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도 작품 해설
[정리/편집 현항석]
[이상은 누구인가?] - "한국 현대시 400선" -양승국 저-
호는 하륭, 보성고보 및 경성고등공업고등학교 건축과 졸업.
넉넉지 않은 집에서 손가락이 잘린 아비와 곰보인 어미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유년시절을 백부의 손에서 자란 소년 해경은 어려서부터 혼자있기를 좋아하고 말 수가 적었다. 우리에게는 난해한 작품을 쓴 난해한 작가로 알려진 그는 사실 글보다는 그림에 먼저 소질을 보였다.(1931년 조선미전에서 자화상으로 입선)
그의 작품은 항상 독자를 외면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글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자문에 대한 자답을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27년의 길지 않은 인생동안 오직 '나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한 그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짐과 함께 후에는 정신적인 분열 현상의 증후까지도 나타난다. 날개의 주인공은 바로 그런 자신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혹자는 그를 정신병자, 미친놈이라고 비판하곤 한다. 물론 그의 문학을 우리가 만든 문학감상 기계에 넣는다면 쓰레기라는 답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허나 그의 작품을 작품으로써 보지 않고 그의 인생 삶으로 여겨 마음의 눈으로 평가한다면 오히려 실마리는 쉽게 풀릴 것이다. 끝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을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20세기에 살면서 21세기의 생각을 가진자'일 것이다.
[오감도 작품에 대하여]
오감도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작품이다. 원래는 30회를 목표로 연재를 시작했으나 연재가 시작되자마자 공무국에서는 오감도(烏瞰圖)라는 것은 조감도(鳥瞰圖)의 오자가 아니냐고 물으러 오기도 하고 "미친놈의 잠꼬대냐?", "그게 무슨 시란 말인가", "당장 집어치워라", "그 이상이란 자를 죽여야 해!", "무슨 개수작이냐", "그게 대체 어쩌자는 시냐" 등의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쳐 더 이상 연재를 할 수 없어 15회에 중단되고 말았다.
이 때 조선중앙 학예부장으로 있으면서 오감도의 연재를 기획했던 이태준은 독자들의 항의 때문에 사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15회까지 연재를 밀고 나갔지만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고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있다.
오감도 연재를 마치면서 이상은 "이천점(자신이 쓴 시 : 필자 주)에서 30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31년 32년 일에서 용대가리를 떡 꺼내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달고 그만 두니 서운하다. 깜박 신문이라는 답답한 조건을 잊어버린 것도 실수지만 이태준, 박태원 두형이 끔찍이도 편을 들어준 데는 절한다. 철(이것은 내 새 길의 암시오, 앞으로 제 아무에게도 굴하지 않겠지만 호령하여도 에코)이 없는 무인지경은 딱하다. 다시는 이런 (물론 다시는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이고 위선 그만둔다. 한동안 조용하게 공부나 하고 따는 정신병이나 고치겠다)라는 "오감도 작자의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은 발표되지 못했다.
이상 시는 기존 문법을 무시하고 씌어지는 난해한 시로 잘 알려져 있다. 띄어쓰기, 단락구분, 역설, 아니러니, 숫자나 기호의 도입 등 일상적인 언어규범을 무시한 이러한 행위는 당시 봉건적인 질서와 모든 정상적인 가치가 무너진 식민지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은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언어 질서인 문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 즉 자신의 삶과 의미를 담아내고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할 수 있는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상의 행동은 봉건적 질서와 식민지 가치의 의미를 상실한 세계에 살고 있는 시인이 자신의 정체성 상실을 막기 위해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상에게 일상적인 언어 질서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고 그것은 기성의 제도와 질서를 대변하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 자신의 삶을 구속하고 분열시키는 봉건적 질서나 식민지 가치와 다름이 없었다. 봉건적 질서와 식민지적 가치에 순응하면서 자아의 실현을 기도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일상적 가치를 표현하는 그런 언어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시가 일상적인 국어 문법을 무시했다고 해서 단어나 문자, 기호들을 연결하는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상 시는 일상언어의 문법을 파괴한 대신 그러한 결합규칙을 나름대로 창조하여 자신의 의미를 구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흔히 비유되는 정신병자와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이상을 정신병자와 동일시하고 이상의 시를 정신분열증의 소산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과 정신병자를 혼동한데서 오는 잘못들이다. 일반적으로 시인이 쓴 시와 정신병자가 같은 것처럼 취급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통일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시인이 쓴 시는 정신병자가 쓴 시처럼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도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병자의 그것에는 아무런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열된 정신 상태를 보여줄 뿐이다.
이상 시는 일상언어의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겉으로 보기에는 단어와 문장들이 아무런 연관 없이 뿔뿔이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분열된 것이 아니라 일상언어와는 다른 질서를 통해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분열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이 시를 일상언어처럼 읽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시는 근본적으로 일상언어와는 다른 질서를 가진 언어이다. 그것은 일상언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위에 2차적인 질서를 덧붙여 일상언어를 낯설게 함으로써 질서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언어다.
시(詩) 제1호
13인의 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적당하오)
제 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 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해설 1]
오감도 시 제1호는 오감도 15편 중 가장 잘 알려진 시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시는 연재 시작부터 물의를 빚었던 작품이다. 이러한 물의의 원인은 대부분 일상언어와 시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오늘에도 마찬가지다. 이 시에 대해 제기된 여러 가지 빗나간 해설과 억측들은 시가 일상언어와 다른 종류의, 즉, 다른 문법질서를 갖는 언어라는 것을 망각하거나 알지 못한 데서 나온 것들이다.
