람 혹은 전쟁·전염병·흉년 따위의 재앙)를 면할 수 있는 천하의 명당이니라.”고 말한 곳이 아닌가. 84년의 생애 중에서 무려 41년 동안이나 용맹정진한 묘향산 보현사를 제쳐두고 굳이 남녘땅 해남 대흥사를 택한 서산대사. 아마 그래서 님의 말씀처럼이나 해남은 지리학적 의미로서의 ‘땅끝’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다시 담아 놓을 수 있는, 그리하여 그 무엇들을 다시 꽃 피우게 할 수 있는 그런 ‘시작始作의 땅’으로서 더 간절한 의미를 갖는 땅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같다.

광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어느덧 영암 월출산 터널을 지나 해남군 지역으로 들어선다. “월출산 높더니마는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는구나. 두어라 해 퍼진 후면 안개 아니 걷히랴.” 영암 월출산 풀티재를 넘을 때마다 언제나 읊조리곤 했던 고산 윤선도의 시구를 두어 차례 입술에 올리는 사이 내가 탄 버스는 그렇게 한반도의 최남단 지역 해남의 논밭을 가로질러 달린다.

바로 이때인가 싶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언제나 그랬듯이 ‘먼 옛사람’이 돼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한 김남주 시인이 구름과 바람결을 헤치고 다가와 미소짓는다. 나보다 한국문단에는 늦게 나왔지만 두 살이 위인 동향 선배 김남주 시인. 그는 자신의 고향마을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으로 나를 안내한다. 해남읍내에서 남쪽으로 4km 지점에 위치한 삼산면 봉학리란 마을. 완도로 가는 국도에서 조금 비껴 서자 전형적인 한국의 소나무 숲 사이로 그리웠던 시절의 새떼들이 쏟아내는 노래 소리가 한창이다. 시인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그의 생전 필생의 시와 사상과 행동을 지배했던 ‘고향의 흙(대지)’이 어디로 무너져 내리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서 이 봄날 파릇파릇 숨쉬느라 바쁜 모습들이다.

“나의 아버지와 고정희 아버지는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지. 그래서 한때는 서로 사돈을 삼자고 농담 아닌 진담, 진담 아닌 농담도 즐겁게 나누며 살았던 모양이야. 저 건너 고정희네 마을도 우리 마을처럼 대흥사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로 농사를 짓고 있지.”

살아 생전 김남주가 했던 말을 떠올리려니 아닌 게 아니라 김남주 생가와 고정희 생가는 고작 1.5km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 1980년대 한국시를 대표하는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 생년월일을 짚어보니 전자는 1946년생으로 봉학리에서 태어났고 후자는 1948년생으로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물론 봉학리와 송정리는 행정구역상으로 같은 삼산면에 속하며 예로부터 대둔산 대흥사의 사찰문화권에 깊숙이 뿌리를 대었던 마을로 보인다. 두 마을은 대흥사와는 불과 2.5km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대둔산 최고봉인 두륜봉을 아주 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김남주의 고향집 마당에 들어선 나는 그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잊지 않는다.
 
광주 비엔날레 공원에 세워진 김남주 시비를 찾은 부인 박광숙 씨와 그의 아들 토일


“남주! 오랜만일세.”
“준태 자네도 참 오랜만이네. 이미 아홉 해 전에 죽은 내가 무슨 얘깃거리가 된다고? 허허, 하지만 염려할 것 없네. 내 개인 이야기가 아니고 내가 태어난 ‘우리 동네’에 얽힌 얘기를 한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네. 우리 동네… 가진 것이라곤 흙과 나무와 새소리밖에 없는 우리 동네… 그리고 저 죄 없이 누워 있는 논밭들과 농부들의 황폐한 얼굴빛… 하지만 이 흙 위에 서면 언제나 내 가슴엔 힘이 솟구친다네.”
 
1988년 12월 21일. 전주교도소에서 9년 3개월만에 출감한 김남주 시인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 몇 대목을 이 자리에 옮겨와 보면 감회가 깊을 것 같다. 내가 5·18필화사건으로 고교교사에서 해직된 후 신문사에 들어가 일하고 있었던 그 무렵 인터뷰다.

 -김남주 시인, 그럼 우리에게 있어 시인은 누구이고, 무엇입니까?
“시인은 우선 시대의 중대한 문제를 비켜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라는 민족문학이 올바르게 설 수 있으니까요. 시인은 싸우는 사람과 동의어입니다.”