그런 예들 중 하나가 이 시를 시인의 분열증의 결과로 보려는 것이며 다른 것들은 해설이나 추측이 가능한 특정 부분의 의미를 전체의 의미로 판단하는 경우이다.
예를들어 13인이라는 숫자에 대해 조선의 13도를 의미하느니,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와 12 제자를 의미한다느니 하는 말이라든가,
무서운 무서워하는에 대해 무서운은 일본 순사를, 무서워 하는은 조선사람을 의미한다는 해석등이 그것이다.
이 시는 한편의 영화, 특히 공포영화의 세트처럼 구성되어 있다.
첫 연에서 시인은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는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곧 이어 괄호 속에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는 해설을 집어넣고 있다.
다음 연에서 시인은 제1의 아해부터 제13의 아해까지 차례로 나열하면서 무섭다고 한다고 말하며 다시 괄호 속에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라는 말을 집어넣어 하나의 장면을 완성시키고 있다.
그 다음부터 마지막까지는 처음에 제시한 상황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 시인은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는 상황을 제시했지만 이 상황은 마지막 행에서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 좋소"라는 마지막 행에 의해 부정된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라는 2행 역시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라는 구절에 의해 부정된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 그렇게뿐이모였소"라는 구절은 앞서 "무섭다고 그리오"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무섭다고 그리오"가 "무서워하는"과 "무서운"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 이상의 아무 의미도 제공하지 않는다.
또 그 다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에서 "무서운", "무서워하는"의 구분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것임을 드러내준다.
또 "1인의아해가...라도좋소/ 2인의아해가...라도좋소"에 의해 1인, 2인, 3인 나아가 13인 모두라도 상관이 없으며 따라서 13이란 숫자마저 특별한 의미가 없음을 보여준다.
즉 모든 아이가 무서운 아니라도 좋으며 무서워하는 아이라도 좋다는 뜻이다. 일부 연구자들이 13인의 13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태도는 이런 점에서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는 무엇인가 제시해놓고 그것을 차례로 부정함으로써 처음 제시했던 장면을 무화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는 아무 것도 의미하는 바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시는 분명히 처음 제시한 상황을 부정하고 있지만 부정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무섭다고 그리오"의 공포감이다.
시인은 공포감을 제시하기 위해 처음부터 치밀한 전략을 가지고 세트를 짜고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그 공포감이 특정한 대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절대적인 공포감, 절대적인 존재의 위기감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이 시에서 세트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지 세트 자체가 이상이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닌 것이다. 이상은 독자들이 세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것을 걱정하여 그것을 제거시키는 친절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라"는 첫 장면에서 눈치 빠른 독자는 공포감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시인은 친절하게 괄호 속에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라는 구절을 넣음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고 하고 있다. 괄호 속의 대사는 지문 형식을 갖는 것이다. 그 다음 시인은 제1부터 제13까지 숫자를 하나씩 나열함으로써 아이들이 한꺼번에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겁에 질려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씩 뛰어나오는 것처럼 인지시킴으로써 상황을 더욱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놓고 있다. 13인이 한꺼번에 달려가는 것보다 하나씩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장면 자체를 더욱 괴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러한 나열을 통해 충분히 공포감을 이해하게 되겠지만 시인은 다시 한 번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 그렇게뿐이모였소라/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세트를 완결짓고 지금까지의 상황이 공포감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 다음에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 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라는 구절은 다시 처음에 제시했던 상황에 대한 부정이다. 결국 이 시 전체에서 처음에 의도적으로 제시되었던 세트들은 모두 부정되고 공포감만이 남게 된다.
이상이 이 같은 세트를 연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시에서 제시되는 공포감을 절대적인 공포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판단된다.
이상이 살던 시대는 식민지 시대이다. 식민지 시대 모든 인간적인 가치와 실존적 자유는 박탈된다. 모더니스트 예술가로서 20세기 서구적 자유와 개성을 추구하는 청년 시인 이상에게 당시 봉건적 질서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청년 이상에게 식민지적 가치와 제도, 그리고 19세기적 봉건적 윤리, 질서는 진정한 가치로 생각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가치와 질서 속에서 이상의 자아는 질식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 배치되는 현실 앞에서 이상은 마치 낯선 이방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상 세계는 이상에게 무감각하고 차가운 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이상은 세계를 벗어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죽음처럼 무감각하고 무의미한 세계 속에 홀로 내던져진 존재로서 이상은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절름발이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느끼는 순간 공포감으로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감도라는 제목도 그러한 죽음의 세계를 그려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이상에게 이 세계는 고독한 까마귀가 바라본 세상, 즉 죽음의 세계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까마귀처럼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해설 2]
보통의 서정시에 친숙한 독자의 눈으로 보면 이 작품은 매우 어려워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난감할 것이다. 우선 표면화된 내용을 좇아 요약해 보기로 하자.
(1) 13인의 아이가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한다.
(2) 13인의 아이가 모두 무섭다고 한다.
(3) 그 중 누가 무서운 아이고 누가 무서워하는 아이라도 좋다.
(4) 13인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여전히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다. 먼저 13이라는 숫자에 대해 눈여겨 보자. 이 숫자는 어쩐지 불길하다는 느낌을 준다. 서양 사람에 의해 유포된 관념이지만, 예수가 열두 제자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눌 때의 사람 수가 열셋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 중에 누군가가 예수를 밀고했다. 무서운 자가 그들 속에 끼어 있는데,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를 모를 때 느끼는 불안감이 심각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가 무서운 아이이고, 모두가 무서워하는 아이들이기도 하다는 말이 된다. 이 불안이 13인의 아이를 질주하게 한다. 공포로부터의 탈출인 셈이다. 그런데 그 길이 '막다른 골목'이라도 좋고 '뚫린 골목'이라도 좋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일까.
이 말은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라는 구절과 통한다. 아무리 달린다 하여도 공포는 끝내 따라올 것이므로, 공포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할 것이므로, 길이 뚫렸든 막혔든 달리든 달리지 않든 마찬가지라는 뜻이 된다. 공포로부터 해방될 길이 없는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가 이 시에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 소통이 단절된 사회의 공포를 드러내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참다운 인간 관계를 갈망하는 시인의 마음이 역설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하겠다.
"모든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은 기교를 낳고, 그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고 소리쳤던 이상. 만약 우리 문학사에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땅의 문학은 참으로 무미건조하였을 것이다. 이상을 현대시의 기수(旗手)라며 천재적 시인으로 높이 평가하는 평자(評者)가 있는가 하면, 당시 일본 문단에 유행했던 시경향의 단순한 모방일 뿐이라며 낮게 평가하는 평자도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쪽의 평가를 받든지 간에 그는 분명 '이상(異常)한' 시인이자 소설가요, 수필가로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20세기의 정신으로 19세기의 현실을 고민하던 그가 30회를 예정하고 2천 편이 넘는 작품에서 골라냈다는 30편을 당시 『조선중앙일보』 문화부장으로 있던 이태준에게 넘겨 발표하게 한 이 작품은 게재 첫날부터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 전화와 비난 투서로 인해 결국 15회로 중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발표시부터 문단 내외의 주목을 받아 온 그의 시에 대해 많은 문학 연구가들뿐 아니라 심지어 수학자나 정신과 전문의까지 연구하고 있으나, 어느 누구도 속시원히 설명해 주지 못할 만큼 그의 시는 난해하기만 하다. 어쩌면 정신병자의 장난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시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등 기존 문법 질서의 파괴와 숫자, 기호, 도표의 사용으로 인해 더욱 그 의미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모든 시의 미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시 형태를 취하는 일종의 초현실주의(sur-realism), 또는 다다이즘(dadaism) 경향의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독자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상태의 도면을 일러 '조감도(鳥瞰圖)'라 하지 '오감도(烏瞰圖)'라고는 하지 않는다. 연재시 신문 조판 과정에서의 실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이상한 시를 쓴 이상이고 보면 능히 제목부터 의도적으로 국어 사전에도 없는 이러한 단어를 시의 표제로 삼았을 성싶다.
이 [시 제1호]에서 시적 자아는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조감하고 있는데, '조감도'를 '오감도'로 바꾼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나타난 현상만으로만 보면, 풍경을 조감하는 시적 화자가 자신을 새가 아니라 까마귀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이자 불길한 새의 표상인 까마귀가 아해들이 질주하는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이 작품은 곧 자기 풍자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시 제1호]의 감추어진 의미를 찾아내기란 매우 힘들지만, 표면적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전체의 내용은 크게 4단락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락 :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한다.
둘째 단락 : 13인의 아해 모두가 무섭다고 한다.
셋째 단락 : 그 중의 어떤 아해가 무서운 아해든, 무서워하는 아해든 상관없다.
넷째 단락 :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여기서 먼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13'이라는 숫자이다. 이것의 의미는
(1)당시 우리 나라의 도(道)가 13도였다는 것으로 식민지 조국을 상징
(2)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와 12제자를 상징
(3)무수(無數)의 상징
(4)'13의 금요일'처럼 가장 불길한 숫자로서의 상징
(5)일종의 국외적(局外的) 성격을 띤 사물을 상징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 작품에서의 의미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오감도'의 까마귀의 불길함과 연관지어 볼 때, 이 13이라는 숫자도 불길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13인의 아해 모두가 '무섭다'며 질주하는 것은 공포심 때문이다. 아해들이 질주하는 길이 막다른 골목이기에 그들이 공포에 떤다고도 할 수 있지만, 마지막 연에서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상관없다고 한 것을 보면 아해들의 공포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뚜렷한 이유가 없는 공포는 곧 불안에 가까운 것으로 도로를 질주하는 13인의 아해는 결국 불안을 앓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질주하는 행위는 자신들의 정체 모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불안감을 갖고 있는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까마귀가 내려다 보는 풍경이란 더욱 불안하고 음산한 느낌까지도 준다.