 -김남주 시인은 앞으로 생활을 어디에서 할 예정입니까?
“고향에 내려가서 흙의 노동을 할 것입니다. 건강과 시를 보살피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문학의 힘은 노동과 자기와의 부단한 투쟁을 통하여 솟구치는 것이기도 한데 문학은 이를테면 민중의 생활과 직결된 것이지요. 그리고 대지에서, 흙에서 발바닥을 뗀 문학(시)은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힘센 거인이라도 땅에서 발이 떨어졌을 땐 힘없이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문학 역시 대지(흙)와 노동에서 발을 뗐을 경우 절로 힘이 빠져버림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노동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개한 원시인에서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대지 위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듯이 60년대 한국 민족문학의 정점을 김수영·신동엽이 이루었다면 70년대는 김지하이고 80년대는 김남주이다. 온몸을 바쳐 싸웠던 실천행동에서도 그랬었지만 이들의 문학적 성과물 또한 한국시를 상당한 수준으로까지 이끌어 올렸다는데 이견을 달 사람들은 없는 줄로 안다. 그런데 내가 이 자리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김남주의 모든 시편들이 대지(흙)를 바탕에 깔고 씌어졌다는 그 말이다. 자유와 투쟁을 노래한 시이든, 통일을 노래한 시이든, 민중과 민족을 노래한 시이든, 광주학살에 분노한 시이든, 자기변혁을 노래한 시이든, 아니면 고향의 풀꽃들을 노래하는 서정시이든―김남주의 모든 시편들은 흙과 대지 위에 분명히 자신이 두 다리를 탄탄하게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김남주의 시적 상상력하며 시적 언어들은 거의 대부분이 그의 고향 해남의 논과 밭에서, 그리고 거기에 사는 농민들의 삶 속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메마르지 않고 생경하지도 않고 촉촉이 물기를 내뿜는다. 거칠게 쏟아대는, 메시지가 강한, 정치현실을 질타하는 시에서도 그의 시편들은 방금 쟁기로 갈아 엎어놓은 흙 알갱이처럼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다가 마침내 우리의 가슴을 깊숙이 적시거나 흔든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의 마지막 농촌시인(혹은 농민시인)’이란 레테르를 그의 이름 앞에 또 하나 더 붙여놓아도 좋을 그런 시인인지 모른다.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항거한 함성지 사건과 남민전 사건 등으로 10여 년을 옥살이한 김남주. 그러나 그는 오히려 비단결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이었다. “시인은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시대의 중대한 문제와 싸우는 해방전사와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행동으로 외치다가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옥독獄毒으로 마흔아홉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쳤지만 그가 즐겨 부른 노래들은 전투적인 노래가 아니었다.

그의 18번은 남인수의 노래로 알려진 「고향의 그림자」 따위다. 수배자 혹은 보호감찰 대상자가 되어 언제나 쫓겨다니며 숨어 살아야 했던 그는 자신의 아버지께서 땅에 묻히던 날마저도 감옥문을 나갈 수가 없어 ‘신세타령’하듯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로 시작되는 노래를 섧게 섧게 부른 것이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수박등 흐려진 /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 적에 / 똑딱선 프로펠라 소리가 이 밤도 / 처량하게 들린다 물 위에 복사꽃 / 그림자같이 내 고향 꿈에 어린다”를 부를 때 그의 두 눈동자는 항상 고향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눈물 글썽이던 김남주의 농촌적 순결성―그것이 바로 그의 시의 무기가 아니었을까.

아기무덤 고와서

안아 주고 싶고

어미무덤 포근해서
꼭 안기고 싶고

나는 몰랐네 예전에
우리나라 무덤이 이렇게
곱고 포근한 줄을
나이 들어 애기 낳고
추운 날
양지바른
산에 들에 가서야 알았네   
- '무덤'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옛 마을을 지나며'
 
시 「무덤」과 「옛 마을을 지나며」를 읽노라면 어느새 내가(아니 우리들 모두가) 그의 고향마을 가까이에 와 있음을 알게 된다. 아니 우리들 모두가 저마다 자신들의 고향 산모롱이쯤에 닿아 있음을 고요히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멀지 않았던 옛날, 적어도 김남주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시절만 하더라도 고향 마을로 가는 양지바른 산비탈에는 아기무덤과 어미무덤이 함께 누워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는 몰라도 손에 쥐듯 제비꽃 몇 송이를 피우며 누워 있는 아기무덤과 어미무덤―그 모습이 한량없이 예쁘다며 시인은 “아기무덤 고와서 꼭 안아주고 싶고 어미 무덤 포근해서 꼭 안기고 싶”다고 말한 뒤 “우리나라 무덤 이렇게 곱고 포근한 줄을 …추운 날 양지바른 산에 들에 가서야 알았”노라고 노래한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 서정시 중에서 가장 예쁘고 감동이 깊은 시로 읽혀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전주 교도소를 나오던 날 김준태 등의 시인과 자리를 함께 한 김남주 시인(오른쪽에서 두번째)