그런데 질주하는 13인의 아해 중, 무서운 아해나 무서워하는 아해가 몇이든 상관없다고 한다. 그것은 13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로 이루어져 있지만, 누가 무섭고 누가 무서워하는지 굳이 따질 필요가 없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13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이자 무서워하는 아해라는 반어적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무섭고, 무서워하는 사이가 되어 13인의 아해는 더욱 불안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가 불안을 느끼는 존재요, 스스로가 불안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므로 질주하는 곳이 막다른 골목이건 뚫린 골목이건 간에 어디에서도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도로로 질주해도 결국은 불안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마지막 행에서는 13인의 아해가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어디를 가건 불안에 떨며 절망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그들. 이것이 바로 시인 이상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모습이 아닐까? 그러므로 바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고 상호 불신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불안 의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13인의 아해는 맹목적인 자신의 삶을 향해 그저 질주할 뿐이다. 그 불안한 모습을 바라보는 까마귀 이상은 아마도 더욱 불안해하며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가슴 졸이며 살았을 것이다. 현대인의 소외와 불안, 고독을 막다른 골목으로 삼아 절망적이고 암담한 현실 상황을 보여 주고 있으며, 뚫린 골목으로 나타난 희미한 희망의 불꽃이라도 잡아 보려고 하는 현실의 위기 의식을 도식적으로 구도화한 이 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참다운 인간 관계를 열망하는 시인의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시 400선" -양승국 저-]
[참고] 1. 초현실주의란? : 기성의 미학·도덕과는 관계없이 이성(理性)의 속박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것이나 의식 속에 숨어 있는 비현실의 세계를 즐겨 표현하려는 예술 혁신 운동으로, 꿈과 현실, 지상과 천상, 의식과 무의식, 현상과 본질의 대립과 통일을 목표로 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다다이즘에 이어서 일어났다.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쓰던 시의 기법에는 브르통(A.Breton)에서 시작된 자동기술법이 있으며, 그것은 꿈과 무의식의 내면 세계에서 들려오는 이미지를 그대로 기술하는 방법을 말한다. 2. 다다이즘이란 :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루마니아 시인 차라(T.Tzara)가 중심이 되어 제창한 예술 사조로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한 일종의 저항 운동이다. |
이 작품이 바로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오감도] 제 1호이다. 이 시를 신문에 연재하도록 주선한 사람이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월북인지 납북인지 혹은 놀러 갔다가 못 돌아온 경우인지 몰라도 여하간 월북 작가로 분류되었다가 지금은 해금되었다.
이태준은 문장의 귀재라 불리었고 그의 저서 [문장강화]는 그 당시 장기 베스트셀러였다. 그런 모범 문장가가 '이런 시작품'을 신문에 연재하도록 했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다.
이게 무슨 시냐? 귀신 낮밥 먹은 소리 때려치워라! 미치고 싶거든 좀 곱게 미쳐라! 꼭 생긴 대로 노네! 지금 독자를 우롱하자는 것이냐? 독자 모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의 항의 엽서가 신문사 문화부 데스크에 나날이 쌓였고 이태준은 안 호주머니에 사직서까지 넣어 다니며 원래 전 30호로 예정된 연작시의 연재를 강행했으나 결국 시 제15호까지 연재하다가 중단되었고 이상(李箱)은 더 이상 쓰지도 않았다.
그 당시의 '말이 되는' 시에 길들여온 문단과 독자들은 이 도무지 '말도 안되는' 잠꼬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 이 시는 시적 가치라는 측면보다도 이 '말썽' 때문에 유명해져 있다. 이상(李箱)의 [오감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는 일을 퍽 멋있는 화젯거리로 삼는 문청(文靑)들이 많았다.
1.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2.똑 같은 서술을 반복하다가 조금씩 토씨를 바꾼 '의미'에 대해서,
3.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 가서 뚫린 골목도 적당하다고 말한 '깊은 의미'에 대해서,
4.도로를 질주하는 아해와 질주 안하는 아해의 차이에 관한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 문청(文靑)들은 구구 각색의 기발한 해석을 다 내렸다.
그러나 정답은 아직 없고 이상(李箱) 자신도 '의도'를 밝히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 버렸다. 이상(李箱)이 장난 삼아 이 시를 써서 발표했든 혹은 지금의 비평가들이 평가하듯 '모든 기존의 관념과 사유 방식을 철저히 깨부숴 버린'이라든가 '한 시대의 시세계를 마감하고 새로운 문학의 문을 열어 젖히는' 작품을 '과감하게' 발표했든 어쨌든 간에 그의 [오감도]는 우리 나라 [명시선집]에 두루 올라 있다.
그러나 그의 [오감도]가 지금의 시대에 어느 신문에 연재되었다 해도 그것을 인내심 있게 읽을 독자는 없을 것이고 '그 시절의 비난'과 유사한 욕설이 적잖이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이상(李箱)의 [오감도]는 '말도 안되는 말'만 요상스럽게 늘어놓았다는 욕을 먹게 되어 있다.
이상(李箱)의 [오감도]를 이해하려면 그의 일생을 더듬는 방법밖에 없다. '박제가 된 천재'라는 그의 [날개] 첫머리의 암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는 박제가 되기를 한사코 거부한 천재였고, 그 피나는 몸부림이 [오감도]로 나타났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경성공업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건축기사라는 직업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워낙 '머리'가 있으니 본의 아니게(?) 우등생이 되었고 성적이 좋다 해서 조선총독부 소속의 건축기사로 취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인 그는 직장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학생시절에 모자 한 번 똑바로 써 본 일이 없고 교복 단추 하나 제대로 끼워 본 일이 없는 이상(李箱)이란 인간이 말단 기술직 공무원 노릇인들 모범적으로 할 리 없었다. 이상(李箱)은 [봉별기(逢別記)]에서 그때의 일을 단편 형식으로 써 놓았다. 그는 폐병약 한 제를 지어 황해도 백천(白川)으로 들어간다 물 좋고 공기 좋고 온천도 있는 그곳에서 그는 처음에는 기분이 괜찮았다. 그러나 한 달쯤을 배기다 보니 그만 주리가 틀린다. 별수 없이 그는 '장구 소리 나는 집'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 유곽에서 '금홍'이라는 기생을 만난다. 이상(理想)이 23살 때의 일이다.
'체대가 비록 풋고추만 하나 깡그라진 계집이 제법 맛이 맵다. 열여섯살? 많아야 열아홉살이지 했으나 스물 한살이라 한다.' 이것이 [봉별기(逢別記)]에 묘사된 금홍이의 용모다.
'금홍'을 만난 것과 때를 맞추어서 양부인 백부(이상(李箱)은 백부 집에 양자 들었음)가 그만 타계하는데, 이상(李箱)은 이제 겁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는 초혼의 아내를 '집구석에 박아 두고' 금홍이와 신바람이 났다. 소설 속에서도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객혈도 덜 하고 몸이 한결 나아진 듯'하다고 씌어져 있다.
이상(李箱)은 백부 없는 백부집 재산을 상속인 권한으로 마구 처분해서 금홍이와 함께 다방 '제비'도 내고 카페 '69'도 내고 주로 유흥 음식점을 개업하는데 주제꼴이 그런데다 마담을 자청한 금홍이의 돈 빼돌리고 달아났다. 돌아오기가 되풀이되는지라 하는 족족 망한다. 그럭저럭 '금홍'이와도 티격태격하다가 헤어지고 이 여자 저 여자 사귀어 봐야 별 재미도 없고 그래서 속이 대단히 상하고 폐병은 자꾸 심각해져 갔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씌어진 소설이 [날개]고 시가 [오감도]이다. 따라서 [오감도]는 한 천재의 처절한 몸부림이고 절망적인 절규라 할 수도 있다.
[장미 병들다]라는 블레이크의 유명한 시를 60명의 대학생들에게 읽히고 그 시가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를 물었다.
어느 학생은 뱀에 유혹된 이브를 그린 것이라고 했고,
또 어느 학생은 처녀성의 상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답했다.
종교적 의미에서 에로티시즘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해답들은 백인백색(百人百色)이었지만, 단지 원예과 학생 하나만이 '벌레먹은 장미를 읊은 시'라고 대답했는 것이다. 이것은 캐나다의 문예평론가 <노드롭 프라이>의 방송강연을 통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이야기이다.
시를 우유(寓喩)로 착각하는 오류는 이상(李箱)과 같이 이른바 난해한 시를 읽으려고 하는 경우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오감도(烏瞰圖)》'詩 제1호'를 놓고 지금까지 많은 평자(評者)들이 소모전을 계속해 온 것도 바로 '13'이란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려고 한 것인가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3인의 아이'를 예수의 최후 만찬과 결부시키기도 하고, 혹은 조선 13道의 숫자와 관련지어 풀이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외없이 그러한 논자들은 '13'이란 숫자의 우유적 의미(寓喩的意味)만 알면《오감도(烏瞰圖)》'詩 제1호'는 단숨에 풀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상(李箱)의 시는 시가 아니라 난수표(亂數表)로, 그리고 비평가는 비평가가 아니라 암호해독의 판단관으로 대우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누구든지《오감도(烏瞰圖)》 '詩 제1호'를 읽었을 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13이라는 숫자보다는 시의 통념을 뒤엎는 여러 가지 양식의 일탈성(逸脫性), 그리고 시적 언어의 코드 위반(違反) 같은 것들이다.
제목부터가 '오감도'이다. 조감도(鳥瞰圖)를 오감도라고 한 것은 그만두더라도 어째서 시의 제목에 건축 용어가 등장하고, 또 어째서 第一號, 第二號와 같은 비정적(非情的) 숫자 번호판이 달려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13'이라는 숫자도 그같은 일련의 낯선 시적 조사법의 하나로 인식된다.
조사법만이 아니라 시 전체가 건축 설계도처럼 직선이나 사각도형을 이루고 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도형성은 더욱 강조되고, 모든 문자들은 매스게임을 하듯 기하학적으로 정렬되어 있다. 숫자적이며 기하학적이고, 획일적이며 반복적인 그 도형을 볼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자연보다는 인공적인 것, 그리고 근대성(모더니티)이나 도시성 같은 인상일 것이다.
「여러 아이가 길을 달린다」와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사이에는 또 어떤 의미, 어떤 느낌, 그리고 어떤 인식의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대두할 것이다. 전자(前者)가 언어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라면, 후자(後者)는 숫자적이고 개념적이다.
[길/도로], [달리다/질주하다]의 차이는 토착어 對 한자어, 구어(口語) 對 문어(文語)만의 차이가 아니라 그 내포적인 뜻에서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냥 '길'이라고 하면 시골의 오솔길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도로'라고 하면 최소한 직선으로 뻗친 근대적이고 인공적인 도시의 길을 연상하게 된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전통적 비유에 익숙해 왔던 사람들은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라는 진술에서 그와는 색다른 길의 은유적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저 감동적인 영화 [포레스토 검프]와 같은 끝없는 질주와 맞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질주라는 말은 그냥 뛰다 달리다 라는 말과 다르다.