아기무덤과 어미무덤을 죽음의 흔적으로 보지 않고 꼭 안기고 싶은 생명체인 듯 노래하는 시인은 역시 시 「옛 마을을 지나며」에서도 예사롭지 않게 새로운 발견을 하고 환희에 젖는다. 단순한 나무 끝이 아니라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들을 위해 홍시 하나쯤은 남겨두는 우리네 농촌 사람들의 마음을 “조선의 마음”이라고 크게 비유하며 추켜올려 세운다. 감나무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홍시(까치밥) 하나에서 우리 민족의 ‘여유’를 발견한 이 시는 김남주 시인이 바라고 바랐던 우리 민족의 ‘희망’ 그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유가 없으면 희망이 없고 희망이 없으면 통일할 수 있는 여유도 또한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옛 마을을 지나며」는 단 4행밖에 안 되는 시이지만 ‘큰 시’라는 느낌이 불끈 들게 됨은 어쩔 수가 없다.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시인의 사명은 귀향이다”라고 노래했다. 그 말은 시인이 민족과 함께 울고 웃으며 노래하기 위해서(스페인 시인 가르시아 로르까)는 시인 자신이 그 나라 사람들의 고향의 흙과 자연, 그 모든 생명체들의 꿈틀거림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내가 해남에 가서 만난 시인 김남주가 “대지에 뿌리박은 문학(시)이야말로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고 실천적으로 강조한 말은 내일의 한국문학에 분명히 유효한 코드가 될 것으로 점쳐진다.

김남주― 그는 남녘 땅끝 마을이 낳은 ‘대지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 「고목」을 읽으며 그와의 만남을 끝낸다. 「고목」은 차라리 「거목」이라고 제목을 고쳐도 좋을 시가 아닐까. 김남주 고향 역시 몇백 년 족히 넘은 듯한 거목이 한국의 여느 마을처럼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 거목은 어쩌면 김남주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이나 푸르게 가지와 이파리를 퍼뜨리고 있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살 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 년
쉽게 살고 싶지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고 싶다.
- '고목' 

김준태  1948년 해남 출생. 1969년 《시인》지로 문단에 나옴. 현재 조선대 국문학부 초빙교수. 시집으로 『참깨를 털면서』 『국밥과 희망』 『불이냐 꽃이냐』 『칼과 흙』 『지평선에 서서』 외. 세계문학기행집 『슬픈 시인의 여행』 등 다수.
 

 


고정희 / 그가 남긴 여백
-박해란 여성학자

해마다 6월 첫 주말을 해남행으로 잡아 놓은 지 벌써 12년째다.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 동인들은 그렇게 1년에 한 번씩 해남 송정리의 고정희네 집(태어났던 곳과 잠들어 있는 곳)을 찾는다. 한동네에 살아도 친구나 지인의 집을 방문한다는 일이 점점 번거로운 행사가 되어가는 게 요즘의 도시생활이다. 그러나 해마다 고정희네 집을 찾는 일만은 늘 가슴을 설레게 하고 또 아리게 한다.

고정희 생가에 들러 아직도 체취가 흠뻑 남아 있는 그의 유품들을 둘러 보고, 청량한 솔바람이 반겨 주는 그 무덤의 푸른 잔디를 쓰다듬고, 나날이 주름이 늘어가는 큰올케가 정성 들여 마련한 돼지고기와 수박을 배불리 먹고, 그리고 저녁 늦게 대흥사를 기웃거리는 일과는 또문 동인들에게 이제 하나의 신성한 의례로 자리잡았다. 분망하다 못해 분열적이기까지 한 일상에서 허우적거리던 동인들은 이렇게 1년에 한 번씩 고정희와의 만남을 통해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는다.

동인들뿐만 아니다. 살아 생전 곳곳에서 고정희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이물없이 동행하기도 하고 생전에 고정희와 아무런 연결이 없었던 해남 지역의 문인들도 절반은 손님처럼 그리고 절반은 주인처럼 부드럽게 어울린다. 10년 되는 해부터는 고정희를 이름으로도 알지 못했던 어린 소녀들이 함께 해남행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정희의 무덤에 술을 따르고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른다. 나의 친구 고정희는 이렇게 서서히 역사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해마다 6월이면 고향 해남에 있는 고정희의 무덤에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런데, 나의 친구 고정희―이 말이 맞나? 1991년 6월 7일(?) 필리핀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오랜만에 또문 월례논단에서 ‘여성주의 문체혁명과 리얼리즘’이란 주제로 발표를 마치자마자 그는 지리산으로 떠났다. 가뜩이나 작은 몸피가 오랜 이국생활로 한층 줄어든 몸에 커다란 배낭을 지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튿날 그는 뱀사골 계곡에서 발을 헛디뎠다. 그의 장례식은 11일날 광주 지역의 문인 친구들이 마련한 민족문학인장으로 치러졌는데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내내 미흡해 했던 또문 친구들은 서울로 돌아온 직후 여성주의적인 의식을 새로 치르기로 이미 뜻을 모으고 있었다.

고정희가 죽은 지 한 주일이 지난 6월 15일,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고정희를 보내고 부르는 마당>이란 이름으로 치러진 추모제는 전통적인 의례형식을 살리되 자매애를 강조하고, 고정희가 비록 기독교인이었지만 기독교에 제한되지 않고 불교와 무교까지 아우르는 형식을 취한 매우 독특한 의례로서 참석자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각인되었다.