스피드, 관성, 맹목성과 같은 근대문명의 메커니즘과 쉽게 손을 잡게 되는 말이다. 원래 도로라는 말 자체에 질주라는 공시적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모든 도로는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달리도록 명령지어져 있다. 길 위에서 멈춰 서 있다는 것은 남자의 경우라면 부랑자요, 여성인 경우에는 창녀와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도로의 질주라는 말에 속도를 더해주는 것이 바로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에서 시작하여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로 반복 나열되어 있는 시행들이다. 무서움이라는 말 때문에 질주란 말은 도주와 도피의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그러나 다시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라는 말이 등장함으로써 아이들을 달리게 하는 무서움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질주는 쫓기고 쫓는 끝없는 무한 질주라는 것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는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로 바뀌게 된다.
즉 무서운 아이가 곧 무서워하는 아이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이상(李箱)의 시 속에서는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의 그 차이와 대립함이 말소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만이 아니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라는 처음의 진술 역시 뒤에 오면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라고 뒤집힌다. 골목길이나 뚫린 길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질주하는 이 도로 상황은 이상(李箱) 이후의 시대에 유행했던 [부조리]라고 불려지는 그 세계와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무서워하는 아이가 곧 무서운 아이이기도 하다는 진술은 사르트르의 [타자(他者) 이론]과 같은 것이 된다.
즉, 내가 타자(他者)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시선 속에 타자(他者)를 구속하고 정복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타자(他者)가 나를 볼 때에는 나의 존재가 그의 시선 속에서 징발된다. 거미가 먹이를 녹여 먹듯이 남을 본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자신의 의식 속에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보고, 동시에 보임을 당한다. 즉, 우리는 무서워하는 아이이며 동시에 무서운 아이의 역할을 한꺼번에 하고 있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실험관을 관찰하고 있듯 이상(李箱)은 부조리한 인간의 상황을 모순 그대로 관찰하고 기술한다. 그것은 전30편으로 된 연작시의 제목을《오감도(烏瞰圖)》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원래 '조감도(鳥瞰圖)'라는 말은 새가 높은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것과 같이 그려놓은 도형(圖形)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李箱)은 바로 그 새 '鳥'에서 획 하나를 떼내어 까마귀 '烏'로 바꿔《오감도(烏瞰圖)》라고 한 것이다. 아이를 '아해(兒孩)'라고 한자말로 고쳐놓은 것처럼 굳은 살이 박혀버린 그 한자말에 새로운 비유적 이미지가 살아나게 한 것이다. 그 순간 우리 눈앞에는 겨울날 고목나무 가지에 앉아 마을 전체를 굽어보고 있는 까마귀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음산하고 불길하며 흉칙한, 그리고 황량한 불모의 풍경이 그 까마귀 밑에 펼쳐진다. 그 중의 하나가 도로를 질주하는 '13인의 아이들'의 모습인 것이다.
[장미 병들다]란 시를 있는 뜻 그대로 [벌레먹은 장미]라고 대답한 원예과 학생의 말이 의외로 '블레이크'의 시에 접근해 있었던 것처럼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 역시 마찬가지이다.
[13인의 아이]를 예수의 최후 만찬에 모인 사도 혹은 조선 13道에 비겨 도민 대항 체육대회 같이 만들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읽으면 자연히 서로를 무서워하면서 무한질주를 하고 있는 도시의 우리들 모습이 보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13'이라는 숫자 역시 단순한 우유(寓喩)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기능적인 시어의 하나로 인식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숫자가 지닌 절대적이고 비정적(非情的) 이미지, 기하학적 도형 즉 '文明의 鳥瞰圖'를 만들어내는 숫자의 순차적 나열성, 그리고 까마귀와 조응 관계를 이룬 '13'이란 숫자의 불길, 불안한 이미지 등에서 우리는《오감도(烏瞰圖)》에 내재된 복합적이고 다기능적인 시어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정답을 감추어 놓은 퀴즈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침(鍼)을 놓듯이 시 전체의 신경망(神經網) 그리고 상호 유기적인 상관성에서 시적 언어의 혈(穴)을 찾는 작업이다.
이상(李箱)에 의해서 한국시는 처음으로 표현(表現)이 아니라 관찰(觀察)이 되었고, 느낌의 방식이 아니라 인식(認識)의 양식(樣式)으로 바뀐 것이다. <이어령 교수>
▶ 감상의 초점
『오감도』는 일제치하의 억압된 실존적 불안을 그린 작품으로 자동기술법의 실험적 수법을 사용하여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의 경향을 보이는 난해한 시이다. 즉, 사람들이 서로를 두려워하는 현대의 절망적 상황을 그린 작품. 1930년대 다다이즘(또는 초현실주의)의 본보기 작품이다.
이 [시 제1호]에서 13이란 숫자는 서양인들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예수가 로마인들에게 잡혀가기 전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할 때 사람들의 숫자가 13이었다. 13명 중에 예수를 팔아 넘긴 자도 들어 있었던 것. 예수가 그 사실을 넌지시 말했을 때,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누가 밀고자인지 순식간에 불길한 분위기가 이어졌는데 이 작품의 분위기에서 13인의 아이가 모두 무섭다고 한 것과 비슷하다.
반복의 수법을 사용한 이 작품은 피해망상, 과대망상과 같은 병적인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라 볼 수 있으나, 확대 해석하면 인간애를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성격 : 주지적, 관념적, 심리적, 상징적
▶ 어조 : 비판적, 냉소적 어조
▶ 특징 : ①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의 영향
② 실험적 수법
▶ 구성 : ① 13인의 아이가 도로를 질주함(제1연) -도로를 질주하는 아이.