또문 동인들은 일생 흘릴 눈물을 그 한 주일 동안 다 흘렸던 것 같다. 나도 정말 끔찍스럽게 울어댔다. 내 몸 어디에 그토록 풍성한 눈물보가 숨어 있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울음이 그치는 짬이면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아니, 고정희란 사람이 나한테 이토록 가까웠던가, 그는 도대체 나에게 어떤 존재였길래 나를 이렇게 울리는 걸까.

솔직히 추모제를 치르는 내내 나를 비롯한 또문 동인들은 고정희에게 친구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별과 나이와 직업을 초월해서 고정희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상 이상으로 광범위했다. 해남을 떠나온 이후 20여 년 간 고정희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또 고정희의 사람 사귀는 법을 생각해보면 그건 아주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정희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이들이었으며 하나같이 고정희의 죽음이 던진 충격 속에서 헤매는 중이었고 졸지에 사랑하는 벗, 후배, 선배를 잃은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또문 동인들은 이제 비로소 그들이 알았던 고정희가 고정희의 아주 작은 부분이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추모제에 왔던 고정희의 친구들에 비하면 나와 고정희의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물론 또문의 몇몇 동인들과 비교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데 있어서 시간은 단지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쳐도 내가 고정희와 알고 지낸 기간은 햇수로 쳐서 고작 7년밖에 안 됐을 뿐만 아니라 다정한 전화나 편지 한 장 오고 가지 않은 지극히 덤덤한 사이였다. 그리고 또문 동인지나 여성신문을 만들면서 함께 일했던 그 짧은 기간에도 어쩌면 다정한 말보다 사나운 말로 서로를 긁어대기 바빴었다. 만약 살아 있었으면 지금쯤에야 겨우 친구라고 불러도 괜찮을지 모를 그런 사이였다. 무엇보다 나는 고정희를 친구로 삼기에는 그와 내가 살아온 길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다. 고정희 역시 같은 생각이리라 짐작했다. 나는 그를 인간미가 증발된 쇠고집퉁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나를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정실부인이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과 동시에 나의 친구가 되었다. 그의 죽음이 그토록 억울하고 안타까웠던 건 단지 우리 시대의 걸출한 시인이자 실팍한 여성운동가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그를 내 인생의 중년에 만난 귀한 친구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죽어서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고정희를 만난 건 1984년 가을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마련된 과 특강에서였다. 기실 『이 시대의 아벨』 이후 난 그의 열렬한 독자였다. 자칫 중산층 가정주부의 몰사회성에 빠져들려던 내게 그의 시는 일종의 각성제 구실을 단단히 했던 터였다. 
‘한국 여성문학의 흐름’이란 주제였지만 강의 말미에 그는 갑자기 ‘광주를 잊으면 안 됩니다.’라는 말로 결론을 맺었다. 아마도 수강생들이 여성문제에만 파묻혀 민족과 민중의 문제를 간과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신촌역 앞의 토속주점에서 뒤풀이가 있었다. 난 선생님의 시를 읽었다면서 약간은 아양을 떨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함박꽃처럼 피어 오르던 그의 웃음. 하지만 눈매에 담긴 쓸쓸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던 그 기묘한 조화.

그 이후 7년간 고정희와 나는 자주 만났다. 특히 1988년 여성신문의 창간을 전후한 1년 동안은 편집주간과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거의 매일 만났고 매일 마셨고 매일 싸워댔다. 우리집이 여성신문사와 5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고정희는 걸핏하면 신문사 일을 끝낸 늦은 밤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손에 들고.

싸움의 주제는 언제나 두 가지였다. ‘민중이냐, 여성이냐’와 ‘개혁이냐, 개량이냐’. 고정희는 중산층 여성들의 온건노선에 넌더리를 냈다. 그러나 여성운동의 대중화를 지향하는 경영진과 편집진들은 고정희의 과격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이념의 충돌과 상관없이 고정희는 여성신문을 한국 최초의 여성정론지로 자리매김하는 데 온힘을 바쳤다. 힘들게 모은 돈으로 안산에 아파트를 마련했던 그는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까지 신문사에 남아 있었다.
한번은 그의 아파트에서 또문 동인지 편집회의를 연 적이 있었다. 동인들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항상 수도사처럼 질박한 차림으로 다녔던 고정희의 또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놀랐다. 인테리어는 물론이려니와 차주전자 하나에서까지 정성과 안목이 밑받침된 세련된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타고난 살림꾼이었다. 주부경력 20년차였던 나는 주눅이 든 채 공연히 심술이 났었다. 아니 이렇게 깔끔 떨며 사는 여자가 우리 집을 어떻게 참아냈을까 싶었다.

그날 밤새도록 동인들은 고정희와 내가 서로 주고받은 욕설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했다. 또문 동인들은 아마 태어나서 쌍시옷 발음 한 번 못해봤기 십상이었기에 우리 둘이 잔뜩 취해서 이 세상의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모아서 쏟아 내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나 보았다. 지금까지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고정희 시인


어떻게 해서 욕이 시작되었는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짐작컨대 누구의 소설 이야기를 하다 발동이 걸렸던 것 같다. 두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뱉어낸 욕설들은 그때까지 살아 오면서 읽었던 소설에서 봤던 것들인데 그것들이 뇌 어딘가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그날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나 보았다. 한 사람이 뱉어내면 둘이 한참을 깔깔거리다가 또 받아내고, 그러면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됐다가 또 이어지고……. 나중에 우리는 그때 녹음기를 꺼놓은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두어 시간 동안 계속 욕을 주고 받았다면 웬만한 욕 사전 한 권쯤은 너끈히 꾸미고도 남았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날 아침 우리 둘은 다시 새침 떠는 교양녀로 돌아왔고 질펀하게 쏟아냈던 그 욕들은 어디론가 감쪽같이 숨어 버렸다. 그 욕 사건을 계기로 고정희와 나 사이에 쳐 있던 장막이 걷혔다.

창간 이듬해 여성신문을 그만둔 고정희는 그해 가을 『저 무덤에 푸른 잔디』를 들고 나타났다. 일곱번째 시집이었다. 그토록 빠듯한 일과 속에서도 그는 새벽 다섯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시를 쓰던 노동자였다. 나는 여성신문에 실릴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를 만났고 그와 처음으로 싸우지 않고 다섯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내가 여전히 존경하는 시인이었고 나는 착실한 독자였다.

이젠 생계를 위한 직장생활은 그만두고 시만 쓰고 살겠다던 다짐대로 그는 1990년 하반기에 세 권의 시집을 냈다. 『광주의 눈물비』와 『여성해방출사표』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 하나』. 나중 두 권은 그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탈식민주의. 시와 음악 워크숍”에 참여하러 한국을 떠난 사이에 나왔다.   

여성해방운동이라는 전제하에서 쓴 최초의 시집으로 기록될 『여성해방출사표』에서 고정희는 오랫동안 심각하게 갈등해 온 사회변혁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접점을 찾으려는 의지를 뚜렷이 보여 주었다. 특히 이 시집의 3부는 고정희가 여성해방운동의 걸림돌이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해 왔던 여성끼리 갈라서기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비전을 한 편의 연극처럼 풀어내고 있다.

내가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읽은 건 고정희가 죽은 이듬해 또문 동인지 9호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에 추모글을 쓰기 위해 그의 모든 시집을 통독했을 때였다. 그의 연시들만 모아서 시집을 낸다고 했을 때 난 도무지 탐탁치 않았다. 안정된 수입이 보장된 중산층 주부의 이기심 탓이었으리라. 내가 존경하는 시인은 이슬만 먹고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심리가 작동했다. 그래서 시집이 나왔을 때 외면했다.

뒤늦게 그의 사랑노래를 읽으면서 나는 펑펑 울었다. 그 사랑이, 그 외로움이 너무 깊어서. 생전에 그가 즐겨 부르던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머리 속에서 웅웅거렸다. 사랑하는 이에게 뿌리침 당한 고정희는 가끔 내게 그 상처를 내비쳤지만 나는 속수무책으로 고작 포도주나 권할 뿐이었다. 그런 날 새벽에 고정희는 연시를 썼나 보았다.

고정희의 마지막 시들은 그가 죽은 지 꼭 한 해가 지나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로 묶여 나왔다. 1부 ‘밥과 자본주의’는 마닐라의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새삼 발견했던 자본주의라는 악령에 대한 분노를 거침없는 입담으로 토해내고 있다. 3부는 남남북녀의 혼인잔치라는 형식을 빌려 민족공동체를 넘어서 인류공동체가 평화롭고 평등한 삶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는 통일굿 마당이다.

그리고 이 시집에는 고정희의 죽음이 알려지자마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껏 호기심을 드러냈던 그의 마지막 시 「독신자」가 들어 있다.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듯
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오 하느님
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
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
…    
자신의 기도대로 고정희는 뱀사골의 계곡물에 섞였다. 이슬처럼 단숨에. 
시인은 예언자이다.
영정 속의 고정희는 해가 갈수록 젊어가고 그가 남긴 여백은 날이 갈수록 점점 커져만 간다.

박해란  1946년생. 여성학자. 여성신문 편집위원. <또 하나의 문화> 동인. 저서 『삶의 여성학』 『나이 듦에 대하여』 외.