② 13인의 아이가 무섭다고 함(제2-3연) - 무섭다고 하는 아이.
③ 그 중의 어느 아이가 무서운 아이이든, 무서워하는 아이든 무방함(제4연)
④ 13인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않아도 좋음(제5연)
▶ 제재 : 실존적 삶의 모습
▶ 주제 : 식민지 지식인의 공포 의식과 좌절 의식.(무의미의 의미. 인간애의 소망)
▶ 시어의 의미
* 도로를 질주함 : 불안, 공포로부터의 탈피
* 도로를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음 : 아무리 질주해도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므로 마찬가지라는 의미
[마광수교수의 별난해설]
'오감도'는 이상(1910~1937)이 만든 말이다. '조(鳥)'에서 획 하나를 빼 '오(烏)'라고 했다. 암호처럼 난해하고, 놀림 당하듯 불쾌한 시다.
마광수는 이상의 이 이상한 '오감도'를 '정자(精子)들의 무서운 질주'라고 읽었다. "남녀 간의 성교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작품은 성교 시 사정에 의한 정자의 분출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핵심적인 상징어는 '13' '아해' '무섭다' '막다른 골목으로의 질주'인데 이러한 상징어들은 하나같이 섹스와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3'은 모양부터 남녀의 대표적인 성적 표상물이다. 숫자 '1'은 남성의 성기다. '3'은 여성의 유방 또는 엉덩이다. '13'을 '3―'으로 다시 배열하면 배위(背位)가 떠오른다. 따라서 '13인의 아해'는 성교 때 방출되는 숱한 정자들이라는 풀이다.
'무섭다'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다. 프로이트는 '무시무시한 것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무서운 것은 모두 성기를 상징한다"고 갈파했다. 예컨대 무덤 속, 깊은 우물, 밀림, 긴 동굴 등은 죄다 여성기를 가리킨다.
"남성기 역시 여성에게는 호기심과 두려움, 그리고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공포소설이나 공포영화가 줄곧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우리들의 잠재 심리 깊숙이 무시무시한 것을 좋아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고, 무시무시한 것은 곧 섹스와 통하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것은 또한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심리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무서워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마조히즘이고 무섭게 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사디즘이기 때문이다."
'13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는 결국, 성관계를 포함한 인간관계 전부가 가학과 피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암시한다는 설명이다. '막다른 골목'이 여성의 성기라는 것쯤은 이제 절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상은 '뚫린 골목'도 적당하다며 감수하고 있다. "막다른 골목은 말하자면 이성과의 성교 시 음경의 삽입을 통해 즐기는 방법을 말한 것이고, 뚫린 골목은 자기 혼자서 스스로 즐기는 수음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교를 통해서건 자위행위를 통해서건 성적 욕구를 푼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 구절은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는? "수음으로든 성교로든 일단 성적 욕구가 충족된 다음의 상태를 뜻한다. 이미 사정이 이뤄졌기 때문에 더 이상 정자가 질주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리라." (굿데이뉴스 기사중에서 - 20079. 7. 8일자)
시(詩) 제2호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나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시(詩) 제3호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든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든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든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시(詩) 제4호
환자의용태(容態)에관한문제
ㆍ1111111111
1ㆍ222222222
22ㆍ33333333
333ㆍ4444444
4444ㆍ555555
55555ㆍ66666
666666ㆍ7777
7777777ㆍ888
88888888ㆍ99
999999999ㆍ0
0000000000ㆍ
진단0ㆍ1
26. 10. 1931
이상 책임의사 이상(李箱)
전후좌우를제(除)하는유일의흔적(痕跡)에있어서
익은불서목불대도(翼殷不逝目不大覩)
반왜소형의신의안전(眼前) 에아전낙상(我前落傷)한고사(故事)를유(有)함
장부(臟腑) 라는것은침수된축사(畜舍)와구별될수있을란가
시(詩) 제5호
전후좌우를 제하는 유일의 흔적에 있어서 익은불서 목불대도 반 왜소형의 신의 안전에 아전낙상한 고사를 유함
장부라는 것은 침수된 축사와 구별될 수 있을런가
시(詩) 제6호
앵무
※ 앵무는포유류에속하느니라.
내가2필을아는것은내가2필을알지못하는것이니라.물론나는희망할것이니라.
앵무 2필
"이소저는신사이상의부인이냐""그렇다"
나는거기서앵무가노한것을보았느니라.나는부끄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겠느니라.