 



기형도 / 죽음을 예감했던 마지막 시 「빈집」
-하재봉 시인

기형도 시인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1월, 어느 신문의 신춘문예 심사평에서였다. 기형도는 당선되지 못했고, 최종 심사평에 그의 시 일부가 언급되어 있었다. 당선시가 아니라 최종 심사 대상에서 거론되다가 낙선한 시의 일부가, 심사평에 자세하게 소개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심사위원들이 최후까지 고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당시 <시운동> 동인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감수성과 어법으로 무장된 새로운 시인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1980년 12월, 하재봉·안재찬·박덕규 세 사람이 함께 시집을 낼 때부터 우리는 3인 시집이 아니라 <동인지>라고 못을 박았고, 이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한기찬, 경희대에서 함께 시를 썼던 이문재, 《동아일보》로 등단한 남진우 등등이 동인활동에 합류했었다. 또 박덕규와 함께 대구에서 시를 썼던 박기영, 박기영의 소개로 만난 장정일, 그리고 오규원 선생의 소개로 만나게 된 황인숙 등등이 <시운동>에 합류하게 된다.
1984년은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폐간된 문지/창비의 양대산맥의 빈 공간을, 다양한 동인지, 무크지 등이 메꾸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한 평론가에 의해 ‘소집단 운동’이라고 명명된 당시의 문학 운동은, 한정된 문예지 지면의 대안공간으로서 동인지나 무크지가 이용되었던 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상상력과 시적 실험으로 형성된 동인 집단들이 칼날을 갈고 혁명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기형도의 짧은 시가 눈에 들어왔다. 당선된 시보다, 심사평에 언급된 그의 시 일부가 훨씬 더 가슴을 쳤다. 나는 수소문 끝에 기형도가 연세문학회 멤버라는 것을 알았고, 확신을 갖기 위해 연세춘추 교지에 실린 그의 시도 미리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당시 나는 군인 신분이었지만, 서울 교외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외출을 나와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종로 2가에서 3.1빌딩 쪽으로 꺾어지는 모퉁이 2층에 있었던 ‘민화랑’이었다. 갤러리는 아니고 전통차를 팔던 찻집이었다. <시운동> 동인들은 대부분 술, 담배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배 냄새 자욱한 일반 카페보다는 이런 곳을 훨씬 선호했다. ‘민화랑’에서는 금연이었다.

나는 약속시간에 박덕규, 남진우와 함께 나갔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어떤 남자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기형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연세문학회 선배였던, 그리고 당시 이미 문예지 추천으로 등단했던, 시인 오봉진과 함께 그 자리에 나왔다. 나는 그에게 <시운동> 동인을 같이 할 것을 제의했다. 그는 망설였고, 며칠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며칠 뒤, 그는 추후 함께 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더불어 나에게 타이프로 A4 용지에 깨끗하게 타이핑된 시 한 편을 보내왔다. 훗날 발표된 「포도밭 묘지」라는 시였다. 특히 그 시는 당시 우리 <시운동>이 펼쳐가고 있었던 시세계와 흡사했다. 그는 명백히 <시운동>이 추구하던 시세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아마도 문예지나 신춘문예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성 시인들과 동인 활동을 같이 하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 다음해 1985년, 우리는 1월 1일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발표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선작 「안개」는 기형도의 대표시는 아니다. 신춘문예 스타일을 고심해서 응모한 시였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그는, 이미 그때 《중앙일보》 기자시험에 합격해서 수습기자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제대해서 한 잡지사의 수습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나 역시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춘문예 시상식장에서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5년 등단 이후 기형도와는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초보 기자로서 힘든 수습 생활을 하고 있었고, 수습 딱지를 뗀 후에는 정치부 기자로서 총리실을 출입하며 정치 기사를 썼다. 워낙 바쁜 생활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자주 연락을 하며 지냈다.

나는 <시운동> 동인지를 만들 때마다 그에게 연락을 했었다. 1년에 한 번 정도 발간된 <시운동> 동인지는 어떤 때는 1년에 두 번 발간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기형도는 머뭇거렸다. 그의 시는 빠른 시간 안에 기존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자신의 시에 대해서 깊은 자기 확신이 있었던 그는 향후 시단의 방향을 예민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문화부로 부서를 옮기면서부터였다. 나도 직장을 옮겨 문예진흥원에 근무하고 있었고, 출판 홍보를 책임지고 있던 나의 직속 상관 박제천 시인은 언론사에 홍보할 일이 있으면 나를 내보냈기 때문에, 나는 업무차 사대문 안의 신문사를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했었다. 내가 방문하는 곳은 각 신문사의 문화부였고 당연히 기형도와는 얼굴 마주칠 일이 늘어났다. 그러나 우리가 더 자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편집부로 옮기게 된 뒤부터였다. 사실 그의 편집기자 시절이 우리의 황금기였다. 왜냐하면 늘 기사를 써야 했던 정치부/문화부 시절과는 다르게 그에게 여유 시간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1988년부터 1989년 3월 7일 새벽, 그의 돌연한 죽음까지 우리는 자주 어울렸다. 어떤 날은 하루에 3번 넘게 인사동 골목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기형도가 문화부 방송 담당 기자였던 시절, 방송국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중앙일보》 방송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신문 맨 뒷 페이지 오른쪽 상단, 그날 하루의 방송 스케줄이 빼곡하게 짜여진 한쪽 귀퉁이에 실린 방송면은, 순수문화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던 80년만 해도 일종의 액세서리였으며 방송이라는 대중문화, 하위문화에 대해 형식상으로 마련된 지면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작은 지면을 놀랄 만한 탄력의 공간으로 바꿔놓기 시작했다. 방송국 프로듀서들을 긴장시켰고 제작 간부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신문사 동료들과 함께. 맨 왼쪽이 기형도. (1989년)