앵무 2필
2필
물론나는추방당하였느니라.추방당할것까지도없이자퇴하였느니라.나의체구는중추를상실하고또상당히창랑하여그랬든지나는미미하게체읍하였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너로구나"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수류처럼도망하였느니라.물론그것은아아는사람혹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과연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시(詩) 제7호
구원적거(久遠謫居)의지(地)의일지(一枝)·일지에피는현화(顯花)·특이한4월의화초·30륜(輪)·30륜에전후되는양측의명경(明鏡)·맹아(萌芽)와같이희희(戱戱)하는지평(地平)을향하여금시금시낙백(落魄)하는만월·청한의기(氣)가운데만신창이의만월이의형당하여혼륜(渾淪)하는·적거(謫居)의지를관류하는일봉가신(一封家信)·나는근근히차대(遮戴)하였더라·몽몽한월아(月芽)·정일을개엄하는대기권의요원·거대한곤비(困憊)가운데의일년4월의공동(空洞)·반산전도(槃散顚倒)하는성좌와성좌의천열(千裂)된사호동(死胡同)을포도하는거대한풍설·강매·혈홍으로염색된암광채임리한망해·나는탑배하는독사와같이지하에식수되어다시는기동할수없었더라·천량이올때까지
시(詩) 제8호
제1부시험 수술대 1
수은도말평면경 1
기압 2배의평균기압
온도 개무
위선마취된정면으로부터입체와입체를위한입체가구비된전부를평면경에영상시킴.평면경에수은을현재와반대측면에도말이전함.(광선침입방지에주의하여)서서히마치를해독함.일축철필과일장백지를지급함.(시험담임인은피시험인과포옹함을절대기피할것)순차수술실로부터시험인을해방함.익일.평면경의종축을통과하여평면경을2편에절단함.수은도말2회. ETC 아직그만족한결과를수득치못하였음.
제2부시험 직립한평면경 1 조수 수명
야외의진공을선택함.위선마취된상지의첨단을경면에부착시킴.평면경의수은을박락함.평면경을후퇴시킴.(이때영상된상지는반드시초자를무사통과하겠다는것으로가설함)상지의종단까지.다음수은도말.(재래면에)이순간공전과자전으로부터그진공을강차시킴.완전히2개의상지를접수하기까지.익일.초자를전진시킴.연하여수은주를재래면에도말함.(상지의처분)(혹은멸형)기타.수은도말면의변경과전진후퇴의중복등. ETC 이하불상.
진단 0:1 26.10.1931 책임의사 이상
시(詩) 제9호 - 총구(銃口)
매일같이열풍이불더니드디어내허리에큼직한손이와닿는다황홀한지문골짜기로내땀내가스며드자마자쏘아라쏘으리로다나는내소화기관에묵직한총신을느끼고내다물은입에매끈매끈한총구를느낀다그러더니나는총쏘으드키눈을감으며한방총탄대신에나는참나의입으로무엇을내어배앝었더냐.
시(詩) 제10호 - 나비
찢어진벽지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그것은유계(幽界)에낙역(樂繹)되는비밀한통화구다어느날거울가운데의수염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날개축처어진나비는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통화구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내가죽으면앉았다일어서드키나비도날라가리라이런말이결코밖으로새어나가지는않게한다.
시(詩) 제11호
그사기컵은내해골과흡사하다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컵을사수하고있으니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전에내팔이혹움직였던들홍수를막은백지는찢어졌으리라그러나내팔은여전히그사기컵을사수한다.
시(詩) 제12호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덩이공중으로날라떨어진다그것은흰비둘기의떼다이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저편에전쟁이끝나고평화가왔다는선전이다한무더기비둘기의떼가깃에묻은때를씻는다이손바닥만한하늘이편에방망이로흰비둘기의떼를때려죽이는불결한전쟁이시작된다공기에숯검정이가지저분하게묻으면흰비둘기의떼는또한번손바닥만한하늘저편으로날아간다.
시(詩) 제13호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졌다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위협당하는것처럼새파랗다이렇게하여읽어버린내두개팔을나는촉(燭)대세움으로내방안에장식하여놓았다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겁을내이는것만같다나는이런얇다란예의를화초분보다도사랑스레여긴다.
시(詩) 제14호
고성앞풀밭이있고풀밭위에나는내모자를벗어놓았다성위에서나는내기억에꽤무거운돌을매어달아서는내힘과거리껏팔매질쳤다포물선을역행하는역사의슬픈울음소리문득성밑내모자곁에한사람의걸인이장승과같이서있는것을내려다보았다걸인은성밑에서오히려내위에있다혹은종합된역사의망령인가공중을향하여놓인내모자의깊이는절박한하늘을부른다별안간걸인은표표한풍채를허리굽혀한개의돌을내모자속에치뜨려넣는다나는벌써기절하였다심장이두개골속으로옮겨가는지도가보인다싸늘한손이내이마에닿는다내이마에는싸늘한손자국이낙인되어언제까지지워지지않는다.
시(詩) 제15호
1 나는거울없는실내에있다거울속의나는역시외출중이다나는지금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음모를하는중일까.
2 죄를품고식은침상에서잤다확실한내꿈에나는결석하였고의족을담은군용장화가내꿈의백지를더렵혀놓았다.
3 나는거울있는실내로몰래들어간다나를거울에서해방하려고그러나거울속의나는침울한얼굴로동시에꼭들어온다거울속의나는내게미안한뜻을전한다내가그때문에영어되어있듯이그도나때문에영어되어떨고있다.
4 내가결석한나의꿈내위조가등장하지않는내거울무능이라도좋은나의고독의갈망자다나는드디어거울속의나에게자살을권유하기로결심하였다나는그에게시야도없는들창을가리키었다그들창은자살만을위한들창이다그러나내가자살하지아니하면그가자살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거울속의나는불사조에가깝다.
5 내왼편가슴심장의위치를방탄금속으로엄폐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겨누어권총을발사하였다탄환은그의왼편가슴을관통하였으나그의심장은바른편에있다.
6 모형심장에서붉은잉크가엎질러졌다내가지각한내꿈에서나는극형을받았다내꿈을지배하는자는내가아니다악수할수조차없는두사람을봉쇄한거대한죄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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