그가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겨간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소상하게 증언하고 있으므로 피하겠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그의 완벽주의, 주위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그의 꼼꼼함은, 시에서는 더욱 심한 것이었다. 시에 대한 그의 이러한 엄정성이 사뭇 그리워진다.
1988년부터 나는 <시운동> 팸플릿을 발간하고 있었다. 매월 20여 쪽 내외로 구성된 작은 팸플릿은 문단 관계 인사들에게만 우송되던 새로운 동인운동이었다. 1년에 한 번 출간하는 동인지의 연장선상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단의 징후를 포착하고 문제를 부각시키며 논리를 다듬기 위해 만들어진 ‘시운동 팸플릿’ 맨 뒤쪽에는, 젊은 시인들의 모임 후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소위 문단에 ‘시운동 청문회’라고 명명되었던 이 모임은 대략 2주에 한 번 꼴로 인사동에 있는 평화만들기 혹은 토담 등등에서 개최되었는데 최근 시집을 낸 시인이 초청 대상이었고, 젊은 시인 평론가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2, 30대로서 등단 10년이 안 되는 젊은 시인들이었다. 초청 대상이 된 어떤 시인은 그날 목욕재계하고 나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만큼 단순히 친목을 위해 어울린 것은 아니었고 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쏟아졌던, 조금은 살벌하기도 했던 모임이었다.

이 시운동 청문회의 단골 고객이 기형도였다. 그는 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하면서도 할 말을 정확하게 하는 그에 대해 누구나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1차 청문회는, 무차별한 폭격으로 초청 대상이 된 시인의 시를 난타하는 것이었다. 상찬도 있었지만 그것은 드문 경우였고, 시의 결점을 주로 잡아내서 토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기가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1차 모임이 끝나면 그때부터 음주 가무로 들어갔다. 이때 가장 빛나는 사람이 기형도였다. 우리는 그를 ‘문단의 카수’라고 불렀다. 교회 성가대 출신답게 고운 음색과 정확한 음정으로 그가 노래를 부르면, 우리는 모두 조용히 그의 노래를 경청했다. 기형도의 연세문학회 동기였던 시인 성석제가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이후, 시운동 청문회에서는 기형도와 성석제의 이중창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나는 아직도 두 사람이 함께 노래 부르던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 「웨딩케익」 같은 노래들을 기억한다. 아니, 그런 노래만 들으면 기형도 생각이 난다.

1989년 3월 6일 아침, 나는 중앙일보사로 갔다. 그리고 편집부 그의 책상을 찾았다. 그날 저녁 샘터 파랑새 극장에서 나의 첫시집 『안개와 불』의 장례식 퍼포먼스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나는 퍼포먼스 팸플릿을 들고 그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의 책상에 팸플릿을 놓고 나왔다. 그리고 하루종일 퍼포먼스 준비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 몇 달 전인 1988년 12월, 나는 첫시집 『안개와 불』을 민음사에서 출판했다. 등단 9년만에 낸 시집이었다. 발표한 시를 엮어서 시집을 만들었다면 벌써 2, 3권은 나와야 했다. 그러나 시집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시적 질서를 갖는 우주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고 시집을 구성하는 동안 많은 에너지를 소진시켰다. 대립되는 물질적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세계불화의 한복판에서 자아의 흔들림을 경험하는 개인의 성장과정을 그린 시집 『안개와 불』 구성에 너무 몰입해서 그런지, 시집을 출간한 뒤에 한동안 나는 그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세계와 결별하고 새로운 시를 쓰고 싶었는데 여전히 『안개와 불』의 시 세계는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집 『안개와 불』의 장례식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장례식이라는 제의과정을 통해서 그 시들을 떠나 보냄으로써 새로운 시적 출발을 가능케 하려는 의도였다.

대학로 샘터 파랑새 극장이 쉬는 3월 첫 월요일 저녁을 시집 『안개와 불』 장례식 퍼포먼스 공연날짜로 잡아놓고, 나는 기형도에게 시집 서평을 부탁했다. 조정래, 김초혜 선생이 함께 간행하던 월간 《한국문학》 서평난에 게재될 원고였다. 그때가 1989년 2월초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형도는 흔쾌하게 내 부탁을 받아들여 주었고 좋은 원고를 보내왔다. 내가 알기에는, 그 원고가 기형도 생전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그의 마지막 산문이다.

3월 6일 저녁, 많은 시인, 기자들이 샘터 파랑새 극장을 찾아주었다. 상갓집 분위기와 똑같이 꾸미기 위해 나는 장의사에 가서 ‘근조’라고 검은 글자로 씌어진 커다란 노란등을 빌려 극장 입구에 걸어놓았고, 또 마름모꼴 하얀 종이의 검은 테두리 안에 역시 ‘근조’라고 씌어진 종이를 지하극장 입구 양쪽 벽에 수없이 붙여 놓았다. 무대에는 제단이 있었고 내 시집은 고인의 영정이 놓이는 자리에 양쪽으로 검은 띠를 두르고 놓여졌으며 향을 묶음 다발 통째로 피워 극장 안은 연기로 가득했다. 당시 《한겨레》 문학담당 기자였던 조선희는 매캐한 연기를 참지 못해 쿨럭거리며 극장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했었다. 나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이 미친 듯이 시낭송을 했고, 나중에는 시집을 들고 종을 딸랑거리며 극장 밖으로 나가 시집을 불태우고 오체투지로 그 불꽃을 덮었다.

공연이 끝난 뒤 참석자들과 뒤풀이가 있었다. 술을 마셨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상계동 집으로 들어갔으며 다른 때보다 늦게 일어났다. 그런데 전화가 왔다. 《한국일보》 문학담당 기자인, 내 시집 뒤의 해설을 써준, 김훈 선배였다.

“나 김훈이다. 형도가 죽었다. 지금 서대문 병원 영안실에 있다.”
무미건조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김훈 선배가 감정에 사무쳐서 소리 지르는 것도, 요동치는 것도 보지 못했다. 결국 그와 별로 친하지 못했다는 말인데, 하지만 나는 그가 이성을 잃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 순간에도 아주 사무적인 말투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머리 속이 진공상태가 되었다. 김훈 선배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시운동> 동인들 중심으로 긴급히 연락을 하고 회사에 들러 직속상관 박제천 시인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서대문병원 영안실로 갔다. 오전 10시쯤이었다. 이제 막 영안실 빈소를 준비중이었다. 그의 연세문학회 동기들이 넋 나간 표정으로 몇 사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발인이 있기까지 사흘 동안 나는 그곳에서 보냈다. 회사에 나가지도 않았고 중간에 집에 잠깐 다녀온 기억도 없다. 우리는 미친 듯이 술을 마셨고 서로 주먹질을 하며 싸움을 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상갓집을 꾸며 놓고 향불을 피우고 생쇼를 한 것이 혹시 그의 죽음을 미리 부른 불길한 행동은 아니었을까 수없이 자책을 했다.

시인 권대웅은 나를 붙잡고 “형, 이제 형이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파고다 극장에서 새벽에 발견되기 전까지 기형도의 행적이 묘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소 기형도와 나의 친분관계로 보아서 분명히 어제 저녁 있었던 시집 장례식 퍼포먼스에 기형도가 갔을 것이고,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셨을 것이며, 그리고 사고가 났으므로 아직까지 원인불명인 기형도의 사인에 대해 내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나는 권대웅에게 주먹을 날렸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상갓집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난투극을 벌였다. 야외 천막 안에 모여든 수많은 시인, 작가, 평론가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서로 시비를 걸고 알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하기 직전이었는데, 내가 주먹을 날린 것을 시작으로 영안실 전체가 난투극에 휘말렸다. 이 날의 소동은 다음날 한국일보 휴지통에 소개되기도 한다. 나도 이성을 잃고 폭력을 사용한 점, 아직도 권대웅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 안성 천주교 묘지에 우리는 기형도를 묻었다. 붉은 무덤 앞에서 나는 그의 마지막 시 「빈집」을 읽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언하는 것 같은 시를 읽는 동안 우리 모두 흐느꼈다. 1989년 3월, 왜 우리는 그토록 많은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3월호 《문학사상》에서 청탁을 받고 나는 시를 보냈는데, 「비디오/화산」이라는 그 짧은 시도 죽음의 이미지로 도배된 시였다.

기형도는 불과 4년 조금 넘게 시단 활동을 했고, 한 권의 유작시집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시는 급물살을 타며 변화해 가고 있는 시대적 징후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감지하고 있었으며 90년대 시단으로 향하는 문을 미리 활짝 열어주었다. 너무 짧은 죽음으로 마감된 그의 시세계는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 시사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고 문지방을 막 넘던 찰나에 그는 쓰러졌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하재봉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1년 《문예중앙》 신인상 소설부문(중편소설) 당선. 시집 『안개와 불』 『비디오/천국』 『발전소』. 소설 『콜렉트콜』 『블루스 하우스』 『쿨재즈』 『황금동굴』 『영화』

출처 : 너에게 편지를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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